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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108화 (108/129)

108화. 햄스터로 마탑 치기 (4)

그 조그만 몸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크기로, 그의 연인이 이런 말을 직접 들

었다면 분명 화를 냈을 것이다.— 에 열이 펄펄 끓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조각조각 저며지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그는 이곳보다 훨씬 안전한 곳에서 지내던 이였으니, 그

간의 일이 분명 벅찼을 것이다. 본인이 워낙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매사 씩씩하

게 굴어서 깜박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카일은 깊이 잠든 연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온 성을 제집처럼 휘젓고 다

닐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새삼 보니 마르고 여렸다.

열을 내리느라 한참 고생했다. 해열 사탕을 먹고 나서도 꼬박 한 시간을 앓다

가 기절하듯이 잠들었는데, 그 와중에도 꿈을 꾸었는지 연신 끙끙거렸다.

‘힘들었을 텐데.’

연인이 괜찮다고 습관적으로 하는 말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지난날의 자신

이 미련하게만 느껴졌다.

괜찮지 않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영지에서 살아남는 것도, 비밀을 숨기며 적응하는 일도, 정쟁이며 탐사 따위

를 하느라 동분서주하며 함께 북부를 지키겠다고 아등바등 분투한 그 모든 일

이 슈에게는 고생이었을 것이다.

카일은 슈의 구겨진 미간을 조심스럽게 꾹꾹 눌러 주었다. 아까 제 품에 무너

지듯이 쓰러졌을 때는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을 다 부수고 싶을 만큼 화가 났지

만, 지금은 털끝만큼이라도 다칠세라 조심스럽기만 한 몸짓이었다.

“너는 아프지도, 다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손이 슈의 눈가를 쓸었다가 떨어졌다. 아직 열이 남아서인지 발그스름

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너무 허망하게 내 곁을 떠나가더군.”

망설이듯이 내뱉는, 아주 작은 속마음이었다.

“너는 그러지 마, 슈. 나는…… 네가 내 곁에 남아 주었으면 좋겠다.”

“…….”

“그래, 이기적이지. 나는 네가 이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만큼 못되

고 이상한 것이 없는데, 네가 조금 이상한 게 무슨 문제가 될까.”

그는 현실을 미워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다 한들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그 시간에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것을 찾고, 실제로 해내서 바꿔 나가는 게 훨씬

더 나았다.

그래서 카일은 제 친모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 때도, 온갖 멸시 속에서 꾸

역꾸역 하루를 버텨 냈을 때도, 그러다가 북부로 쫓겨나듯이 올라가 황량한 땅

에서 마수와 목숨 걸고 싸워야 했을 때도 억울한 감정 같은 것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어떤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어떤 노력도 의미 없는 불변

의 격차가 원망스러웠다.

“네가 이 세계의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너는 어째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어떤 신기한 세계에서 온 이방인일까.

너는 왜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걸까.

아, 나는 어쩌다 그런 너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슈.”

그 부름에 반쯤 안고 있던 몸이 움찔 떨렸다.

카일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연인의 안색을 살폈다. 불안감에 잘게 떨리던 붉

은 눈동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어른어른 비쳤다.

“……전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전히 조금 쉬어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카일은 제

목이 더 아픈 것 같았다.

카일이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슈를 빤히 들여다보자, 그가 손을 뻗어

연인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잘생긴 얼굴 까칠해졌네. 한숨도 안 잤죠.”

“네가 아픈데 잠이 오겠나?”

“그래도 밖이 어두워졌는데요. 한참을 이러고 계셨잖아요.”

정신을 차리자마자 당연한 것처럼 제 걱정을 한다. 그러려고 노력하거나 다

짐한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살며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애틋함으로 가슴 한구석

이 아려 온다. 카일은 슈의 손에 서늘한 뺨을 가볍게 기대며 말했다.

“네가 이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슈가 뚱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과해야 하는 타이밍입니까?”

“하하, 아니.”

카일이 손을 올려 그의 손을 떨어뜨리고는 그 손끝에 자잘한 입맞춤을 떨어

뜨렸다.

“네가 사랑스러워서.”

“…….”

순간, 슈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열이 다시 올랐나? 당황한 카일이 그의 이마에 손을 얹자, 홧홧한 열감이 손

바닥에 스며들었다.

“열이 다시 오르는 것 같은데, 슈.”

“그게 누구 때문인데요! 아니, 갑자기 낯간지럽게, 뭐, 평소에도 행동에 다

묻어나니까 알긴 알았는데…….”

카일이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번에는 내가 사과해야 하는 타이밍인가?”

“사과하실 겁니까?”

“아니.”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슈는 볕을 잘 보지 않아서인지 전체적으로 혈색이 옅었다. 그러면서도 마냥

약한 인상은 아니었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에는 제가 가진 것과는 다른 종류의 강인함과 노련함

이 깃들어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은 햇빛을 다듬어 만든 듯 언제나 따뜻하고 부

드러웠다.

맞닿은 이마로부터 전해지는 열이 조금씩 잦아졌다. 아파서 난 열이 아니라

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카일이 낮게 웃었다. 마음을 전할 때마다 새삼스럽게 반응하는 연인이 사랑

스러워서 견디기 어려웠다.

“행동과 말은 달라, 슈.”

언제나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껏 표현했다. 그는 눈치가 빨랐으

니 금세 알아주었다. 같은 마음으로 화답하기도 했고, 기뻐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말과 행동은 다르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도 하지만, 그렇다고 말이 중요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때때로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존재하기도 하니

까.

“사랑한다.”

그래서 말했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겠지만 지금 이 감정과는 또 다를 테

니까. 오늘 느낀 기분은 오늘 전달하는 것이 가장 온전할 테니까.

“너를 사랑해.”

침묵이 흘렀다. 같은 말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카일은 불안하지 않았다. 곧

연인이 팔을 뻗어 저를 끌어안고 품에 고개를 묻었기 때문이었다.

“……저도요.”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 짧은 대답이, 자신이 평생을 들여 헤쳐 온 모든 고난에 대한 보상인 것처

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슈를 마주 안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빈틈없이 행복했다.

*

묽은 수프를 다 받아먹었을 때쯤의 내 몸 상태는 꽤 나아져서, 그에게 기댄

채 하루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러니까, 실종 사건이 북부 마법사단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거지.”

“네. 녹스가 직접 지시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녹스가 ‘겨울의 심장’을 완성

하기 위해 필요한 게 뭔지 생각해 보면 관련이 없지는 않아요. 더 자세히 묻고

싶다면 내일을 기약해야 하니까요.”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면 그걸로 해도 괜찮다.”

카일이 흰 천으로 내 입가를 꼼꼼히 훔쳐 주며 대답했다. 한없이 다정하고 조

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관련되었다는 사실만 알면 돼. 어차피 황제와 녹스가 내통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않았나.”

“그것도 그러네요. 결국 중요한 건 증거니까, 좀 더 조사해 본 뒤에 효율적으

로 질문해 보자는 거죠.”

“그래.”

내가 녹스는 이미 죽은 사람이며, 이 모든 괴이한 짓을 한 이유가 영생과 학

구열을 위해서라는 말을 하자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 방에 딸린

서재를 살펴본 결과, 그 역시 비슷한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들이 굳이 이 추운 땅에 자리를 잡은 건 어떤 법이나 규율로 구속할 수 없

는 그들의 행적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추운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이 추위를 찾는 이유야 하나뿐이다. 나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시체가 썩는 일을 막기 위해서요?”

“그래.”

나는 침실 옆에 놓인 책 몇 권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시체 보관법’이라던가 ‘부패를 막는 냉기에 대한 10가지 연구’,

‘얼음 마법에 관련된 진실’ 같은 것이 적혀 있다고 했다.

아마도 부주의해서 책을 치우는 일을 깜빡한 게 아니라, 이 정도는 알려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이조차도 녹스가 일부러 흩뿌린 정보라고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놈에 대한 적

개심이 치솟았다.

“그놈이 네게 허튼짓은 하지 않던가?”

카일의 손길이 내 목에 닿았다.

마법 계약 때문에 올가미가 목에 남아 있었다. 내가 녹스와 문답을 주고받다

가 통증을 느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니, 희미하게 남은 그 흔적이 그냥 마음에

안 든 듯싶었다.

하긴, 낙인을 떼 내자마자 또다시 목에 뭘 달고 다니는 셈이니까.

“그러진 않았는데…….”

거짓말은 아니다. 그런데도 양심이 살짝 찔렸다.

“그,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제가 다시 살아서 돌아갈 수 있도

록.”

“그랬지.”

“그 사람과의 대화라든가 제가 도움을 받거나 물품을 살 때 개입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제가 가진 그 힘이 궁금한지 좀 더 본격적으로 살펴보고 싶어 하더

라고요.”

“대화를 할 수가 있다고? 단순히 꿈을 꾸는 게 아니라?”

……아차. 시스템과 대화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구나.

심장이 철렁했지만, 나는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꿈이라는 것도 어쩌면 살펴볼 수 있을 거고요. 여러모로 제 사생활

을 침해 중이시라서. 최소한의 협조만 해 보겠지만요.”

“그쪽이 네 속을 멋대로 파고든단 말이지.”

카일의 목소리가 살짝 음산해졌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나 같

아도 그럴 것이다. 애인의 속을 헤집는다는데 누가 반가워할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다면 역으로 네가 그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는 건 불가능한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가 네게 개입한 흔적이 남았다면, 그걸 통로 삼아 역이용해 보는 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신선한 발상인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그게 가능하기만 하면 한낱

햄스터 따위가 마탑을 탈탈 털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내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래, 얌전히 협조만 하는 건 성미에 안 맞는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

는 법.

역공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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