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느린 햄스터도 성낼 적이 있다 (4)
심각한 분위기가 지나고 한나절쯤 흐르자, 카일은 제법 풍자적인 농담도 던
질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되찾았다.
“네가 읽었다던 그 이야기에 대해 질문해도 되나?”
나는 여전히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아 너른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였다. 어쩐
지 명랑하게마저 느껴지는 말투가 순간 얄미워서 눈을 흘겼다.
“벌써 그렇게 괜찮아진 겁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나. 그저, 네가 무슨 연유로 하고많은 인물 중에 나를
선택했을지가 궁금해졌을 뿐이다.”
덧붙여 주인공은 누구냐는 물음에 나는 카일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고개를
묻었다. 어쩐지 그의 앞에서 소설 내용을 말하는 게 미안해진 탓이었다.
카일은 나를 달래듯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내
가 고개를 들자, 때맞춰 입술을 가볍게 포갰다가 떨어뜨렸다.
“네가 왜 나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묻는 거야, 슈.”
그렇게 말하니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 알면서 그러지.’
나는 슬그머니 그의 무릎에서 내려와 자리에 누웠다.
카일은 큭큭거리며 웃더니 그 옆에 눕고는 뒤에서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
다.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벨리알과 센이 주인공이었어요. 지금은 운명이 많이 바뀌어서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원래는 센이 세레나가 돼요. 그리고 전하께서는 센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사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카일이 발끈한 것처럼 대답했다.
“네가 있는데 어떻게 내가 센을 좋아한다고 착각할 수 있는 거지? 눈이 제 위
치에 달린 놈들이라면 그런 허튼소리는 못 할 거다.”
“그게……. 전하도 아시다시피, 저는 인간이 아니라 햄스터에 빙의했잖습니
까. 정확히는 북부 들쥐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좀…….”
“…….”
짧은 침묵이 흐르자, 나는 그를 슬쩍 돌아보았다.
……아, 돌아보지 말걸. 제대로 동정하는 시선이다.
“어쩌다가 인간도 아닌 마수가 되어 버린 건지……. 새삼 고생이 많았겠군.”
“이제라도 제 노고를 알아주시니 기쁩니다. 처음에는 딱 삼십 분 정도만 인
간이 될 수 있었거든요. 그때는 진짜 죽을 맛이었는데…….”
지금도 일시적이긴 하나, 하루에 열여섯 시간이나 인간으로 지낼 수 있다. 크
나큰 발전인 셈이다.
나는 몸을 슬쩍 돌려 그에게 기대듯이 안겼다.
“아무튼 남자 주인공이었던 벨리알 전하도 아니고, 여자 주인공이었던 센도
아니고, 중간쯤 죽은 전하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한 거죠?”
“그래.”
“글쎄요…… 외로워 보여서?”
카일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이어
말했다.
“절절한 로맨스 소설이라는 건 알겠는데, 저는 이상하게 정을 못 붙였어요.
몰입할 수 없었다고나 할까. 그중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건 전하였어요. 전
하를 둘러싸고 있는 외로움이 안타까웠고요.”
어쩌면 나는 카일의 행복을 바라며 <겨울의 심장>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
러나 작가의 손에 완성된 이야기는 당연히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카일은
누군가의 의도대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나는 그게 싫었다. 그게 슬펐다.
카일이 외롭게 죽지 않았으면 했고,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옴으로써 운명을 바
꿀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누구든 전하의 곁에 더 끝까지 남아 있었더라면 전하
의 삶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고요.”
“그리고 그게 네가 되었군.”
카일이 낮게 웃었다.
그는 정말로 기뻐 보였다. 내 얼굴 곳곳에 다시 입맞춤하기 시작했다는 게 그
증거였다.
‘햄스터일 때도 이러더니!’
뽀뽀 귀신 같으니라고!
나는 그만하라는 뜻으로 그의 얼굴을 꾹 밀어냈으나, 카일은 아랑곳하지 않
고 내 손바닥에도 입을 맞추었다. 쪽, 쪽, 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심장이 간지러
운 기분이 들었다.
“그것 아나? 네가 예전에 내게 어째서 자신을 도와주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
었어.”
“……제가 그랬나요?”
나는 일부러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카일은 내가 기억해 냈다는 사실을 곧장 알아채고는 가만히 웃었다.
“그래. 그때 내가 네게 그랬지. 외로워 보였다고.”
이상한 데서 닮은 구석이 있다. 결국, 상대의 외로움을 통해 자신의 외로움을
보았다는 뜻이잖아. 함께 있는 것만으로 그 감정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신기하
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건 그냥 지나간 일에 불과해요.”
내가 딱 잘라 말했다.
“전하가 죽게, 제가 내버려 둘 것 같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북부가 망하는
건 더 안 돼요.”
타도 녹스. 타도 마법사단.
그렇게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늘어지기 시작하자, 카일이 내 등을 부드럽
게 토닥였다.
“그래. 알겠으니까, 오늘은 이만 잘까.”
“보고서 읽으려고 했는데…… 전하께서 탑을 뒤져서 알뜰살뜰 얻어 온 정보
들이잖아요.”
“보고서에 발이라도 달리지 않은 이상, 내일 아침에도 저 책상 위에 얌전히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자.”
나를 어르는 솜씨가 이젠 제법 능숙하다. 저항할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을 보니
그에게 단단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래, 내일 하자.
나는 그를 양껏 끌어안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대로 덮쳐 오는 수마를 거
부하지 않고, 카일의 온기를 만끽하며 잠들었다.
*
이튿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카일과 헤어져 연구실로 향하자, 녹스가 태연하게 말해
왔다.
“대공과는 잘 해결한 모양이군.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던데?”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어디의 망령 덕에 고생 좀 했죠.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받아 낼 테니 각오하
십쇼.”
나는 이제 익숙하게마저 느껴지는 실험대에 걸터앉았다.
“이 비밀 장난도 슬슬 지겨워지는데요, 솔직히 말해 보시죠. 연구를 핑계로
시간을 번 뒤, 북부를 공격할 준비라도 하는 것 아닙니까?”
녹스가 팔짱을 끼며 선반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대답을 들으려면 오늘의 질문권을 사용해야 할 것 같은데, 꼬마야.”
“되게 치사하게 구시네. 네, 씁니다. 써요. 어차피 물어보려고 했던 거니까
요.”
놈이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정답.”
그가 선심 쓰듯이 덧붙였다.
“난 기다리는 게 별로 취향이 아닌데, 전쟁에는 명분이 필요하다더군.”
로렌츠 짓이구나.
대대적으로 북부를 쳐서 영지를 흡수할 생각인 모양이다. 분명 북부를 공격
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 말을 번복하기 위해 무슨 개수작을 부릴지
모르겠다.
병사들은 그렇다 쳐도, 마법사들이나 변이종 마수들까지 가세하게 되면 일이
커진다.
그러려면, 역시…….
‘겨울의 심장을 가로채야 해.’
로렌츠와 녹스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서라도, 이변 간섭률 수치를 올리기
위해서라도 겨울의 심장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겨울의 심장에 관련된 실험은 카일이 도와주기로 했다. 내가 녹스를 연구실
에 묶어 두는 사이에 그는…….
“다른 생각은 그만하고.”
녹스가 검지로 내 코를 톡톡 쳤다. 내가 짜증스러운 시선을 보내자 천연덕스
럽게 웃어 보였다.
“자나 깨나 대공 생각이로군.”
“애인인데 당연하죠. 잘생기고 다정한 전하를 놔두고 뜬금없이 그쪽 생각을
할 순 없잖습니까?”
“할 수도 있지.”
“뭐래. 다음 질문이나 하겠습니다.”
그를 차가운 눈길로 흘겨보던 내가 물었다.
“‘겨울의 심장’ 말입니다. 이 탑에 보관되어 있습니까?”
놈의 눈초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내 의중을 파악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
러나 내가 순순히 대답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지 잠자코 대답했다.
“그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신중한 어조로 세 번째 질문을 건넸다.
“그 겨울의 심장에 깃든 힘은 그쪽이 사냥터에 풀었던 변이종들의 핵과 비슷
한 원리입니까?”
“더 정교하고 복잡한 마법으로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본질은 같아.”
좋았어.
나는 재빨리 사랑의 전서구를 통해 카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탑에 있을 거래요.]
[찾아볼 수 있으면 찾아봐 주세요.]
카일의 대답은 잠시 후에 돌아왔다.
[그래.]
[최대한 아래층으로 내려갈 거다.]
[시간을 끌어 줘.]
밤새 날 재워 두고 연습 좀 했다더니, 이제 오타도 안 나고 제법 그럴싸하다.
답장을 더 해 주고 싶었지만, 녹스에게 괜히 들켰다가는 추궁하거나 도청하
려고 들 것이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태연하게 놈을 바라보았다.
“질문하시죠.”
녹스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질문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는 환상 속의 주인공인가?”
“환상이 아니고 소설이요. 그리고 대답을 드리자면, 아닙니다.”
그가 신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주연이 아니고 조연을 선택했다는 거군. 독특해.”
“주연만 중요한 사람인가? 인간적인 끌림을 느꼈으면 그 사람이 제게는 주인
공인 거죠.”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나는 네가 아는 주요 인물 중 하나였나?”
“뭘 기대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이름 한 번 제대
로 나오지 않거든요. 호칭 정도는 나왔겠지만.”
일부러 심술을 팍팍 담아,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
다. 물론, 녹스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세 번째 질문. 꼬마, 너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있나?”
“…….”
새삼스럽게 나와 원작 소설 이야기 따위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은 건 아닐
것이다. 꿍꿍이가 뭐지?
내가 말없이 노려보자, 놈이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대답부터.”
“아뇨. 중간에 읽다 말았습니다. 전하께서 죽고 나니 이야기에 흥미가 떨어
져서요.”
“과연. 본래 죽을 운명이었다던 이의 목숨을 조금 더 붙여 두는 걸로 ‘기
적’을 행하고, 그 수치를 모아서 원래 지내던 세계로 돌아가는 원리군. 요절한
상대를 고르다니. 똑똑한 선택이었어.”
말투가 묘하게 기분 나쁘다.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물었다.
“그 말은, 내가 본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카일 전하를 이용했다?”
“아닌가?”
“맞겠냐? 사람 마음을 뭘로 알고.”
비아냥거리듯이 되묻던 나는 손을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 됐어요.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그쪽이 불쌍한 걸로 칩시다.”
시스템도 신이 났는지 거들었다.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ヾ( ̄▽ ̄) ]
카일이 탑의 아래층을 뒤져 봐야 하니까, 적당히 시간을 끌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연구실을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그렇게 위험한 실험이 아니면 순순히 협조해 주겠다고 말할까.’
하지만 내가 그 말을 실제로 내뱉기도 전, 녹스가 빙긋 웃어 보였다.
“아쉽게도 오늘은 용무가 좀 있거든. 서로 비밀만 한 가지씩 공유한 뒤 자리
를 옮기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황제가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 그리고
그 사실을 북부를 토벌하는 데 이용할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