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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107화 (107/129)

107화. 햄스터로 마탑 치기 (3)

“그렇다면?”

짧지 않은 침묵 후, 녹스가 그렇게 말했다. 마치 나를 도발하는 것처럼 가볍

게 울리는 목소리에 어쩐지 약이 바짝 올랐다.

녹스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혀를 차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결국 가

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니. 내가 한 일이 아니야.”

나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녹스는 목에 어떤 통증도 느끼지 않

는 듯 태연한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다. 마인하르트 실종 사건의 배후는 녹스가 아니다. 만일 거짓

말을 했다면 그의 목에 걸려 있는 올가미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

“믿지 않는 얼굴이군.”

“믿어요.”

나는 녹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정확히는 그쪽이 아니라, 마법을 믿는 거지만.”

“다를 게 없지. 내 실력은 곧 나니까.”

녹스가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비스듬히 앉아 있던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어

지럽게 도는 것 같았다. 어깨가 부르르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히,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아, 질문을 잘못했나. 마법사단

이 이 실종 사건과 관련이…….”

횡설수설 쏟아지는 내 말을 놈이 가볍게 잘랐다.

“오늘치 질문은 끝났어, 꼬마. 내 질문만 하나 남았지.”

“…….”

나는 흐린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주눅

들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시선을 맞추는 것이 전부였다.

“네가 이렇게까지 갖은 애를 쓰는 건 전부 그 대공작을 위해서겠지. 다른 세

계에 사는 너는 영생을 바라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아.”

녹스의 눈동자는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떤 호기심을 삼키며 맹렬하

게. 찰나,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너는 대공작을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나?”

이 분위기에 걸맞지 않은 질문이었다. 나는 살짝 김샌다는 듯 웃었다.

“그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니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연구실 안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변했다. 내 몸이 앞으로

훅 기울어지며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목덜미를 둥글게 둘러싼 수십 개의 얼음 바늘이 내 살갗을 찌르며 안으로, 안

으로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이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삼키며 몸을 웅크

렸다.

아팠다. 죽을 것처럼 아프지는 않았지만, 정신을 쏙 빼놓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내가 헐떡이며 어떻게든 숨을 쉬려 애쓰자, 녹스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체구 차이 때문에 손쉽게 들려 버린 몸뚱이가 다시 실

험대에 앉혀졌다.

“네 진짜 선택은 다른 모양인데, 꼬마.”

나는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카일 전하에게는, 말하지 마세요.”

“왜? 열렬한 사랑이라며 감격할 텐데.”

“열렬하긴 무슨.”

내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피 한 방울 묻어나지 않는

다. 올가미는 그저 빠르게 고통만 준 채 사그라졌다.

그나마 내가 작정하고 속인 게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봐준 걸까. 물론, 그

렇다고 시시한 응징이었던 건 아니다.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으니까.

“기뻐하지 않을걸요.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건다는 건, 너무 과격하니까. 그

렇게 해서 살아남는다고 해 봤자…… 그게 남겨진 것과 뭐가 달라.”

“흐음.”

“그렇게 산다고 해도 의미는 없을 겁니다. 적어도 전하는 그렇게 생각할 거

고요.”

“신기하군.”

“신기할 수밖에. 그는 당신이 아니니까.”

나는 부루퉁하게 덧붙였다.

“같이 안 있어서 다행이네. 아무튼,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전하에게 말하지

마십쇼.”

“적잖이 놀란 주제에 애인부터 챙기는군. 눈물겨운 사랑이야.”

“거짓말한 건데요.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 주기 싫어서.”

“그럴 리가.”

그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웃었다.

“속일 걸 속여야지, 꼬마야. 작정하고 거짓말한 거라면 식은땀 좀 흘리는 정

도로 끝나지 않아.”

“…….”

“하지만, 확실히…… 지금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 얼굴도 붉고. 오

늘은 일찍 끝낼까.”

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눈앞이 일렁거리고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기 때

문이었다. 그새 열이 올랐나? 아침에는 그냥 미열일 뿐이었는데.

어쨌든 돌아가야 했다. 카일을 부를 수 있다면 좋겠는데…… 지금은 탑을 조

사하고 있겠지.

나는 데려다주겠다는 녹스의 대답에 귀찮으니 꺼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기어서 가는 한이 있더라도 놈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다. 이 틈을 이용해서

무슨 개수작을 부릴지 알고.

‘와, 죽겠네. 몸이 이렇게 안 좋아 본 게 얼마 만이지.’

벽을 짚어 가며 비틀비틀 문을 나섰다.

그러자…….

“슈!”

당황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카일이었다.

“전하.”

“몸이 안 좋아 보이는 것 같아서 걱정되어 왔더니…… 대체. 목은 왜 이렇게

뜨겁지?”

카일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붙들어 제게 기대게 했다.

내게 닿아 온 손이 서늘하면서도 기분 좋았다.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숨을 색

색거리며 내쉬자, 카일은 아예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녹스, 그 자식이 설마…….”

카일의 목소리에 노기가 섞였다.

그런 거 아닌데. 이번만큼은 딱히 녹스가 잘못한 게 없었다. 그냥, 낯선 곳이

너무 추웠고 몸이 안 좋았던 데다가…… 놀라기도 했고, 목이 아프기도 했다.

내내 긴장하고 있어서인지 열이 오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전하.”

나는 그를 말릴 요량으로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예상대로 연구실 안으로 들

어서려던 카일이 멈칫했다.

“추워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이니까.

녹스와 대거리하는 게 피곤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느냐고 묻다가 놈이 쓸

데없는 말을 하는 건 더 싫었다.

“돌아가요.”

카일은 오래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더니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체열이 그대로 전해졌는지, 흐린 시야 사이로 그가 걱정스레 미

간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가자.”

그 말에 안심해서였을까. 나는 그에게 기댄 채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나 깨었다가 까무룩 잠드는 일을 반

복했다.

카일이 녹스에게 가서 따져 묻기라도 할까 봐 곁에 앉은 그를 당기며 가지 말

라고도 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전하.”

“응.”

“……전하.”

“그래. 여기 있다. 필요한 게 있나?”

본래 세계에서도 그렇게 잘 아픈 편은 아니었다. 어쩌면 너무 바빠서 아플 시

간조차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누군가 내 곁에 딱 붙어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손이며 얼굴을 부지런

히 닦아 주고 걱정하는 이 상황이 사뭇 신기하게마저 느껴졌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마. 언제나 그랬듯.”

당신이 뭐 도깨비방망이라도 됩니까? 평소라면 그렇게 말했을 텐데. 이성이

느슨해지다 못해 열 때문에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렸는지, 생각을 거치지도 않

은 말이 불쑥 튀어 나갔다.

“그럼, 저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내 말이 조금 의외였는지 카일이 고개를 가까이 숙였다.

“네가 왜 이상하지?”

“그냥…….”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당신을 위해 내가 목숨을 걸 수도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게 너무

비현실적이고 집요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달라고. 그런 말을 어떻게

할까.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는 걸 떠나서 부끄러웠다. 나는 재빨리 말을 얼버무

렸다.

“제가, 뭐, 여러모로…… 특이하잖습니까. 이상한 행동도 하고.”

“슈. 네가 뭘 걱정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 이마에 흠뻑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속삭였다.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나는 너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너를 존중해. 그게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저를 엄청나게 사랑한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아닌 줄 알았나?”

카일이 낮게 웃었다.

“그런 이야기는 됐고. 열을 내릴 방법이 없나? 영지가 아니어서 약도 없고,

걱정이군. 쉽게 내리질 않는 모양인데.”

카일이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세간에서는 입맞춤으로 감기를 가져갈 수 있다는 미신이 있던데…… 미신인

것이 안타깝군. 내가 가져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실없는 소리.”

큭큭거리며 웃던 내 시야 앞으로 흐릿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견과류 상점!]

[ヽ(*。>Д<)o゜)))) 견!과!류! 상점!]

‘견과류 상점?’

지금 필요한 건 해열제인데, 상점에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다.

[아몬드 콕콕 해열 태피 | 기적 수치 2% 소모 | 열을 싹 내려 드려요!]

‘알았어, 미안. 정신 없어서 잊었다고.’

이걸 어떻게 여태 잊을 수 있냐며 펄펄 뛰는 시스템을 성의 없이 달래고, 얼

른 태피 사탕 하나를 사서 카일에게 건넸다.

팔만 조금 움직일 뿐인데도 힘겹다. 아무래도 제대로 몸살에 걸린 모양이다.

“……마법 물품 같은 겁니다. 해열 효과가 있대요.”

“먹을 수 있겠나?”

시럽도 아니고, 알약도 아니고. 하필이면 먹기도 힘든 사탕이다. 꿀꺽 삼켰다

가 재수 없게 목에 걸리기라도 하면 골치 아플 것 같다.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먹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

카일은 내 손에서 태피 사탕을 가져갔다. 그러더니 내 등을 받쳐 조금 일어나

게 했다.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서, 나는 눈을 반쯤 감은 채 그에게 힘없

이 기댔다.

바스락. 사탕 포장지를 까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하마.”

그리고, 입술이 맞닿았다.

서늘한 입술이 내 입술을 모조리 삼켰다. 따스하고 습한 숨결이 입안 곳곳에

스며들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열기를 삼키고 싶은 것처럼 굴었다. 고소하고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가 느릿느릿 목구멍을 넘어갔다.

사탕은 그의 다정함만큼이나 달았다. 혀가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그에게 매달렸다.

‘약해지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되니까. 하지만, 그의 곁에서는

하루쯤 이렇게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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