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아니 땐 마탑에 햄스터 지나간다 (2)
이튿날 아침.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햄스터의 몸으로 돌아가 카일의 손바닥 위
에 안착했다. 동시에 찌우욱, 하고 입을 쩍 벌리며 하품하자 그가 내 이마를 살
살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단단히 붙잡아라, 슈. 떨어지지 않게 할 테지만, 여의치 못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 대비해서 나쁠 것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팔로 그의 검지를 끌어안았다.
카일은 내가 단단히 달라붙은 걸 확인하고서야 기척을 죽이며 계단을 내려가
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Д゚;≡;゚д゚)]
왜 네가 더 야단이냐.
나는 한 손을 크게 휘적여 부산스러운 시스템을 밀어내고 숨죽인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탑은 좌우의 너비보다 위아래 깊이가 더 아득한 구조였다. 계단을 하염없이
내려가면 중간 즈음에 바깥으로 이어지는 현관이 나오는데, 그 현관을 지나쳐
반대쪽으로 돌아가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왔다.
“슈.”
지하로 통하는 입구 앞에서 카일이 소리를 죽여 나를 불렀다.
―찍. (왜?)
“느낌이 좋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서 떨어지지 마라.”
―찌찍. 찍찍찍. (알았다, 알았어. 걱정하지 말라니까.)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나만 내보낼 생각도 말고.”
―…….
눈치 빠르긴.
“대답.”
―찌익. (네에.)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카일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하로 이어지는 벽과 계단은 지상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위층이 반듯하게
깎인 벽돌로 만들어졌다면, 아래쪽은 광산에서 광물을 막 캔 뒤 아무렇게나 쌓
아 올린 느낌이 났다.
‘엉망이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닿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는지.
아무튼, 정제되지 않은 공간을 흐릿하게 비추는 전등의 불빛에 뿌연 먼지가
부유했다. 그 때문에 코가 간지러워진 나는 기침을 하지 않으려 앞발로 얼굴을
몇 번이나 문질러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왔을까.
“……점점 어두워지는군.”
카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카일의 말에 동의했다.
벽에 기름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이 어둑했다.
무엇보다 일정 깊이에 다다르자, 군데군데 유령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시종들이
이따금 보였다.
‘그래도 이지는 없는 모양인데.’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그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었다. 초점 없이 걸어가다가도 카일이 곁을 스쳐 지나가면 움직임을 멈추고 일
제히 나를 돌아봤다.
그 모습이 어쩐지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나는 괜스레 카일의 손가락을
더 꽉 붙들었다.
저벅저벅.
한 사람분의 발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조용히 울렸다. 너무나도 잠잠했다. 마
치, 큰일이 터지기 전의 폭풍전야처럼.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내 쪽으로 열렬한 시선을 보내는 시종을 흘긋 돌아보
았다. 텅 빈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고, 머리꼭지까지 오싹한 전율을 느끼는 순
간.
―찍! (카일!)
나를 바라보던 시종들이 갑작스럽게 덤벼들었다. 날카로운 손톱을 드러낸 그
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조종하는 실 달린 인형 같았다.
카일은 나를 주머니 속에 넣고 재빨리 검을 뽑았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
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으나, 검기를 두른 카일의 검이 단단한 그들의 손톱을
단번에 갈라 버렸다.
물론, 주변이 어둡거니와 그의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나는 소리로만 그 상황
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카일이 밀린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일단, 멀미가 나지 않았다. 말인즉 그가 크게 움직여야 할 만큼 전투가 어렵
지 않다는 의미였다.
상황은 금방 정리되었다.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몇 번쯤 더 나더니, 카일이 내가 있는 주머니 안
으로 피를 닦아 낸 마석을 넣어 주었다. 탁한 색깔이 감도는 그것을 흡수하자
행운 수치가 불쑥 올랐다. 마석의 양이 제법 되어서 그런지 소득도 짭짤했다.
나는 다시 카일의 손바닥에 앉아 반짝거리는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서리의 마탑에 대한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이변 간섭률이 상승합니다.]
[현재 이변 간섭률 61%]
[현재 이변 간섭률 65%]
[현재 이변 간섭률 71%]
‘이대로라면 그 기분 나쁜 마법 약을 안 먹어도 되겠는데.’
마탑의 지하로 내려갈수록 간섭률 역시 쭉쭉 올랐다. 마치 RPG 게임에서 새
지역의 지도를 뚫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게임을 하는 설렘이 있냐면 전혀 아
니었지만.
“도착한 모양이다, 슈.”
그때, 그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과연. 카일의 말대로 내 눈앞에 아주 수상하고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딱 봐
도 여기가 지하 맨 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안심하라는 듯이 카일의 손가락을 토닥였다. 그러자 그가 작게 웃는 소
리가 들렸다.
“간다.”
끼익.
오래된 문의 경첩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
푸리고 가만히 정면을 노려보았다.
육중한 문은 느리게 열렸고, 안은 어두컴컴했다. 복도에서 일렁거리는 불빛
이 새어 들어가 내부를 미약하게 밝히는 꼴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들어갈 만큼 문이 열렸을 때였다.
―…….
나는 나도 모르게 이를 빠득 갈았다.
왜냐하면 카일이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이.
“안녕.”
녹스였기 때문이었다.
여상한 목소리로 인사한 그는 문이 닫히는 타이밍에 맞추어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튕겼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실 내부의 등잔이 차례로 켜지기 시
작했다.
그제야 환하게 보이기 시작한 내부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스산한 공기가 감도는 지하실은 각종 책과 실험 도구, 그리고 약초들이 엉망
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태풍이 한차례 휩쓸고 간 듯 질서 없이 쏟아져 있다는
점에서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정중앙. 관이 놓여 있는 자리 주변은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
지 않겠다는 것처럼 결벽적으로 깨끗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
카일은 대답 대신 칼을 곧게 뻗어 겨누었다. 서늘한 적대감이 배어 나왔다.
나는 긴장감 속에서 시스템을 불러 두고 적당한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현재 이변 간섭률 81%]
[현재 보유 현황 | ♣×350]
[현재 기적 수치 | 95%]
마탑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간직한 장소에 다다라서였을까? 이변 간섭률은
어느덧 80퍼센트에 육박했다. 아직 ‘불러오기’를 하지 않아서 확신할 수는 없
지만, 내 몸 상태도 썩 나쁘지 않았다.
저 관 중앙에는 반드시 겨울의 심장이 있겠지.
“그 이상 다가오면 사정을 봐주지 않을 거야.”
녹스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카일은 고개를 까딱했다.
“덤벼라.”
창백한 빛을 내뿜는 비수가 녹스의 주변을 호위하듯이 둘러쌌다가, 각기 다
른 방향에서 동시에 카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카일은 검을 길게 휘둘러 세 자루를 쳐 내고, 검날
을 눕혀 한 자루를 막은 뒤, 다시 반듯하게 세워 나머지 한 자루까지 막았다.
탁!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내게 날아든 비수를 카일의 오른손이 힘있게 잡아
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슈. 주머니에 들어가라.”
나는 겁을 먹은 척 재빨리 그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그리고 견과류 상점을 불러왔다.
[긴급 탈출 호박씨 스틱 | 기적 수치 8% 소모 | 반경 10m 안으로 순간 이
동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하지만, 기적 수치 따위를 아낄 때가 아니다.
나는 소환된 호박씨 스틱을 재빨리 입에 넣고 오독오독 씹어 삼켰다.
도도독. 도독. 오도독.
그 잠시를 기다리지 않은 녹스가 비수를 날려 보냈다. 덕분에 카일이 몸을 급
히 움직였고, 과자를 급하게 먹던 나는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치사한 거 아니냐!
내가 맹렬하게 콜록거리자,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주머니로 향했다.
이때다.
[외로움을 달래는 레플리카 햄스터 (지속 시간 : 30분) | ❤×100]
내가 있던 자리에 재빨리 레플리카 햄스터를 놓은 뒤, 나는 순간 이동을 통해
관 근처로 재빨리 이동했다.
레플리카를 놓아서 자리를 바꾼 뒤 심장을 노리겠다는 말을 한 적 있었기에
카일은 당황하지 않고, 자세를 바꾸어 왼쪽을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다.
녹스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의 손에는 새파랗게 빛나는 얇은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카일이 비수를 막아 내며 한 걸음씩 관에 가까이 다가오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상대가 공격적으로 나서면, 분명히 관과의 거리를 떨어뜨리기 위해서라도
반격할 거야.’
그렇게 녹스의 주의가 카일에게 쏠린 사이, 나는 저 관을 기어오르는 거다.
기회는 단 한 번. 녹스가 이쪽을 돌아보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헐레벌떡 아몬드 휘낭시에 |기적 수치 3% 소모|달리기 속도가 빨라집니
다.]
가진 기적 다 턴다, 다 털어.
휘낭시에를 입안에 통째로 욱여넣은 나는 부지런히 씹어서 꿀꺽 삼키다가,
두 사람의 검이 제대로 맞붙는 순간 관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조그만 햄스터에게 관은 너무 높고 미끌미끌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기어
올라가기는 했지만, 몇 번이고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파 죽겠네!’
챙, 까드득, 챙, 쾅, 콰광, 하는 온갖 소리가 지하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평소의 여유를 내다 버린 녹스가 맹렬하게 달려들 때마다 카일이 버거워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카일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서둘러야 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팔다리를 쫙
벌려 관에 달라붙었다.
갖은 애를 써 가며 관 뚜껑 위까지 기어이 기어오른 순간. 새파랗게 빛나는,
‘겨울의 심장’이 내 시야에 오롯이 들어왔다.
~모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