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아니 땐 마탑에 햄스터 지나간다 (4)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나는 냉큼 뛰어가 마법진 앞에 무릎을 꿇고, 행운 코너에서 산 나침반을 중앙에 올려놓았다.
‘경로를 변경할게. 블레이크 성으로. 얼른 보내 줘!’
카일은 응접실 문 앞에 탁자와 의자, 선반 따위를 무질서하게 쌓아 두고는 재빨리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이건가?”
“맞아요. 이 나침반이 마법진의 경로를 바꿔 줄 겁니다. 영지로 이동한 뒤로는 파괴될 거고요. 여기에 서세요.”
카일이 마법진 안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응접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법진에서 흘러나온 푸른빛이 우리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데도 그 외의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사이, 시스템이 땀을 뻘뻘 흘리며 튀어나왔다.
[\(ㅠ﹏ㅠ)/;;;;;;]
[경로가 변경되었습니다.]
[이동 마법진이 통상의 것보다 정교하여,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간섭이 필요합니다.]
[현재 이변 간섭률 85%]
아무래도 이변 간섭률을 지금보다 더 끌어 올려야 하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카일의 가슴팍에 불쑥 손을 넣어 안쪽을 더듬거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 카일은 나를 만류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었다.
쿵.
어느새 바깥에는 하인들이 몰려와 카일이 쌓았던 물건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슈, 뭘 하는 거지?”
“별건 아니고 잠시만 그렇게 가만히 계시면…… 아, 여기 있다.”
이내 내 손끝에 단단하고 조그만 병이 잡혔다. 지난번 연구실에서 훔쳐 온 녹스의 마력으로, 이변 간섭률이 부족할 때 쓰려고 아껴 두었던 것이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한 뒤, 그것을 단숨에 삼켰다. 카일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말릴 새도 없군.”
“그럴 생각도 없으셨으면서.”
나는 찡그리듯이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간도 없는데, 낭비하지 말죠. 목숨 걸고 도박할 수는 없잖아요.”
“…….”
“손, 안 잡아요?”
결국, 문가에 쌓아 두었던 것이 와르르 무너졌다.
무표정한 하인들 뒤로 음산한 미소를 짓는 녹스가 보였다. 늘 여유롭게 늘어뜨린 흰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고, 파란 눈동자는 사납게 반짝이고 있었다.
걸어 다니는 시체 속에서 홀로 숨을 몰아쉬는 놈의 얼굴에 짜증이 역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통쾌했다.
‘꼴 좋다.’
나는 카일의 손을 꽉 잡고 푸른 물약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카일이 검을 들어 이쪽으로 날아오는 비수를 쳐 냈다.
걱정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에겐 못 당해 내겠군.”
“지금은 당해 내려 하지 마시죠. 전하 목숨 살리려고 제 목숨도 같이 걸었잖습니까.”
[경고! 이변 간섭률이 너무 빠르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불러오기’ 된 육신에 타격이 갈 수 있습니다!]
상관없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니까.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변 간섭률이 모두 오르기만을 기다렸다.
[현재 이변 간섭률 100%]
[마법진이 활성화됩니다.]
그때, 카일이 낮게 읊조렸다.
“운명 공동체, 로군.”
챙, 하고 칼이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도 카일이 나를 위해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녹스는 우리의 대화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뚜렷한 살기, 당혹감, 동요, 분노, 짜증, 낭패감으로 얼룩진 표정의 사내가 우리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파지직, 하고 푸른빛이 터져 나오며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
[목적지가 마법으로 보호 받는 지역입니다. 목적지와 최대한 가까우면서도 안전한 곳으로 재설정합니다.]
[경로 탐색 중…….]
[이동합니다.]
녹스에게 붙잡히기 직전, 마법진의 빛이 우리를 온전히 집어삼켰다.
[행운을 빌어요! (ෆ`꒳´ෆ)]
*
설마하니 이곳의 바람이 따뜻하다고 느끼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카일은 시리도록 새하얀 풍경 앞에서 잠시 멍해졌다. 어찌나 흰지, 눈이 시큰거릴 정도였다.
벌판. 새하얀 눈과 얼음이 뒤엉킨 겨울의 땅. 블레이크 영지에서 북부 평야 지대로 이어지는 길목에 카일은 우뚝 서 있었다.
“……맙소사.”
눈앞에 보이는 잿빛 성벽의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정말로 돌아왔다. 그 먼 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어 영지로 돌아온 것이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카일은 재빨리 제 품에 당겨, 안았던 이를 찾았다. 저를 이곳으로 무사히 데려온 이가 괜찮은지 확인해야 했다.
“슈.”
그는 그곳에 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차갑게 식은 몸은 덜덜 떨지도 못할 만큼 지쳐 있었다.
카일은 재빨리 슈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파랗게 빛나는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풀린 눈동자가 애써 카일을 담으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까무룩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슈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지, 입술 끝이 말려 내려가며 살짝 깨물렸다.
카일은 재빨리 그의 몸을 받쳐 안고는 상체를 살짝 숙이게 했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을 압박하며 다른 손을 입 앞에 가져다 댔다.
“괜찮다.”
“커헉, 큭…….”
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슈가 헐떡이며 피를 더 토해 냈다.
슈의 상태가 이상하다. 그의 눈이 파랗게 빛나는 것이 그 증거였다. 아마 이동하기 직전 먹은 마법약이 문제였던 것 같았다.
카일은 재빨리 제 안의 마력을 움직여 슈의 힘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의 이마에 입술을 붙이고, 등을 쓸며 제 망토로 감싸듯이 안았다.
“조금만 참아라. 금방 덜어 낼 테니까.”
하지만, 그 말에 슈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그만.”
슈가 카일의 어깨를 밀며 힘겹게 말했다.
“덜어 내면, 안 됩니다. 나중에…… 써야 해요.”
“…….”
“……녹스, 그 자식이…… 분명히, 올 겁니다. 변이종을…… 데리고. 그럼…….”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았다. 북부 마법사단이 움직일 때를, 그리고 핵을 가진 마수들이 떼로 쳐들어올 때를 대비하려는 것이다.
마법진에 간섭했던 것처럼, 녹스가 만든 심장을 역으로 조종할 수 있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수백 명의 병사가 피를 흘리지 않게 되겠지.’
그러나, 그걸 위해서 참으라고 할 수 없었다. 수백 명을 살리기 위해서 눈앞의 그가 피를 토하는 일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아니.”
카일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피조차 제대로 토해 내지 못해서 콜록거리는 슈를 바라보는 내내 얼굴이 구겨져 갔다.
“조금도 괜찮지 않아. 넌 지금 상태가 심각해. 이대로라면 정말로 큰일이 날 수도 있단 말이다!”
“……전하.”
“지금은 얌전히 내 말 들어.”
그는 단호하게 말하며 연인의 몸을 안아 들었다. 잔기침을 몇 번 이어 가던 슈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일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카일은 바짝 붙은 몸을 통해 천천히 마력을 흘려보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조그만 몸 안에서 멋대로 날뛰는 녹스의 힘을 모두 짓눌러 버리고 싶었지만, 거기까진 슈가 원하지 않았다.
카일은 부지런히 성을 향해 걸어갔다. 영지의 북쪽으로 향하는 성루 위, 검은 인영들이 줄줄이 나타나 저들이 본 것이 환상은 아닌지 눈을 비비며 재차 확인했다.
“……전하? 전하십니까?”
“갑자기 나타났는데……. 이제 헛것이 보이나?”
“아닌 것 같은데? 우릴 올려다보고 계시잖아.”
병사들이 얼빠진 표정으로 웅성거리자, 마침 도착한 제임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카일이 슈를 안은 채 성문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전하!”
카일이 슈를 능숙하게 한쪽 팔로 안으며 오른팔을 뻗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수신호 몇 개를 보냈다.
‘귀환’. ‘전쟁에 대비’, ‘최고 경계 태세 유지’.
카일의 뜻을 곧장 알아들은 제임스는 휴식 중인 병사들을 불러오라 명령한 뒤, 한달음에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이건…….”
가까이에서 본 카일과 슈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카일은 녹스와의 전투 때문에 어깨와 팔 곳곳에 상처를 입었고, 토해 낸 피를 다 닦지도 못한 슈는 그대로 기절한 채였다.
특히나 축 늘어진 손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서, 제임스는 슈를 한참이나 바라보며 그가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제임스가 카일을 따라 성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카일은 거의 달리는 것 같은 속도로 발을 옮겼다.
“탈출했다. 그사이 센 랑드가 보호를 요청한 적이 있나?”
“그렇습니다. 나흘 전 도착했으며, 벨리알 전하도 함께 오셨습니다. 그 신원에 대해서는 기사단만 알고 있는 상태고요.”
“곧 수도에서 로렌츠가 군대를 끌고 올 것이다. 그리고 마법사단도 북쪽에서 내려올 거고. 우리를 양쪽에서 감싸서…….”
그의 말에 제임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이야 했지만, 생각보다 더욱 갑작스러웠다. 심장이 기분 나쁘게 쿵쿵거리는 기분이었다.
카일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며칠 정도의 여유는 있을 거다. 하지만 언제 도착할지는 알 수 없으니, 경계 태세를 갖추고 영지민들을 모두 대피시켜라. 센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여기 있습니다!”
제임스의 옆으로 곧장 센이 따라붙었다. 짧게 자른 갈색 머리카락은 귀를 겨우 덮을 정도였고, 다부지고 결연한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슈는 어떻게 된 건가요?”
카일은 센의 질문에 독약이라도 삼킨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문제가 좀 있었다. 공간 이동 마법진을 통해서 여기까지 오느라.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센은 손을 살짝 뻗어 슈의 이마를 짚어 보더니 말했다.
“회복이 먼저겠네요. 따뜻한 목욕물, 여분의 옷과 간단한 음식을 올리겠습니다.”
“영지 소속 마법사들은 부르지 마.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내일 아침까지는…….”
“급한 문제가 아니고서는 먼저 찾아뵙지 않겠습니다, 전하.”
“그래.”
침실로 들어선 카일이 슈를 살짝 고쳐 안으며 센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그의 얼굴이 살짝 펴졌다.
그가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센.”
그러자, 그녀가 찡그리듯이 웃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대공 전하.”
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