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느린 햄스터도 성낼 적이 있다 (1)
오늘 있었던 일과 각자 알아낸 정보를 대화를 통해 나눈 뒤, 준비된 물로 씻
고 간단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나자 어느덧 해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용케 메시지를 보내셨네요.”
“메시지……. 아, 사랑의 전서구 말인가.”
“네. 생각보다 오타도 안 났고.”
“유용하긴 하더군.”
카일이 낮게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려 주는 손
길이 다정하기도 했다.
“그래도 기왕이면 끝까지 말 좀 해 주세요.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걱정했잖습
니까.”
“그걸 설명하느니 네게 가는 게 더 빠를 것 같더군.”
발이 빠르니까, 그럴 것 같긴 하다.
‘자동 완성 기능이라도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지금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긴장이 풀리니 나른해졌던 탓이다. 모처
럼 카일도 안심한 것 같고.
조금 전 그의 설명을 떠올려 보자면 우리는 이 마탑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다
고 한다. 바깥으로 이어지는 중앙 쪽 대문은 닫혀 있는데, 특정한 힘을 주입해
야만 열리는 구조라고 했다. 아마 주인의 마력을 인식하는 장치일 거라고도 덧
붙였다.
“그걸 억지로 부수려고 하자 하인들이 공격하더군. 갑옷을 입은 시체 군단도
있었다. 내가 본 건 한 스물 정도였고.”
“아무리 사람 살기 팍팍한 동네라지만, 탑 곳곳에다 시체를…… 으, 악취미.”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녹스 놈이야 사고 치는 게 일상 아닙니까. 별일 없었어요. 저는 괜찮……
읍.”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말을 하려던 찰나, 카일이 인상을 찡그리며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괜찮은데, 목에 이렇게 자국이 난다고?”
“어이아. 아오.”
뭡니까, 놔요.
“생각해 보면 넌 항상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 하나같이 괜찮지 않
은 일투성이였는데도.”
“아이어으오.”
아니거든요.
아! 좀 놔라!
결국, 내게 손바닥을 물리고 나서야 카일은 손을 떼어 냈다. 웃고 싶은 듯 입
꼬리가 살짝 떨렸다. 속으로 햄스터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푸핫,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에 대답했다.
“안 괜찮으면 뭐 달라집니까? 이미 벌어진 일이 없던 게 되는 것도 아니고,
답 없는 문제에 해결책이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빨리빨리 적응
하는 게 상책이죠.”
우는소리 한들 변하는 건 없다. 쓸데없이 걱정 끼치기도 싫었다. 그래서 언제
부터인가 웬만한 건 괜찮아요, 하고 얼른 넘기려 드는 습관이 생겼다.
카일이 뒤에서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은 채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대며 작게 속삭였다.
“너는 강하군.”
“북부의 주인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영광인데요.”
“그래도 네가 가끔은 푸념도 하고, 솔직하게 기대 줬으면 좋겠다. 어리광 부
리는 모습을 본다면 더 좋겠군.”
“…….”
“모든 걸 괜찮다는 말속에 담아서 꾸역꾸역 삼키지 않아도 좋아. 네가 행복
해질 수만 있다면 난 뭐든 힘껏 도울 거다.”
카일은 언제고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는 듯이 덧붙였다.
“넌 좀 더 남들에게 기댈 필요가 있어.”
그 말에 담긴 다정함이 내게 고스란히 와닿는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내게 당연하다는 듯 다정하다. 마치, 그것만이 제 사랑을 증명하는
가장 바른 길이라고 믿는 것처럼.
내가 바라는 건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그 마음에 감동이라도 한 걸까? 어쩐지
평생 부려 본 적도 없는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졌다.
나는 몸을 살짝 뒤로 젖혀 그에게 기댔다.
“녹스 그 자식, 눈치가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조금만 힘을 쓰려고 하면 바로
반응한다니까요. 오늘 정보를 꽤 많이 캐내기도 했으니, 심사가 뒤틀릴 만도 하
지만.”
“소득이 괜찮았던 모양이로군.”
“네, 제법. 하지만 그만큼 녹스도 알게 된 게 많아요.”
대놓고 내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각오해야 하
는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무섭긴 했는데, 지금은 아프지도 않고. 괜찮…….”
안 하려던 걸 하려니 영 어색하네.
하지만 묘하게 타박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한 붉은 눈동자
를 마주 보고 있자니 용기를 내야 할 것 같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내가 말했다.
“……크흠. 괜찮아지려면 아무래도 오늘은 전하와 같이 자야겠어요.”
“…….”
“전하?”
뭐라고 좀 해 봐라. 그렇게 굳어서 쳐다보기만 하면 사람 민망하잖냐. 어리광
부리라며!
“풋.”
“…….”
“풋, 아하하, 하하. ……그래, 정말이지. 알겠다. 같이 자자.”
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한참을 웃으며 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더니, 이내
번쩍 안아 들어 침대로 향했다.
깨끗하게 씻어 낸 그의 몸에서는 부드러우면서도 포근한 비누 향이 났다. 나
는 만족스레 카일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카일은 팔을 뻗어 태연하게 나를 감싸면서도 심장은 사뭇 빠르게 뛰고 있었
다.
‘그렇지, 이게 삶이지.’
조금 유치하고 단순하지만,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삶을 실감한다.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면서 현실의 생생함을 느낀다. 다소 위험한
일투성이긴 해도, 그와 함께 하나씩 해결해 갈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기어이
그의 운명을 바꿔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충족감으로 마음이 벅차곤
했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기적 수치는 어느덧 거의 90퍼센트를 돌파했다. 이번 마탑의 일만 잘 처리한
다면 100퍼센트를 전부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돌아가야 하려나.’
놀랍게도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가슴이 싸늘한 한기가 들어차는 감각이 느
껴졌다.
돌아가야 하나?
죽음을 번복할 힘을 손에 넣었으니까, 내가 본래 살았던 곳으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할까.”
품 안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진 걸 느껴서일까, 카일이 내 등을 당겨 안으며
천천히 토닥였다.
“그냥…… 돌아가게 되면 어떨까, 하고요.”
그곳의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내 몸에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게 맞을
까. 돌아가면 이 세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할 수는 있는 걸까.
깨는 순간 잊는 꿈처럼, 다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아니, 정말로 살아 돌아갈
수는 있는 걸까.
나는 시스템에게 조용히 물어봤다.
‘기적 수치를 다 채우게 되면, 정말로 돌아갈 수 있어?’
잠깐의 정적 후, 시스템이 대답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글자는 깨진 곳도 없고 파랗게 빛나는 테두리조차 흔들리지도 않았다. 그런
데도 어쩐지 나는 이 한마디가 오싹하게 느껴졌다.
나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카일과 내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듯한
시스템 창에 손을 뻗어 보았다. 마치 내게는 보이고,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을 손에 거머쥐려고 하는 것처럼.
당연하게도 내 손은 허공을 갈랐다. 손끝이 닿은 부분이 이지러지더니 시스
템 창이 흐려졌다.
그 대신 카일의 손이 다가와, 내 손을 단단히 잡았다.
“왜 그러지?”
“…….”
따뜻하다. 흉터투성이인 손이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고 따스했다.
“……너무 현실적이어서요.”
분명히 이곳은 소설, <겨울의 심장> 속인데.
끝까지 읽지도 않은, 아니, 절반쯤에서 하차한 뒤 한동안 말끔히 잊어버린 세
계였다. 누군가 빚어낸 비현실적인 세계 속, ‘설정’을 가지고 태어난 등장인물
들.
새삼스럽지만 검은 활자로 이루어진 단순한 책이었던 것이 이젠 하나의 세상
이 되어 피부에 와닿고, 생생하게 느껴지는 게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고작 비현실일 뿐인데.’
언제부터 이 세계에 푹 빠지게 되었을까. 어쩐지 두 세계의 틈에 끼어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미미한 동요를 알아차린 건지, 카일이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실으며 속삭
였다.
“현실이니까.”
다정하지만, 단호한 울림이었다.
“전하에겐 비정한 곳 아닙니까?”
“부정할 수는 없겠군. 하지만, 괜찮아.”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는 불행한 배경 속에서 분투하듯이 살다가 비극적으
로 죽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나를 품에 안고 맞잡은 손을 단단히 깍지 끼워 잡은 그의 표정에는
너무도 행복하고 충만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네가 있잖아.”
그래. 역시……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단순히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등장인
물로 그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품에 다시 고개를 묻었다.
기적 수치는 거의 90퍼센트 정도라지만, 이변 간섭률은 30퍼센트 남짓이다.
수치를 더 끌어 올리기 위해서라도 내일부터는 더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했다.
힘내야지.
꼭 살려 내는 거야. 이 세계가 비현실이더라도, 현실이더라도 상관없다.
카일의 품에서 가물가물 잠들기 전, 아까 보았던 시스템 창을 다시금 어렴풋
이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 * *
이튿날.
카일은 나를 보호하겠다는 이유로 녹스의 연구실에 동행했다. 아무래도 자신
이 없는 사이에 또다시 놈에게 위협당할까 봐 걱정된 모양이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겠어. 오늘 실험은 다른 날보다 과격하기는
할 테니까.”
식당에서 만난 녹스는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보다 더 반질반질한 미소가 유독 재수 없게 느껴졌다.
“계약은…….”
“위반할 정도는 아니야. 웬만하면 꼬마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로 선별하고
있거든. 나름 이 분야에서는 고매한 실력자인데, 믿어 주지그래?”
카일이 먼저 한 모금 마신 뒤, 건넨 음료로 목을 축이던 내가 눈을 흘겼다.
“믿을 게 따로 있지. 됐고, 다 먹었으니까 얼른 올라갑시다.”
“오늘따라 기세가 대단한데?”
“그쪽이 각오하라고 큰소리쳤잖습니까. 그래도 너무 몰아세우면 전하께서
검부터 뽑을 테니.”
“네, 네. 모쪼록 조심하죠. 그럼, 위층으로 가실까요?”
우리 세 사람은 나선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뒷짐을 진 녹스가 먼저 발을 뗐고, 우리 둘 사이를 떨어뜨리기 위해 칼자루에
손을 얹은 카일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나는 카일의 뒤에 바짝 붙었다.
카일의 뒷모습 너머로 녹스의 흰 머리카락이 눈발처럼 흩날렸다.
“우리는 모두 한차례 죽음을 겪었고, 죽음을 극복한 이들이지. 또 죽음을 거
부하기 위해 뭉쳤으며, 가장 영원하고 위대한 것을 위해 마법을 연구하고 있
어.”
아직 연구실에 도착하지 않았지만, 오늘 알려 주기로 결심한 듯한 녹스의 비
밀이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공허한 넋’, 루키트는 우리의 매개나 마찬가지야. ‘장의사’ 샐리나는 그를
사랑했고, 영혼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지. ‘익사체’ 로잘리
아는 두 사람의 사연에는 관심 따위 없지만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연구를 계속
하길 원했고, 기왕이면 그걸로 여왕처럼 군림하길 바랐어.”
“…….”
“그리고 나, ‘하얀 망령’은 그 모든 판 위에서 이 끝없는 호기심을 채우기 위
해 움직일 뿐이야.”
연구실 앞에 선 녹스가 나와 카일을 돌아보았다. 언제 보아도 눈이 시리도록
흰 남자였다.
“꼬마, 네 진짜 이름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