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느린 햄스터도 성낼 적이 있다 (3)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 가져온 혼란도 혼란이지만, 녹스의 마력을 직접 흡수한 몸 상
태가 더 문제였다.
‘한꺼번에 몇 퍼센트가 올라간 거야, 대체…….’
나는 카일의 품에 기댄 채 숨을 골랐다. 마치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이
러고도 계약 위반이 아니냐? 진짜 양심 없는 놈일세.
“마력이 느껴지는데.”
카일이 날 선 목소리로 말하자, 녹스가 조금 미안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맞아. 내 마력을 녹여 만든 약을 먹였어. 꼬마의 힘과 내 힘이 얼마나 다른
지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 대공도 알다시피, 정제되지 않은 타인의 마력이 체내
에 흘러 들어가면…….”
“반발하지.”
“그래. 얼마나 반발하는지를 확인하는 실험이었거든. 정확히 같은 힘인지,
아니면 뿌리가 같을 뿐인지, 기조가 닮은 건지.”
“하지만…….”
“지나치게 여과 없이 흡수해. 마치, 빈 그릇을 채우는 것처럼.”
“감상은 됐다. 해결법은?”
“아예 다른 마법으로 짓누르거나 덜어 내야지.”
“……큭. 뭐, 든 알겠으니까, 빨리…….”
괴로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자, 나는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한가하게 작전 회
의나 할 때냐. 얼른 해결해 달라고!
녹스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카일이 나를 끌어안은 채 내 등에 손을
얹고 자신의 마력을 흘려보냈다. 싸늘하게 식은 속으로 뜨겁게마저 느껴지는
힘이 밀려들어 왔다.
“참지 마.”
카일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힘겨운 와중에도 조금 안심이 됐다. 이를 악물자 손가락이 입술을 파고들었
다.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손길이었다.
숨통을 틀어쥐는 고통이 천천히 녹아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
던 상태도 조금씩 나아졌다.
[외부의 힘이 충돌하여 상쇄됩니다.]
[현재 이변 간섭률 61%]
[현재 이변 간섭률 55%]
[현재 이변 간섭률 47%]
비정상적으로 올라갔던 이변 간섭률이 다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쉬
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욕심부리다가 골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이 정도도 충분하기는 해. 역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모으는 것보다 직접 체
득하는 게 빠르다 이건가?’
그나저나, 평범하게만 살다가 피까지 토하려니까 좀……. 대단한 병에라도
걸린 것 같잖아.
카일이 준 손수건으로 입가를 적당히 훔치고 있자니, 그가 내 눈가를 문지르
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눈이 좀 가라앉았군.”
“네?”
“아깐 좀 푸른빛이 돌았거든.”
마력의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카일의 붉은 눈동자나 녹스의 푸른 눈동자처
럼.
“이제 괜찮아요.”
호흡도 안정적이고, 심장에서 들려오던 기분 나쁜 쿵쿵거림도 사라졌다. 카
일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리춤의 검을 뽑아 가볍게 휘둘렀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바람이 내 곁을 스쳤다. 그가 눈 깜짝할 사이에
검기를 날린 것이다.
녹스의 뺨에 피가 맺히더니 턱으로 주르륵 흘렀다가 방울져 떨어졌다. 얼마
나 빠르게 베였는지, 상처가 난 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피가 비친 듯했다.
“이 정도로 봐주겠다는 건가?”
“한 번만 더 이상한 짓을 했다간 다음은 목이다.”
“참고하지.”
별안간 공격당한 셈인데도 녹스는 방어하지 않았다. 싫은 내색 역시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그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렇군, 하고 반응하는 게 전
부였다.
“자. 그럼, 질문에 대한 답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정확히는 그보다 내 몸 상태에 훨씬 더 신
경을 썼던— 카일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내 팔을 잡았다.
그의 선명한 체온이 새삼 버겁게 다가왔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이대로 내가 햄스터처럼 작아지기만을 바랐다.
숨길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이
런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묵비권을 사용하겠어?”
녹스의 질문에 나는 씹어 뱉듯이 대답했다.
“……공정한 침묵으로 해요.”
“쓸모 있지?”
“됐거든요.”
내 팔을 쥔 카일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사실 대답은 이미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카일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설명이 필요했다. 이렇게 뭉뚱그리듯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설명할게요.”
쥐어짜듯이 건넨 말에 카일이 침묵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 알아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제가 직접 설명하게 해 주세요.”
“이런. 대공은 아예 몰랐던 모양이지. 충격이 크겠어.”
녹스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기회가 마땅치 않았나? 아니면, 용기의 문제?”
“……입 다물어.”
나는 이를 갈며 대답했다.
“전하와 잠시 얘기하게 해 주시죠.”
녹스는 선반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우리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놈에게서
는 어떤 동요조차도 느낄 수 없었다.
이 세계가 실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질문 앞에서도 녹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되레 궁금증이 해결된 일이 기쁘고 후련한 듯했다.
딱히 말리려는 기색이 없어 보이기에 나는 카일의 팔을 잡고 연구실을 나섰
다.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손을 잡아끈 채 내내 등을 보였는데, 다
행히도 카일은 그대로 내게 걸음을 맞춰 주었다.
우리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어색한 침묵은 우리의 뒤를 끈덕지게
따라오고 있었다.
‘절대로 못 돌아봐.’
분명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충격 때문에…….
“슈.”
우뚝 멈춰 있는 나를 그가 불렀다. 감정을 읽기 어려울 만큼 낮고 작은 목소
리였다.
“슈, 여길 봐.”
“죄송해요.”
“슈.”
“죄송해요. 내내 숨기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니, 그보다 터무니없는 이야기
니까…… 으. 역시 미친 사람 같죠? 웬 정신 나간 소리냐고 하셔도 이번에는 할
말 없네요. 원래 그놈이 실없잖아요. 그래서, 농담 같은 걸 자주…… 읍.”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던 내 입을 카일의 손이 틀어막았다. 그러더
니 다른 팔로 내 허리를 감아 번쩍 안더니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이마가 맞닿았다.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질였다. 손은 조금 뜨거
웠고,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차분했다.
“나는 괜찮아.”
“…….”
“우선 진정해라. 그다음에 천천히, 하나씩 말하는 거다. 이해했나?”
마음속에 고여 있던 싸늘한 기분이 조금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살짝 웃으며 손을 떼어 냈다.
“그래. 착하다.”
이 순간마저도 다정한 그의 미소에, 어쩐지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 * *
없는 말재주로 어떻게든 설명하는 내내, 카일은 묻고 싶은 것을 꾹꾹 삼켜 가
며 나를 기다렸다.
이곳이 어떤 소설, <겨울의 심장> 속이라는 것. 그리고 그는 주인공조차 아
닌, 이야기의 중간 무렵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조연에 불과했다는 것. 어
떤 가엾고 비극적인 인물을 그려내기 위해 그의 불행과 시련이 ‘설정’되었을 뿐
이라는 것.
그런 비정한 사실들이 카일의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예지가 아니었군. 이미 책의 내용을 알고 있었고,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서
본래의 이야기를 참고하고, 내 상태를 점검해 가면서…….”
“상태라고 해 봤자 남은 수명을 확인하는 정도에 불과했어요.”
나는 입을 꾹 다물며 카일의 안색을 살폈다. 아직은 평소와 그렇게 달라 보이
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긴장할 때마다 마주 안은 채 괜찮다고 했지만, 실은 이건 괜찮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또 누군가의 시련을 부정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거니까.
내 말을 믿기 어려운 건 당연하고, 믿더라도 충격은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카일은 조금 신중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제 마음을 돌보기는커녕 내
상태를 먼저 살폈다.
“몸은 괜찮나?”
“……지금 제 걱정할 땝니까.”
“난 언제나 네 걱정을 하는데.”
“그거야 그렇지만요. 아까 전하께서 마력을 불어넣어 주셔서인지 괜찮아졌
어요.”
나는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싼 채로 엄지로 눈가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그는
울지도 않았고, 울고 싶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지금 무슨 생각 하세요, 전하?”
“글쎄.”
카일은 내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며 눈을 내리깔았다.
“내 세계가, 그리고 내 이야기가 누군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이야기였을 뿐이
라면…….”
“…….”
“내 어머니께서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셨던 것도, 내가 이 차가운 땅을 오
래도록 헤맸던 것도 내 잘못은 아니었겠구나. 그런 비겁한 생각.”
“……전하.”
“허망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혼란스러운 마음도 있어. 하지만 괜찮다.
내 삶이 고작 누군가의 상상력에서 태어나 몇 줄의 글로 엮여 책 한 권에 갇힌
것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지금 내가 너를 보며 느끼는 이 모든 감정마저 가짜라
고 생각하지 않아.”
“…….”
“슈, 너는 어때.”
“저요?”
“그래. 너는 그저 내가, 내가 일군 이 터전이, 너의 삶을 잠시나마 스쳤던 이
들이 단순한 공상이나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나?”
나는 붉게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이 있었다.
서로를 보며 웃고, 입을 맞추고, 손을 잡고,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 때때로 어
떤 역경이나 고난 앞에서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던 모든 시간이 배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수 없었지만, 그래도 센을 진심으로 사랑하던 벨리알. 똑똑하고 야무졌던
센. 비겁하기 짝이 없어 딱 한 대만 때려 주고 싶은 로렌츠, 재수 없는 녹스, 깐
깐한 제임스, 그리고 블레이크 기사단의 기사들…….
그리고,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카일 블레이크. 나의 대공작.
“네게 나는 그저 이야기 속 인물일 뿐인가?”
결국, 내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
“전하께서 그냥, 그렇게 비참하게 살다가 죽어도 좋을 이야기 같은 건 이제
없어요. 제가 다 바꿔 버렸단 말입니다. 아니…… 설령 제가 없었어도, 아무것
도 바꾸지 못했더라도. 그래도…….”
눈앞이 흐려졌다. 눈물이 어룽져 툭, 그의 뺨으로 떨어졌다.
카일이 내 뺨을 감싸며 웃어 주었다. 마치 내가 자신을 대신해서 울어 주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모든 시간은, 내가 가졌던 의지는, 그리고 널 사랑하는 마음은 가
짜가 아니야. 이건 소설이나 게임 따위가 아닌, 단 하나의 현실이다. 난 그렇게
믿어.”
“현실…….”
“그래, 현실.”
카일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온기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보다 더할 수 없을 것
처럼 따뜻하고 다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