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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124화 (124/129)

124화. 앞에서 꼬리 치는 햄스터가 뒤에서 발꿈치 문다 (2)

시간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흘렀다.

며칠 동안 블레이크 영지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성벽을 수리하고, 식량을 옮기고, 사람들을 대피시켰으며, 병력을 크게 둘로 나누어 남쪽과 북쪽을 지켰다.

카일과 센을 중심으로 뭉친 병사들은 남쪽을, 그리고 제임스와 기사들을 중심으로 뭉친 기사들은 북쪽을 도맡았다.

그렇게 불안한 고요 속에서 며칠이나 지났을까.

“영주님! 적입니다! 남문과 북문 양쪽을 노리고 있습니다!”

“마법사단과 병사들, 그리고 마수 군대가 몰려왔습니다!”

다급하게 달려온 두 명의 기사가 카일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얼굴로 보고를 받는 카일을 따라 성큼성큼 성벽으로 향했다.

로렌츠 세레나 마인하르트가 데려온 병사들은 앞으로 반나절 안에 도착할 것이다. 녹스를 필두로 한 마수 군대는 해 질 무렵, 북부의 평야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내가 녹스에게 했던 행동은 전쟁 선포나 다름없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겨울의 심장’을 내가 얻었다는 점이었다. 불완전하기는 해도, 어마어마한 힘을 지녔을 것이다. 녹스가 그걸 활용하려 들었다면 블레이크 영지는 저항조차 해 보지도 못하고 모두 끝이 났을 테지.

‘방비하기는 했는데…….’

무사하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전술을 세운들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전장은 없고, 이건 공략법이 있는 게임도, 결말이 정해져 있는 소설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상황이 어떻게 되더라도 이들과 함께 내 운명을 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단 내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북부와 북부를 지탱하는 모든 것을 단 하나도 잃고 싶지 않았다.

“전하.”

성벽으로 나가는 입구 앞에서 카일이 내 나지막한 부름에 뒤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한 치의 두려움도 엿보이지 않았다. 오직 지키고자 하는 결의만이 단단한 그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이내 나도 마음을 다잡았다.

100퍼센트의 기적, 그리고 90퍼센트의 이변 간섭률. 행운과 하트도 넉넉하게 있다. 몸 상태도 요 며칠 사이 부쩍 좋아졌고, 의욕도 가득하다.

나는 우선 카일과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상황을 살피다가, 해가 지기 전에 북쪽으로 옮겨 갈 예정이었다.

유독 짧은 여름이 끝난 영지에 그해의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하얀 눈이 얇게 쌓인 바깥은 눈이 시릴 정도로 희었다.

그 추위를 뚫고 병사들이 나타났다. 시야를 새카맣게 채울 정도로 많은 수의 병력이 영지의 남쪽을 에워싸듯이 도열했다.

내가 잠시 헛숨을 삼키는 사이, 살을 에는 듯한 날카로운 바람을 뚫고 한 명이 선두에 나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카일 블레이크.”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귀에 틀어박혔다. 그의 목소리는 확성기라도 사용한 양 크게 들려왔다.

로렌츠 세레나 마인하르트. 그가 병사들의 한가운데에 서서 과시하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역죄를 물으러 왔다. 너희는 내 선의를 무시하고 황권에 대적할 병력을 비축했으며, 센 랑드와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를 보호하며 황위 교체를 꾀했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두 사람을 내놓고 군대를 해산시킨 뒤, 성문을 개방해라. 황실에 충성을 약속하는 이들의 목숨은 거두지 않겠다. 무고한 희생은 줄여야 하지 않겠나?”

고리타분한 명분이었다. 거리가 멀어 표정은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분명 비열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것이다. 북부의 병사들이 불편한 듯 성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내 침묵하던 카일이 말했다.

“반역? 무엇이 반역이지?”

“…….”

“블레이크 영지는 처음부터 너를 황제로 인정한 적이 없다.”

자칫 오만하게 들릴 법한 목소리였다. 열 받게 할 속셈이었다면 훌륭하게도 성공한 셈이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카일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더없이 훌륭한 군주의 모습이었다.

“블레이크의 땅에 발 디딘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목소리가 낮게 들끓었다.

어떤 설득도, 비아냥거림도, 다짐의 말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블레이크 병사들의 얼굴에 서려 있던 희미한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북부의 안전을 걸고 임할, 최후의 전투가.

“시작해라!”

“대공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블레이크를 위하여!”

“블레이크를 위하여!”

묘한 열기가 번져 가기 시작했다. 결의에 가득한 이들이 제자리를 찾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카일이 눈짓하자, 마법사가 다가왔다.

“……마수학자님. 북문 쪽으로 함께 이동해 주십시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말은요?”

“아래쪽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나와 카일은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그는 희미하게 웃더니,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무사하겠다 약속하마.”

“저도요.”

나는 긴 숨을 내뱉고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녹스의 힘을 느꼈다.

맞지 않는 옷을 껴입은 듯 불편하고 거북했으나, 이런 것쯤 아무렇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힘이 몰려든 마수 무리를 해치우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는 점이었다.

나는 이를 사리문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해가 지고 있었다.

*

로렌츠의 군대와 마법사단, 그리고 마수 무리는 마치 짠 듯이 일제히 짓쳐들어왔다. 그러나, 블레이크 기사단과 성에 남은 사용인들이 성문을 미리 몇 겹이나 막아 둔 덕분에 쉽게 뚫리진 않았다.

하지만, 문으로만 들어오면 어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문을 부수는 것이 요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마법사단과 마수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격 마법을 펼칠 시간이 필요한 마법사단은 비교적 뒤에 있었고, 그들이 불러낸 마수들은 그동안 그 앞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다.

결국, 마법사단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마수 무리를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지금은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0일 남았습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2일 남았습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0일 남았습니다.]

[조회 오류! 존재하지 않는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원작, <겨울의 심장> 조회 중…….]

[일부 내용 조회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일 남았습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이젠 시스템조차도 이곳의 이들이 어떻게 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나는 시스템 창을 홱 치웠다.

‘믿는 게 중요한 거야.’

카일은 이 언 땅의 주인이다. 절대로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이제 나는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수학자님!”

그때, 제임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의 등 뒤로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크고 작은 마수들이 하늘과 땅을 채웠다.

북문을 지키는 기사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퍼지고 있었다. 여태 수많은 마수와 변이종을 상대해 왔지만, 이렇게 많은 수는 처음일 테니까. 평소보다 다섯 배는 더 많은 것 같다고 속삭이는 목소리도 간혹 들렸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카일이 없다. 제임스가 급한 대로 그 역할을 대신하고는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포기하지 마!”

내가 외쳤다.

“블레이크의 모든 사람에게는 살아남을 자격과 의무가 있어! 죽게 두지 않을 거니까,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성루에 오르며 이어 외쳤다. 어둑한 마수들 사이로 새하얀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얀 망령, 녹스. 가장 차가운 땅에서 죽음을 거부하며 은둔했던 마법사. 모든 생명을 집어삼켜, 감히 영생을 꿈꾸던 이.

“네가 얼마나 미쳤는지는 관심 없어.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을 거야.”

내가 작게 읊조렸다.

“이곳을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하지만, 녹스는 북부를 집어삼키길 원했다.

나는 그런 그를 막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 유일한 목표는 카일 블레이크를 지키는 일이니까. 단순히 목숨뿐만이 아니라, 이 터전까지도 지켜 내고 말 것이다.

반드시.

나는 까마득히 펼쳐진 지평선과 그 새하얀 땅을 물들인 마수들을 바라보았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것 같던 끔찍한 몰골의 괴물들 앞에서도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에 오히려 평온했다.

‘시스템, 이변 간섭률로 저들의 심장을 조종하게 해 줘.’

녹스는 변이종을 조종할 수 있다. 그들의 몸에는 ‘마수의 핵’이 있으며, 이는 심장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 말은 곧, 변이종 마수들이 실은 모두 죽은 몸뚱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놈의 조종을 받는 단순한 시체에 불과했다.

‘녹스의 마법에 간섭해서 마력을 거둘 수만 있다면 승산이 있어.’

저 수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북쪽의 안전은 조금이라도 더 보장된다. 이변 간섭률이 온전히 다 채워져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내 몸이 버티지 못했다니까 미련은 접어 두기로 했다.

[힘을 흡수하고 연결 마법을 해제하시겠습니까?]

[성공 확률 90%. 한 번 간섭한 개체에는 다시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90퍼센트면 확률이 제법 높다.

나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저쪽에 있는 놈들을 상대로 전부 도전할게.”

시스템에서 비롯된 푸른 빛무리가 나를 감쌌다. ‘기적’의 힘이 내 전신에 퍼지는 동시에 세상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더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도, 분주하게 사방을 뛰어다니던 병사들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이라고는 죽음처럼 흰 세상, 그리고 수많은 심장 안에 담긴 새파란 생명력만이 전부였다.

[간섭이 시작됩니다.]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립니다.]

[‘동기화’ 진행 중…….]

이윽고, 푸른빛의 마력이 내게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북부대공의 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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