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남의 햄스터가 커 보인다 (4)
기묘한 만찬이 끝난 이후, 녹스는 약속대로 낙인을 제거해 주었다. 팔꿈치 언
저리에 끈덕지게 남아 있던 손아귀 모양의 푸른 표식은 그의 가벼운 손짓 한 번
에 사라졌다.
물론, 그에게나 간단하고 쉬운 일이지 내게는 아니었다. 낙인이 타오르는 바
람에 일어난 통증은 내 생각보다 지독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어 가며 신음을 참았다. 옆에서 나를 염려하는 카일의 시선
이 쏟아지는 것을 알아서였다. 안 그래도 나 때문에 이 위험한 곳에 온 이를 더
이상 속 끓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카일은 내가 자신 때문에 참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연신 내 등을 조심스레 문지르며 달래 주었다.
“그래서…….”
한참 뒤에 내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살짝 가라앉은 채였다.
“실험에 협력하라는 거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쇼. 최대한
빨리 협력하고 각자 갈 길 가자고요. 이쪽의 대공 전하는 다방면으로 바쁜 몸이
신지라.”
“안 그래도 그걸 생각해 봤는데.”
내 안색을 힐끗 살피던 녹스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꼬마는 손해만 보고 살 성격은 아닌 듯해서.”
“잘 보셨네요. 호구처럼 퍼 주기만 하는 건 사절이거든요.”
“그래,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그렇다면 ‘등가 교환’은 어때.”
“등가 교환?”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다. 방식이 다소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녹스, 그리고 영혼이 갈가리 찢긴 루키트를 필두로 한 무법 지대의 마법사들
에 대해서 알아내기 위해 그에 걸맞은 값을 치를 각오쯤이야 했다.
내가 제 발로 이곳에 걸어 들어온 이유만 해도, 서리의 중독을 치료함과 더불
어 놈이 나를 데리고 연구인지 탐구인지를 하는 동안 북부를 공격하지 않기로
해서 아니었던가.
하지만 등가교환이라니. 이득인지 아닌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웠다. 내가 얻
는 만큼 상대가 원하는 걸 내줘야 한다는 뜻이니까.
“물론, 작정하고 다 털어 내면 곤란하니까 제한을 두지.”
나는 가만히 앉은 채 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비밀은 하루에 하나, 그리고 질문은 세 개. 질문에 대한 답은 ‘예’ 혹은 ‘아
니요’로만 가능하도록. 상대의 질문에는 반드시 사실만을 대답해야 하며, 묵비
권은 이곳을 떠나는 날까지 단 한 번만 사용 가능해. 혹은, 상대 또한 질문에 답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공평한 침묵으로 무마해도 되고.”
요컨대 얼마나 효과적인 질문을 던지느냐의 문제다. 이런 건 해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인제 와서 자신 없다고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다 좋은데, 거짓말할 수도 있잖습니까?”
잠자코 앉아 있던 카일도 거들었다.
“그래. 그쪽은 거짓말에 영 서툴러 보이지 않는데, 이쪽만 일방적으로 추궁
당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잖나.”
“내가 이렇게 신임받지 못하다니.”
녹스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짐짓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도 안 불쌍
하다, 인마. 연기는 집어치우시지.
“마법 계약서와 비슷한 마법을 걸지. 하지만 종이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고
강력한 것으로. 정보의 균형이라고, 이런 등가 교환을 위해 만들어진 마법이 있
거든.”
녹스가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흰 목덜미를 빙 두르는 가시덩굴 같은 표식이
파르스름하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안심해. 이 올가미는 일주일 정도밖에 효력을 가지지 못하니까. 교환할 정
보가 부족한 경우 통증을 느끼며, 해소하지 않으면 점점 심해질 거야. 질문에
거짓으로 대답했을 때도 마찬가지고.”
“적당히 정보만 받고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말라, 이거네요.”
“그래. 하지만 억울하게 생각할 건 없어. 꼬마, 너뿐만 아니라 내게도 씌울
거니까.”
“어디 나한테만 몰래 또 그런 걸 씌우려고.”
네 개수작에 두 번은 안 당한다. 확, 진짜. 확.
‘일주일 정도면 할 만하지 않나?’
어차피 이변 수치를 올리려면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 허락을 구하듯 카
일을 올려다보자, 그는 조금 떨떠름해 하면서도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푸른빛이 내 목을 향해 다가왔다. 불안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
다.
나는 시스템을 불러 슬쩍 물었다.
‘이거 진짜 괜찮은 거야? 일주일짜리, 맞지?’
하나하나 의심해 가며 살고 싶지는 않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무턱대고
믿을 순 없었다.
시스템이 잠시 나를 살펴보더니 안내했다.
[일시적인 저주입니다. 7일 뒤 해제됩니다.]
사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변 간섭률을 채우게 되면 자력으로 해제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맞다니 마음이 놓인다. 음험하고 위험한 놈인 건 맞지만, 적어도 사
고를 친다면 크게 치는 놈이니만큼 자잘한 건 속이려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녹스는 식사도 마쳤으니 본격적으로 연구해야겠다며 나를 연구실로 안내했
다. 거절할 이유는 없으니 물론 따라갔다.
카일은 당연한 것처럼 나를 따라왔다.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진 오른손으로
그의 손을 꽉 쥐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을 거라고 전해 주고 싶었으나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
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카일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들
며 그 뜨거운 체온을 전해 주었다.
나는 여기에 있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 줄 거라고.
그만큼 너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
차가운 실험대에 눕자, 카일은 내 머리맡에 앉았다.
수려한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물들어 있었다. 마치 녹스가 나를 죽이겠다고
몰래 선언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살짝 돌려 놈을 바라보는 카일의 표정에
적대감이 뚜렷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얼마나 남았지?”
그가 소곤거렸다. ‘불러오기’의 남은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침 먹고, 대화하느라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기적 수치가
80퍼센트를 넘겼으니, 오늘 남은 시간은…….
[앞으로 4↑↑ 뒤 ‘□□□□.’가 해제됩.’』¿¡]
그때, 철제 침대를 등지고 유리 선반에서 시약을 골라내던 녹스의 손길이 우
뚝 멎었다. 이질적인 힘을 감지한 듯, 그가 흥미롭다는 눈길로 나를 돌아보았
다.
[부적절¿한 ⒲〔〕이 ¡¡되었습니다.]
[(╯▔皿▔)╯]
[멋대로 훔쳐보지 마세요!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자고요!]
‘아무래도 우리 대화를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이럴 수도 있는 거야?’
단 한 번도 누군가 시스템과 내 대화를 보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당황
했다.
내 몸이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자, 카일이 벌떡 일어나 내 뺨을 어루만지며
이름을 불렀다.
무어라 대답하려던 나는, 눈앞을 새파랗게 물들일 정도로 한꺼번에 떠오른
시스템 창에 당황해서 입을 벙긋거렸다.
[부적절한 개입이 증가하였습니다. 적정 수치를 찾고 있습니다.]
[‘이변의 영역’ 한정, ‘불러오기’의 지속 시간이 두 배 증가합니다.]
잠깐만. 지속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난다고? 지금 기적 수치가 80퍼센트를 넘
겼으니까, 무려 열여섯 시간…….
‘대박.’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셈이다. 앞으로 적어도 일주일 동안만큼은 거의 하
루 내내 인간으로 지낼 수 있다는 거다!
나는 양손으로 카일의 손을 꽉 잡으며 눈을 빛냈다.
“전하. 저, 시간 많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설명은 이따가 자세히 해 드릴게요. 어쨌든, 열두 시간 정도 남았어요.”
그 말만으로 카일은 나에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인지 파악했다. 그의 붉은 눈
이 찬연하게 반짝였다.
우리가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 녹스가 몇 개의 약병을 챙겨 실험대로 돌아왔
다. 그러고는 내 머리맡에 작은 접시를 놓고, 신중한 손놀림으로 그곳에 마법
약을 몇 방울씩 떨어뜨렸다.
지글지글 끓는 소리와 함께 불쾌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쪽에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는 카일에게 몸을 바짝 붙었다.
“오늘은 몇 가지 반응만을 실험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등가 교환’도 기본적
인 것부터 차근차근할 테니까.”
“걱정은 무슨. 그쪽이야말로 저한테 밑천 안 털리게 조심하십쇼.”
“씩씩해서 좋네.”
녹스의 푸른 눈동자가 휘어졌다.
“그렇다면 오늘의 비밀은 내가 먼저 말할까?”
“아뇨,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첫 단추는 잘 끼워야지.
처음부터 그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그가 냅다 무
거운 비밀을 꺼내 들면 나 역시 거기에 맞는 비밀을 털어놓아야 한다는 부담감
이 있었다.
“저는…….”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인 비밀인 것. 하지만, 카일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에 괜찮은 화두.
내가 가장 먼저 털어놓을 비밀은 사실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닙니다.”
녹스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겠지.
그 역시 내가 어느 정도 예상한, 그러나 상당히 충격적인 종류의 비밀을 꺼내
들었다.
“나는 수백 년 전의 사람이야.”
나는 몸을 반쯤 일으키며 불평했다. 연기 때문에 코끝이 얼얼했다. 코를 훌쩍
거리자 카일이 손수건을 꺼내 내게 건넸다.
“그렇게 뭉뚱그리면 어떡합니까?”
“꼬마, 너도 네가 어떤 세계에서 왔는지 설명하지 않았지. 이 정도면 값이 맞
아. 실제로 내 목은 지금 아프지 않거든.”
“……그리고 이 연기 나는 접시는 대체 뭡니까? 치워 주시죠.”
“아, 그거. 잘 안 들리길래.”
도청을 도와주는 마법 약이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구박했다. 시스템, 안
부를 거거든? 어차피 네가 들을 것도 볼 것도 없다. 수작질은 그만두시지.
“질문 세 개도 이어서 말하세요. 솔직하게 대답해 드립니다.”
“그럼, 사양 않고.”
녹스가 재빨리 질문했다.
“너는 고대의 사람인가?”
“아닙니다.”
“너는 카일 블레이크를 사랑하나?”
“네.”
그 대답에 카일이 살짝 웃었다. 괜스레 귀 끝이 화끈거렸다. 그냥 당연한 사
실인데, 뭐.
“너는 나를 죽일 생각인가?”
나는 녹스를 바라보았다. 파란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볼 것처럼 강렬하게 응
시하고 있었다.
“아뇨.”
지금의 관계가 지나, 추후 그가 북부를 공격해 온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
여야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어쨌든 원하는 걸 다 얻을 때까지는 얌전히 협
조할 생각이니까.
내 부정이 온전한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 건지 올가미가 따끔하게 조여들
었다. 하지만 통증은 오래 지나지 않아 사그라졌다. 마치, 이 정도는 납득하겠
다는 듯이.
“그렇군.”
녹스가 환하게 웃으며 접시를 치웠다. 도청을 포기한 듯했다.
“이제 내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도록.”
묻고 싶은 것이야 많았다. 나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골라냈다.
“당신은 북부를 약탈할 생각입니까?”
“응.”
“당신은 오래전에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니까…… 이 성의 하인들처럼 망자
입니까?”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응.”
짧은 침묵 후, 내가 물었다.
“……당신은 ‘겨울의 심장’을 온전히 만들어 낼 생각입니까?”
녹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흥미인지 살기인지 모를 푸른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