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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105화 (105/129)

105화. 햄스터로 마탑 치기 (1)

마탑에서의 첫날은 생각보다 무난하게 지나갔다. 녹스 놈은 흥미가 끓는다는

시선으로 온갖 약병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을 가져왔지만, 나는 꼭 필요한

실험이 아니라면 거절하겠다며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의 문답으로도 이변 간섭률은 올라갔으니까.’

현재 약 13퍼센트가량. 그동안 기적 수치를 모았던 속도에 비하면 상당히 넉

넉하다.

오른팔의 중독도 사라졌겠다, 필요 이상으로 도와줄 필요는 없었다. 애당초

말이 좋아 협력이지 실험용 쥐 신세 아닌가.

녹스는 의외로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루에 여섯 시간 정도만 협력하겠

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심지어 놈은 서리의 마탑을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좋다고 했다. 단, 이 탑의

안전을 위배하는 행동을 하면 사용인들이 알아서 죽일 거라면서.

“절대로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아야겠군.”

카일은 침실 안에서도 항상 갑옷 차림을 고수하고 검을 절대로 멀리 떨어뜨

리는 일이 없었다. 나와 바짝 붙어 있을 때조차도 때때로 사방을 경계하며 기척

이 느껴지지는 않는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정작 그런 데 어떤 재능도 없는 나는, 연인의 차가운 뺨을 양손으로 매만지며

설득했다.

“안 됩니다, 전하. 어차피 녹스는 저를 해치지 못하잖아요. 실험실에 들어가

있는 여섯 시간 동안에는 굳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어요.”

운을 떼기만 했는데도 카일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곧장 깨달았다. 반듯

하면서도 수려한 얼굴이 미미한 불만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나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오기 힘든 곳이니만큼 정보를 하나라도 더 모아야 했다. 이변 간섭률을 채우

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북부 마법사단을 상대하려면 지금보다 많은 정보가

필요하니까.

‘모든 일을 나 혼자서 해낼 수는 없지. 게다가, 시간 낭비잖아.’

녹스가 나와 대화하거나 실험하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가 직접 나서서 감시할

수 없다.

그러니 그사이에 카일이 돌아다니는 게 훨씬 효율이 높다. 나와 달리 카일은

검술 실력이 뛰어나니까 웬만한 위험에는 대처할 수 있을 거다.

게다가 앞으로 녹스에게 어떤 비밀을 털어놓게 될지 모르니, 따로 움직였다

가 저녁에 만나서 낮에 얻어 낸 정보를 공유하는 쪽이 더 안전할지도 몰랐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성적으로는 내 판단이 조금 더 실용적이라는 걸 카일

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곧장 인정하는 대신 팔을 뻗었다.

“내키지 않아.”

카일이 어리광을 부리듯 내 품을 파고들었다.

덩치는 나보다 훨씬 큰 주제에 은근히 귀엽게 군다. 물론,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붙어 있으니 마음이 편했다.

나는 그의 등을 쓸어 주며 달랬다.

“전 무사할 겁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간단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장치

가 있다면 편할 텐데…….”

그는 내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쿡쿡거리며 웃었다.

“원거리 통신은 마법사들도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다. 하물며 마법사도 아닌

이들이 쓰는 건 지금으로서는 요원한 일이지.”

“제가 살던 곳에서는 흔했는데요.”

“응?”

내가 핸드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카일의 붉은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

였다.

“그런 게 가능하다니…….”

신기할 만도 했다. 마력이 아니라 전기를 이용해 충전하는 것도 그렇고, 편지

를 적어 보내는 건 물론 목소리를 들려주거나 얼굴을 보여 주는 것조차 가능하

니까.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정말이지 신기한 세계군.”

“저한텐 여기가 더 신기하거든요? 죽은 놈들이 시중을 들질 않나, 마수가 있

질 않나…….”

“그곳엔 마수가 없다고?”

“당연하죠. 짐승은 있어도. 심지어 호랑이나 곰 같은 짐승들도 웬만하면 평

생 직접 마주칠 일 없거든요. 동물원 같은 데서나 보는 거지.”

이어지는 내 이야기를 듣던 카일이 조금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마법사도, 마수도, 제국과 귀족도 없는 세계라…….”

“네, 뭐.”

“슈. 네게는 그곳이 훨씬 더 살기 좋았겠군. 안전하기도 하고.”

“어…….”

그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카일의 말대로 크게 앓는 지병이나 예기치 못한 사고가 아니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평범하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 거다.

싸우자며 나서는 황족도, 도망치는 그 짧은 틈에 팔에다 저주나 남기는 정신

나간 마법사도, 영지를 부숴 놓는 변이종들도 없으니까.

하지만.

“저는 여기가 더 좋아요.”

그 말은 한 치의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뺨을 댄 채 몸을 늘

어뜨렸다.

“원래 살던 곳이 좀 더 편리하고 안전하긴 하겠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곳에서의 나는 외로웠다.

마음 하나 온전히 나눌 사람이 없었고, 더 정확히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매

일 일하느라 지쳐서 돌아오고 나면 맥없이 핸드폰이나 두드리다가 그대로 곯아

떨어지고, 눈을 뜨면 지친 몸뚱이를 이끌고 다시 출근길에 올랐다.

먹고사는 일이 지치니 푸념도 점점 줄었다. 삶이 녹록해서가 아니라, 시간 들

여 한탄하는 것조차도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사람을 만나지 않았냐면 그건 아니지만, 회

사 사람들을 상대로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할 리 없다.

그렇게 살았던 시간이었다.

너무 오래된 나머지 그게 외로움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모르고 싶었던 그

고독은 너무 단단해서 누구도 영영 깨뜨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삶의 끝에서 기적처럼 이곳에 보내졌고, 카일을 만났다. 그를 살

리기로 선택하면서 온갖 위험한 일이 찾아왔으나 어떻게든 이겨 냈다.

그리고 카일을 사랑하게 됐다. 카일 역시 그랬고, 그 온기가 중력처럼 나를

이곳에 단단히 붙들어 맸다.

“전하가 여기 계시니까, 저는 여기가 좋아요.”

카일은 조금 떨어진 채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건넨 마음의

깊이를 차분하게 곱씹는 듯한 태도였다.

어깨를 꽉 붙잡은 그는 어딘가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웃었는데, 차갑고 근엄한 인상이 사르르 녹으며 다정하고 부드

러운 특유의 분위기가 떠올랐다.

“나도 그렇다.”

차디찬 얼굴로 이런 미소는 반칙인데. 나는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눈길을 피하지 말라는 듯 재빨리 내 턱을 잡아 왔다. 그

러더니 입가는 물론이고 뺨, 코, 눈꺼풀 언저리에 연신 입술을 누르며 애정과

기쁨을 표현했다.

햄스터한테 뽀뽀하던 습관 그대로잖아! 사람 살려!

“이, 이제 그만 잡시다! 내일 해야 할 일이 많다고요. 일찍 일어나서 어디를

살펴볼지도 의논해야 하고…….”

“조금만 더.”

그가 무어라 더 항의하려던 내 입술을 통째로 삼켰다.

날이 갈수록 능구렁이처럼 군다. 그의 어깨를 팡팡 때려 봤지만,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는 조금도 힘이 빠지지 않았다.

“푸핫, 헉, 허억…… 남의 집에서 이러지 맙시다!”

그러자 카일이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만 조용히 한다면 아무도 모르겠는데.”

“…….”

그의 얼굴이 다시 가까워졌다.

붉은 눈동자가 벽난로보다 더욱 선명하고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긴

장감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응?’

하지만, 그는 키스를 이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아리송한 얼굴로 내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이내 번쩍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 이불까지 덮이는 손길이 꼼꼼하기 그지

없었다.

“확실히 피곤해 보이기는 해. 반응도 조금 느린 것 같고. 생각해 보면 오늘

많은 일이 있었지. 이만 자는 게 좋겠다.”

……그런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팔다리가 조금 묵직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밤도 깊었

고, 내일부터는 탑 곳곳을 나다녀야 할 테니 오늘보다 훨씬 더 바빠질 거다.

‘쉬어야지.’

내가 일찍 쉬어야 카일도 조금이나마 눈을 붙일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그

리고 따뜻한 손가락 사이사이에 내 손가락을 넣어, 단단히 깍지를 끼워 잡았다.

“전하도 꼭 주무셔야 해요.”

카일이 맞잡은 손을 가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그래, 약속하지.”

*

이튿날.

‘불러오기’를 한 뒤 이상하게 피로한 몸을 이끌고 식당에 가자, 녹스가 두 사

람 몫의 식사를 차린 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죽은 사람이라는 걸 들켰으니, 음식을 굳이 먹으며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그는 투명한 잔에 가득 찬 푸른빛의 마법 약을 한 모금씩 넘기며 우리가 식사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 오늘 일정을 짜 볼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식사가 끝나면 그쪽 연구실로 올라갈 거야.”

“꼬마만?”

“그래, 나만.”

녹스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자신을 연구실에 묶어 두고 탑을 살펴보겠다

는 심산을 알아차린 듯했다.

하지만 이 마탑에 널린 게 그의 하인들이다. 내 예상대로 녹스는 말리지 않았

다.

“그나저나, 식사량을 늘리는 게 좋겠는데. 안색이 엉망이야.”

“내가?”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짜 그러냐는 물음에 카

일은 내 이마에 손을 얹어 보곤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미열이 있군. 오늘은 쉬겠나?”

열이 있었나?

좀 으슬으슬한 것 같기는 하다. 녹스가 가져다준 옷을 챙겨 입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탑의 지독한 추위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던 모양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못 움직일 만한 것도 아니고.”

카일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괜히 불성실하게 협조했다가 마탑에 머무르는 기

간이 늘어날까 싶어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내게 재차 괜찮냐고만 물었다.

나는 일부러 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진짜 괜찮다니까. 애도 아니

고, 이깟 미열 정도로.

“오늘은 살살 할 테니 걱정하지 마.”

녹스가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말 이상하게 하지 마라, 망할 마법사 놈아.

곧 식사가 끝났고, 우리가 잠시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 나는 불안해 보이

는 카일의 손을 꽉 잡은 채 다시금 괜찮아요, 하고 속삭였다. 그리고 재빨리 발

돋움해 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뗐다. 오늘따라 더 서늘하게 느껴지는 감촉이

입술 끝에 가볍게 맴돌았다.

“다녀올게요.”

카일이 내 뺨을 매만지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래, 다녀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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