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아니 땐 마탑에 햄스터 지나간다 (3)
‘겨울의 심장’.
신의 영역을 능가하는 절대적인 힘. 모든 마법사의 열망 끝에 있는 것.
심장의 겉 부분은 절대로 녹지 않는 눈 결정을 엮어 만든 듯 투명하게 반짝였고, 그 안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푸른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수많은 목숨을 삼키고 발하는 찬란한 빛은, 몇 줄의 설명으로는 차마 다 담을 수 없는 기괴함을 지니고 있었다.
[겨울의 심장은 영생을 선사하는 기적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그저, 누군가의 생명을 집어삼킨 푸른 괴물일 뿐.]
그 말대로였다. 저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목숨이 사라졌는지 안다면, 기적이라는 단어 따위를 꺼내지는 못할 것이다.
‘이 비극의 결정체를 내 손으로 부술 수만 있다면.’
나는 온몸으로 푸른 심장을 끌어안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것에 바짝 붙은 채로, 그 안에 깃든 모든 힘을 빨아들이는 데 집중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행운 수치가 오르기 시작했다.
[현재 보유 현황 | ♣×1950]
[현재 보유 현황 | ♣×2600]
하지만 너무 많은 힘이 한꺼번에 들어와서일까? 눈앞이 흐려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여기서 기절하면 안 돼!’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나는 엉망으로 뒤엉키고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무시하며 남은 행운을 모두 빨아들였다.
[현재 보유 현황 | ♣×3500]
[현재 보유 현황 | ♣×4399]
조금만.
……앞으로, 정말 조금만 더.
검이 부딪치는 소리에 이어서 상처를 입은 듯 옷과 살이 베이고 피가 튀는 소리가 났다. 카일의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관이 생각보다 깊어서 시야가 온통 벽에 가로막혔다.
속이 바짝바짝 타던 때, 드디어.
‘됐다!’
푸른빛이 모두 내게 흡수되더니 행운 수치가 한꺼번에 올랐다.
[현재 보유 현황 | ♣×5432]
나는 손을 떼고는 재빨리 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아직 ‘헐레벌떡 아몬드 휘낭시에’의 효과가 사라지지 않아서, 몇 번 미끄러지긴 했어도 무사히 올라와 카일의 상태를 살필 수 있었다.
그는 다치기는 했지만, 아직 움직일 수 있어 보였다.
안도한 내가 소리쳤다.
―찍! (지금이야!)
내 외침에 카일이 재빨리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아이템을 꺼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미리 사서 주었던 것으로, 일전에도 먹은 적 있는 것이었다.
[긴급 탈출 호박씨 스틱 | 기적 수치 8% 소모 | 반경 10m 안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습니다.]
내 외침이 카일의 근처가 아닌 관에서 들려오자, 녹스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눈을 속였다, 이거지.”
또렷한 살기가 느껴지는 음성이었으나, 위축되어 있을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펄쩍 뛰며 시스템에게 외쳤다.
―찍! 찍찍! (불러오기 해제! 해제시켜 줘!)
[(๑•̀ㅂ•́)و✧]
잔뜩 힘이 들어간 이모티콘이 떠오르더니, 밝은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지기 직전, 카일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따라서 끄덕였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우리의 목적은 겨울의 심장을 훔치는 것이 아닌, 둘이서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니까.
*
“야, 이! 시스템! 이런 건 눈치껏 딱! 알아서 조정 좀 해 줬어야지!”
[┗( T﹏T )┛]
벌을 서는 듯한 이모티콘이 연달아 떠올랐다. 나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갈무리하며 혀를 찼다.
상황인즉, 이랬다.
불러오기가 해제된 직후, 인간의 모습으로 공중에서 떨어진 나는 그야말로 발에 불이 나게 달리는 중이었다. 내가 불러오기를 해제한 그 위치가 하필이면 녹스의 하인들이 득시글한 지점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지정할 때는 몰랐지! 이렇게까지 운이 없을 줄은!
‘가만. 설마, 녹스가 손을 써 놓은 건가?’
그 남자라면 불가능한 짓도 아니다. 내 힘, 그러니까 ‘기적’의 파장을 느끼고 개입하려고 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으니 ‘불러오기’를 해제한 방향을 좇아, 하인들을 움직였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성가시게!”
그때, 시스템이 얼른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 냈다.
[러브러브 코너~❤]
[자유자재 빼빼로 스틱 | ❤×777]
[빼빼로처럼 가볍게 때리자! 하지만 맞을 때는 바위에 맞는 것처럼 아프답니다!]
언제 이런 걸 만들었대.
나는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정말 빼빼로처럼 생긴 검이었는데, 광택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빼빼로 스틱’으로 하인들을 부지런히 쳐 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무기가 가벼워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길을 뚫을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 추워 죽겠네!”
급하게 ‘불러오기’를 한 바람에 카일이 직접 만들어 준 얇은 셔츠와 면바지 차림이었던 탓이었다.
바람이 대체 얼마나 매서운 건지, 달리는 내내 이가 딱딱 부딪혔다. 발바닥은 부르틀 정돈데 열이 오르기는커녕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고, 관절은 딱딱하게 굳어 다리를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이러다 하인들에게 붙잡히기 전에 얼어 죽겠다는 생각에 시스템을 불러 상점을 띄울 때였다.
쐐액―!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날카로운 칼날이 새파란 시스템 창을 꿰뚫고 내 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뭐, 뭐, 뭐야?!”
당황한 나는 허리를 크게 비틀어 단검이 그리는 궤적에서 벗어났다. 벽에 정확히 꽂힌 그것은 시퍼렇게 버려진, 누가 봐도 나를 죽이기 위해 던진 무기였다.
“……해 보자는 거지.”
던지는 거라면 나도 자신 있다.
나는 입매를 삐뚜름하게 비틀어 올리곤 인벤토리에서 활과 화살을 꺼냈다. 말을 타고 과녁을 겨누는 연습은 했지만, 내가 달리면서 쏘아 본 적은 없는데.
“원래 위험할 때는 의외의 능력이 발휘되고, 뭐 그런 거잖아.”
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멀리서 쏟아져 내려오는 하인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살은 정확히.
“…….”
반대쪽 벽에 틀어박혔다.
“우, 우와아악!”
[(((φ(◎ロ◎;)φ)))]
나는 다급하게 활을 휘둘러 다가오는 하인의 머리를 후려쳤다. 모로 쓰러진 하인을 밟으며 크게 뛰자, 뒤에서 또 다른 하인이 칼을 휘둘렀다.
무장한 놈들까지 보낼 일이냐, 이게!
쓰러진 하인들과 밀려 내려오는 하인들을 피하려 고군분투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결국, 쓰러진 하인 중 하나가 내 발목을 붙잡고 끌어 내리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크게 휘청거렸다. 동시에 머리 위로 크게 그어지는 단검 역시 눈에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이렇게 죽는 걸까?
푹!
그때, 섬뜩한 소리와 함께 셔츠에 무언가 쏟아졌다. 서늘하고 축축한 탓에 불쾌한 감각이 훅 퍼졌다.
단검을 들고 있던 하인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더니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슈.”
“……전하!”
일격에 죽은 하인의 몸을 발로 찬 카일이 내 팔을 잡아끌어 당겼다. 그러고는 내 안색을 빠르게 살폈다. 아마 셔츠에 묻은 피가 내 피인지, 다른 이들의 피인지 구분하는 것 같았다.
“안 다쳤습니다.”
나 역시 그에게 바짝 붙으며 빠르게 속삭였다. 그래도 얼추 비슷한 곳에 떨어져서 다행이다.
“이럴 시간이 없어요. 응접실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
녹스와 하인들이 쫓아올 것이다. 겨울의 심장에 들어 있던 힘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지.
‘잡히면 반드시 죽는다.’
그 생각이 오싹할 정도로 선명하게 와닿았다. 나는 카일을 끌고 재빨리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두 개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자 숨이 차오르다 못해 목 안쪽이 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까 하인들과 싸우다가 발목을 접질렸는지 다리가 축축 처지고 몸이 앞으로 꺾이기까지 했다.
“잠시.”
카일은 그런 내 변화를 곧장 알아챘다.
그는 재빨리 내 허리를 낚아채더니, 번쩍 들고 속도를 높였다. 상체가 앞으로 훅 쏠리며 구역감이 치밀었으나 나는 양손으로 입을 막고 버텼다.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어느새 따라붙은 하인들이 보였다. 핏기도, 표정도 없는 이들은 숨 한번 헐떡이지 않은 채 무시무시한 속도로 우리를 따라왔다.
‘공포 영화가 따로 없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아래에서 칼이 날아왔다. 새하얗게 벼린 비수였다.
피할 공간이 마땅치 않다. 올라가는 속도 때문에 방향까지 틀 수가 없었다. 비수가 노리는 곳은 카일의 허벅지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행운을 소모해서 칼을 막아 냈다. 까가각! 엄청난 소리와 함께 비수가 부르르 떨렸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새파란 방어막을 노려보았다. 버텨라. 무조건 버텨. 절대로 버텨야 해.
“전하, 얼른!”
“노력하고 있다!”
카일이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그들이 우리의 시야에서 잠시 사라지자마자, 비수 역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벽에 달려가 틀어박혔다.
“야! 녹스! 이 양심 없는 새끼야! 칼은 심했잖아, 칼은!”
나는 아래를 향해 버럭 소리치며 내 상태를 확인했다.
[현재 보유 현황 | ♣×4848]
꽤 강한 공격을 막아내서일까, 목표치 아래로 행운 수치가 깎여 버렸다. 이대로라면 어떻게든 응접실에 도착하더라도 나침반을 살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눈을 굴리며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볼 때였다. 어슴푸레 빛나던 카일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슈. 잠깐 놓아줄 테니, 발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빨리 뛰어 올라가라.”
“혼자서요?”
“그래. 잠시면 된다. 할 수 있겠나?”
갑자기?
분명히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설명은 나중에 들어도 늦지 않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카일이 나를 내려주자마자 나는 난간을 잡고 최대한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눈앞이 어질어질한 게 갑자기 올라간 행운 수치 때문인지, 이변 간섭률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죽도록 달려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사이 카일은 살짝 아래로 내려가, 가장 가까이 접근한 하인과 병사들을 죽이고 그 심장에 있는 마석을 뽑아 왔다.
거의 다 올라왔을 무렵, 카일은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그가 가져온 물건을 내게 쥐여 주었다. 피에 흠뻑 젖어 있기는 하지만, 영락없는 ‘마수의 핵’이다.
나는 재빨리 그 푸른빛을 흡수했다.
“살짝 모자랐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정도는 네 얼굴만 봐도 알아.”
“햄스터 박사 다 되셨네.”
“슈 박사겠지.”
나는 헛구역질을 삼키며 애써 웃어 보였다. 이 와중에도 이런 썰렁한 농담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어떻게든 따돌린 뒤 도착했다. 카일은 망설임 없이 응접실 문을 발로 차 날렸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서 카펫을 걷어 올렸다.
곧, 우리를 고향으로 인도할 푸른 마법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