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115화 (115/129)

115화. 느린 햄스터도 성낼 적이 있다 (2)

녹스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이변’에 관련된 동료들의 진짜 이름과 과거를 이

야기했다. 그 말은, 나에 대한 정보도 그만큼 털어놓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망설이는 사이, 올가미가 천천히 조여 오는 것이 느껴졌다. 연구실의 문을 열

고 들어섰을 때는 욱신거리는 감각 때문에 얼굴이 구겨질 정도였다.

카일과 따로 올 걸 그랬다. 그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녹스에게 먼저 말

하는 모습을 보이려니까 영 내키지 않았다.

‘물론, 설득할 수는 없었겠지만.’

당장 어제 연구실에 목을 졸렸으니 혼자 둘 리가 없다. 이해는 됐다.

“슈.”

내가 목을 매만지는 게 신경 쓰였는지 카일이 어깨를 감싸 왔다. 나는 그 걱

정 어린 눈길에 마주 웃어 줬다.

괜찮다. 이 정도쯤이야. 대단한 비밀도 아니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말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배수현이에요, 제 이름.”

이 세계에 온 이후 한 번도 소리 내어 발음해 보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어쩐

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철제 실험대에 가볍게 걸터앉으며 이야기했다.

“제가 살던 세계에는 마법이니 뭐니 하는 게 없어요. 과학은 있어도요. 마수

같은 것도 당연히 없었고…… 저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어요. 게임을 개발

했었죠.”

“게임? 그게 뭐지?”

유리 플라스크에 무언가를 부지런히 넣고 섞던 녹스가 물었다.

“일종의 환상 체험이라고나 할까요? 소설이나 영화처럼요. 실제가 아닌, 허

구의 세계를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거예요. 저를 도와주는 시스템처

럼 지령을 내리기도 하고, 적당한 보상을 주고, 인물들과 만나게 하면서요.”

달각거리던 움직임이 멈추었다. 녹스가 제법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마법사와 비슷하군.”

“달라요. 마법은 현실에 간섭하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거든요. 환상과 현실

의 구분이 뚜렷해요. 아무리 가상의 공간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게 진짜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죠.”

카일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고, 녹스는 퍽 흥미로워하는 기색이었

다.

“흠, 좋아. 비밀 교환은 그 정도로 해 둘까. 그나저나 ‘배수현’이라. 낯선 울

림이야.”

“다른 세상이니까요. 이참에 오늘 몫의 질문까지 해치웁시다. 저 먼저 합니

다?”

“오늘은 뭘 물어볼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나?”

“미리 생각해 뒀거든요.”

놈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후회할 텐데, 꼬마야.”

“뭐가요?”

“……아니다. 좋아. 어쨌든 물어봐.”

나는 곧장 질문을 시작했다.

“북부 마법사단은 ‘겨울의 심장’을 완성하기 위해 황성과 협력하기로 한 건

가요? 그래서 실종 사건을 유발했고요.”

“그래, 맞아.”

녹스가 선심 쓰듯 덧붙였다.

“‘익사체’는 새 황제와 협상하는 걸 퍽 즐거워했어. 적당히 구워삶기에 괜찮

은 상대였거든. 적잖이 멍청해서.”

로렌츠도 잔머리를 굴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는데, 이놈들이 더하다는 건

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질문으로 이어 갔다.

“황성에서 벨리알 전하와 우리를 습격했던 마법사들도 시체들이었습니까?

이 마탑의 하인들처럼요.”

“그건 아니야. 그 사람들은 살아 있었어. 그런 식으로 쓸 만한 놈들을 찾아내

는 것 또한 ‘익사체’의 취미 생활 중 하나거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변 간섭률을 확인했다.

[현재 이변 간섭률 36%]

꽤 중요한 정보들이 모여서인지 오르는 속도가 빠르다.

어쩐지 속이 조금 메스꺼운 것 같았다.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고 있자, 카일이

양손으로 내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안색이 나빠, 슈.”

“……다 저놈 때문입니다. 나중에 복수해 주세요.”

“그러지.”

안심하라고 한 농담이었는데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싸워야 할 놈이고.

나는 곧장 세 번째 질문으로 이어 갔다.

“겨울의 심장 말입니다. 완성하면 로렌츠에게 선물한다고 했죠. 그 조건으로

손을 잡았을 거고.”

마법사단이 북부의 골칫덩어리인 건 맞지만, 사실상 블레이크 영지의 사람들

에게나 적일 뿐 수도와는 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로렌츠는 우리와 그들의 다툼이 기꺼울 것이다. 굳이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카일을 해치울 수 있는 셈이니까.

마법사단 놈들에게 약간의 힘을 실어 주고, 그들의 횡포를 모른 체한 대가로

영생을 살 수 있는 심장을 선물한다고 하면, 로렌츠는 제 백성들을 조금쯤은 도

려내서 넘길 수도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을지도.’

권력에 미치면 그렇게 되는구나. 역시 역겨운 인간이었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수고해 가면서 완성한 심장을 순순히 선물해 줄 사람이 아니

잖아요, 그쪽은.”

“…….”

녹스가 말한 적 있었다. 자기는 심장을 가진 것을 조종할 수 있다고.

“협력하는 척하면서 로렌츠를 조종하려는 거죠?”

이들이 꿍꿍이 없이 로렌츠와 손을 잡을 리 없다는 예상도 했지만, 더 결정적

인 건 ‘익사체’에 대한 녹스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여왕처럼 군림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한 나라의 왕을 꼭두각시처럼

부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유희가 없겠지.

“하고 싶은 질문이 그건가?”

“네.”

놈이 빙그레 웃었다.

“대답을 보류하지.”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겁니까?”

“글쎄. 하나뿐인 걸 지금 쓰는 건 좀 아깝지. 대답하기 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거든. 나중에 꼬마가 곤란해질 상황을 위해 약간의 호의를 베푼 거라고 해

둘까.”

곤란해질 상황?

나는 고개를 들어 녹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액체를

길쭉한 유리잔에 따라서 내게 넘겨주었다.

“독은 아니니 안심해. 어쩌면 네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

나는 그것을 바로 마시지 않은 채 녹스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처음에 규칙을 설명할 때, 상대의 질문에 답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공평한 침묵으로 무마하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내가 대답하고 싶지 않아 할 질문을 하겠다는 뜻인가? 답을 채근했다가 불

리해질 수도 있겠는데.’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 (>︿<);;;]

구석에서 가만히 있던 시스템도 내 의견에 조심스레 동조해 왔다.

녹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대답을 듣지 않았는데

도 어쩐지 긍정의 답을 들은 것 같았다. 내가 그의 속을 파고들 때마다 보이던

그 사나운 미소가 얼굴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로군. 자, 첫 번째 질문. 꼬마, 너는 이전에 이 세계의 햄

스터로 빙의해 죽음을 번복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고 있다고 했지. 실은 자유

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힘에 따라서 본체를 불러올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나는 대답해야 하는 것도 멍하니 잊고 녹스를 바라보았다. 그간 많은 대화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정확히 정리하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냥 미친놈인 줄 알았더니, 똑똑한 미친놈이네.

“네.”

“그렇다면 너는 힘을 다 모은 순간,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곧장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정말로 돌아가고 싶어, 꼬마?”

카일과 녹스의 시선이 양쪽에서 쏟아졌다. 나는 어쩐지 목이 메는 기분이 들

어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

“……잘 모르겠어요.”

목에서 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온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황급히 대답을 바꾸었다.

“돌아가야죠.”

아까보다 더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

나왔다.

“그럴 겁니다.”

“……슈.”

숨 쉬는 게 어렵다. 올가미가 내 목을 바싹 죄어 왔다. 식은땀이 새어 나왔다.

녹스가 혀를 차며 내 목을 살폈다.

“거짓말하면 안 된다니까.”

기적 수치를 전부 채우게 되면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나는 그걸 위

해 이 낯선 세상에서 몇 번이나 분투했다.

그런데, 인제 와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게 내 진심이라고?

이마에 맺혀 있던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저번에 예기치 못한 통증을 느꼈

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저도 모르게 발버둥 쳤는지, 카일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슈.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야? 하지만, 네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나를 살

린다고…….”

“맞아요. 분명히 그랬어요. 전하를 살리고, 힘을 모아서, 햄스터가 아니라 인

간으로…… 살던 세계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내가 쉰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실은, 이곳에 있고 싶어요.”

그렇게 인정하자 고통이 사라졌다. 말끔히 사라진 건 아니었으나 한층 견딜

만은 했다.

아마도 내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그런 거겠지.

“긍정보다 부정 쪽에 더 기울어져 있군. 잘 알겠어.”

“…….”

“그럼, 세 번째 질문.”

녹스가 내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목이 바짝바

짝 타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오늘 실험에 협조하려면 그가 준 이 푸른 음료를 마셔야 하겠지. 계약

서를 썼으니, 독약은 아닐 테니까…….

이걸로 목이라도 축여야겠다. 나는 기분 나쁠 정도로 파랗게 반짝이는 음료

를 단숨에 들이켰다. 화려한 색과 달리, 아무 맛도 없었다.

“꼬마. 네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곳은 현실이고…….”

“…….”

가슴께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서늘한 느낌이 명치에 고이며 구토

감이 차올랐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지독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기

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이상했다.

기분도, 몸 상태도.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와중,

놈의 목소리는 기분 나쁠 만큼 선명하게 들렸다.

“이곳은 네게 가상의 세계인가?”

“…….”

“배수현, 네가 개발했다던 게임이라던가. 소설, 영화처럼.”

“…….”

“이미 만들어진 허구의 세상 속에 들어와, 네 죽음을 바꾸고 있는 건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순간, 눈앞에 시스템 창이 경고하듯이 떠올랐다.

[현재 이변 간섭률 46%]

[현재 이변 간섭률 56%]

[현재 이변 간섭률 66%]

[경고! 이변 간섭률이 너무 빠르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소화할 수 없는 힘입니다!]

[‘불러오기’ 된 육신에 타격이 갈 수 있습니다!]

[경고!]

아, 그 음료.

역시, 녹스의 마력이었구나.

나는 지끈거리는 가슴팍을 부여잡은 채 콜록, 붉은 피를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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