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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119화 (119/129)

119화. 아니 땐 마탑에 햄스터 지나간다 (1)

좋아하기 어려운 남자다. 카일은 로렌츠를 그렇게 생각했다.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라는 건 초저녁부터 알았다. 날것의 적대감을 고스란

히 보이던 벨리알과 달리 로렌츠는 어린 카일에게 그리 날을 세우지는 않았으

나, 그의 녹색 눈동자에는 언제나 묘한 경멸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카일은 상관없었다.

로렌츠의 욕망과 카일의 목표는 상충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황제가 되고 싶

어 했고, 카일은 이 차디찬 터전을 지킬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니 로렌츠가 벨리알과의 정쟁에서 승리한 이후, 더는 부딪칠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녀를 제법 아꼈던 모양이더군, 대공.”

그의 말을 들으며 카일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로렌츠는 마치 이 응접실이 제 방이라도 되는 양 태연한 태도로 찬장에서 술

을 가져왔다. 황금빛 액체로 찰랑거리는 잔이 카일의 앞에 놓였으나, 그는 술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단순한 재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겨울의 심장’, 그리고 마인하르트 전역에 퍼진 실종 사건, 로렌츠와 녹스의

협력에 대해서는 슈를 통해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카일은 느긋한 작태로 앉은 두 사람에게 혐오감과 분노를 느꼈다.

그는 제 사람들을 특별히 아꼈다. 함께 살아남았기에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

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단순한 ‘재료’ 취급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이유가 고작 누군가의 영생을, 그리고 누군가의 영원한 권력을 손에 넣기 위

해서라면 더더욱.

“하지만 아끼는 것은 곧 약점이 되기 쉽지. 바로 지금처럼.”

“센 랑드에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별건 아니야. 보금자리를 간단히 들쑤신 정도지. 찾느라 시간이 꽤 걸렸어.

정예 병사들을 보내 지키게 했더군. 덕분에 피를 좀 봤지만.”

안타까움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제 병사들이 그곳에 가

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텐데도.

“영리한 여자더군. 몇 번 괴롭히자 곧장 벨리알을 데리고 북부로 도망쳤어.

목숨은 붙였으니 됐다고 생각한 걸까?”

센은 저들의 존재가 카일에게 불리해질 수 있으니 따로 지내겠다고 했지만,

카일은 위험한 순간이 오면 블레이크 영지로 돌아오라는 말을 남겼다. 지원군

을 보냈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센은 그 말을 기억했고, 로렌츠를 피해 북부로 도망쳤다. 아마 지금쯤 영지에

도착했거나 영지로 오는 길일 것이다.

로렌츠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계획대로라는 듯이.

로렌츠는 오래도록 벨리알을 찾아 헤맸다.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으나 시체를

직접 보지 않았으니 그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승리를 만끽하느라 시체를 받아

가지 못한 게 패착이 될 줄은 몰랐다.

즉위 초기에야 아무도 믿지 않을 낭설처럼 퍼지던 벨리알의 생존은, 언제부

터인가 반대파 귀족들의 입방아에 조금씩 오르내리며 일종의 희망이 되었다.

황자 시절에 로렌츠보다 벨리알의 입지가 더 컸다는 사실이 황제가 되었음에

도 그를 끈질기게 따라오며 괴롭혀 댔다.

희망이야 짓밟으면 된다. 살아 있은들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겠지만, 기왕이

면 확실하게 죽어서 제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해야 했다.

그런 김에 통제하기 어려운 카일까지 칠 생각이었다. 로렌츠는 두 황자를 없

애고 유일무이한 권력을 손에 넣고 싶었다.

“벨리알이 살아 있다는 소문을 퍼뜨릴 생각이시군요.”

로렌츠의 계획을 간파한 카일의 목소리에 노기가 섞였다.

이런 시답잖은 대화는 그만두고 당장 영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제 연인의

메시지가 마음에 걸렸다.

[장단 맞춰 주세요. 어차피 로렌츠는 방심하고 있어요. 우리를 여기에 잘 가

뒀다고 생각할 테니까, 놀리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말해 줄 겁니다.]

그리고 슈의 예상대로 로렌츠가 비아냥대듯이 그가 가진 정보를 풀어놓기 시

작했다.

“사람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지. 안 그런가?”

“…….”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와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의 협력이라……. 한동안

온 나라가 떠들썩하겠어.”

벨리알이 사실은 살아 있다. 그리고 황자비가 될 뻔했던 센이 그를 데리고 카

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게다가, 카일은 현재 병력을 늘려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

진실을 적당히 왜곡해서 짜 맞추면 마치 두 사람이 합심해서 반역이라도 꾀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정도의 명분만으로도 로렌츠가 움직일 이유가 되는 것이다. 어차피 진실

을 아는 사람들이야 다 사라져서, 자신의 권력을 위한 재료로 전락할 테니까.

“안됐군. 그대는 전쟁에서 제법 활약할 만한 인물이기는 하겠지만…… 처음

부터 참전할 수조차 없으면 상당히 맥이 빠지겠어.”

카일은 여전히 침묵했다. 그때, 그의 눈앞으로 조그만 창이 떠올랐다.

[빨리 뭐라고 좀 해 보세요! 두 사람을 여기 붙잡고 계셔야 한다고요.]

메시지가 도착하는 동시에 슈가 몸을 일으켰다. 녹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 가지, 꼬마?”

“개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영 피곤해서요. 대표자만 남겨 두고 한숨 자렵니

다. 귀찮게 쫓아오지 마세요.”

맹랑하게마저 느껴지는 말투였다.

카일은 피식 웃고 말았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위험한 일은 아닌지 걱

정이 됐지만, 지금 연인을 따라나서는 건 슈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선, 슈의 말대로 녹스와 로렌츠를 붙잡아 두어야겠다.

카일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벨리알은 의식이 없습니다. 깨어난다 하더라도 여전히 황위에 욕심

을 보일지는 미지수죠. 그리고 알다시피, 저는 제 영지를 지키는 것 외에는 관

심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보여 주기 위함이네.”

로렌츠가 술잔을 손끝으로 툭, 건드리며 웃어 보였다. 음울하면서도 음험해

보이는 미소였다.

“나를 제외한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작은 불씨라도 보이는 순

간 처절하게 짓밟을 테니, 허튼 생각 말고 얌전히 복종하라는 뜻이지.”

“…….”

“완벽한 굴종은 절망에서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

그렇게 손에 넣은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카일은 여전히 로렌츠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 북부 마법사들과 손을 잡으셨습니까.”

“오래됐지. 적어도 몇 세대에 걸쳤을걸세. 클라인 공작가의 숨겨진 힘이라고

나 할까?”

카일이 적개심 어린 미소를 띠었다.

북부의 원수. 이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던 이들

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지고 놀던 북부 마법사와 한패라니.

카일은 진심을 담아,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아니. 나는 어떻게든 내 땅으로 돌아갈 거다.”

“흐음.”

“그리고 다시 만난다면, 반드시 내 손으로 네 목숨을 거둘 테고.”

싸늘한 침묵 속에서 카일이 몸을 일으켰다.

[다 됐나? 대체 어딜 가려고 그런 거지?]

[나중에 설명할게요. 아, 됐다. 이제 됐어요. 방에서 만납시다.]

조금 뒤, 메시지 하나가 더 도착했다.

[작전 회의해야죠.]

카일이 살짝 웃었다.

냉기와 적개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웃음이 잠시간 그의 얼굴 위에 머

물렀다가 스르르 흩어졌다.

“어디 가지?”

녹스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카일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두 사람에게 인사

해 보였다.

“개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영 피곤해서.”

“…….”

“그럼, 마음 편히 작당하시길.”

그는 그 말을 꺼낸 후, 가뿐한 걸음걸이로 응접실을 나섰다.

*

“대체 이걸 왜…….”

침실에 도착한 카일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내 손에 들린 마법 약의 정체를

알아차린 그는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연구실에서 훔쳐 왔어요. 저번에 여분으로 두어 병 더 만드는 걸 봤는데, 마

침 폐기하지 않고 남겨 뒀더라고요.”

“설마, 그걸 마실 생각은 아니겠지?”

“마실 생각인데요.”

그대로 두었다가는 온종일 잔소리를 퍼부을 것 같다.

나는 카일을 재빨리 침대로 데려가 앉히고는 재빨리 무릎 위에 올라가 앉았

다.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이마를 맞대자, 화를 참는 듯 심호흡하는 소리

가 들렸다.

“어차피 비밀이랄 것도 없는 사이니까, 다 말할게요. 이 안에 든 건 녹스의

마법이에요. 그건 아시죠?”

“안다. 네 몸이 그 마력을 흡수하다가 부작용으로 피를 토했지.”

“수치가 너무 한꺼번에 올라서 그래요. 그러니까, ‘이변 간섭률’이라는 수치

인데요…….”

카일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진지한 태도로 내 설명을 들었

다.

내가 이변 간섭률, 이변, 그리고 기적에 관해 이야기하는 내내 차분하게 그

정보를 정리하더니, 간단한 질문 몇 개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그 힘을 최대한 흡수하고 싶다는 건가.”

“100퍼센트를 채우면 놈들의 힘에 간섭할 수 있어요. 마법을 해제하거나 무

력화할 수 있다는 거죠. 목에 있는 이 올가미도 멋대로 풀어낼 수 있을걸요.”

마법사에게서 마법을 뺏을 수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이득이다. 전면전을 피

할 수 없는 지금, 이 힘이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을 거라는 사실을 카일도 알

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저번처럼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아.”

“그때는 전하께서 도와주셔야죠. 저도 웬만하면 이 약을 먹고 싶지는 않아

요. 굳이 마력을 직접 흡수하지 않더라도, 실험에 어울리거나 정보를 모으는 걸

로도 이변 간섭률을 올릴 수는 있더라고요.”

“지금 얼마 정도 모였지?”

“어디 보자……. 55퍼센트 정도네요.”

나는 내친김에 행운 수치와 나침반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안 그래도 이 탑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는데, 응접실의 이

동 마법진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황성과 연결된 마법진을 파괴할 수 있다

고 하자 카일이 눈을 빛냈다.

“슈, 넌 정말…… 기적 같은 녀석이군.”

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내일 아침에 심장을 털러 갈 생각입니다. 해 뜨기 전에 빠

르게 움직여서 북부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로렌츠가 언제 움직일지 알 수 없

으니까요.”

“그래. 그게 좋겠군.”

“위험할 수도 있어요, 전하. 녹스가 얌전히 뺏겨 주지 않을 테니까요. 저번에

대문을 억지로 열려고 했을 때처럼 싸워야 할 겁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자 카일이 내 손을 끌어다 잡았다. 그대로 단단히 깍지를 끼우더니,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애정, 열정, 신뢰, 그리고 어떤 맹목마저도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내 목숨을 걸겠다.”

“…….”

“함께 영지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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