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103화 (103/129)

103화. 남의 햄스터가 커 보인다 (3)

[이변의 영역에 진입하였습니다.]

[부적절한 개입으로 인한 적정 수치를 찾고 있습니다…….]

[해당 개입이 존재하는 동안 퀘스트는 하달되지 않습니다. 상점 이용 및 수

치 조회는 가능합니다.]

[행운을 빌어요! (ෆ`꒳´ෆ)]

나는 카일의 손바닥 위에 안착한 채 시스템 창에서 시선을 떨어뜨리고 제법

널찍한 방을 둘러보았다.

우리 두 사람이 묵기로 한 방은 그 층의 절반을 쓰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넓

었다. 벽 두 면이 책장으로 빼곡한 서재와 응접실, 그리고 벽난로가 있는 거실

은 침실을 겸하는 듯했다.

전체적으로 관리는 되어 있지만, 누군가 자주 묵지는 않은 듯 사용감이 느껴

지지 않았다.

‘잘 꾸며진 원룸 같네. 아니, 모델 하우스에 더 가깝나?’

카일은 방에 들어와서야 내 안색을 꼼꼼히 살피더니, 귀마개를 보고 조금 충

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찌직. (뭐, 왜. 뭐.)

“……언제 챙긴 거지?”

―찌이. 찌직. 찍. (오는 길에 샀다. 왜, 불만 있냐.)

“충격적으로 귀엽군…….”

카일은 금방이라도 키스를 갈길 것 같은 열렬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물

론, 가까이 오자마자 입술을 얻어맞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주접을 떨고 싶냐. 참아라, 좀!

―찍! (정신 차리시지!)

그는 내 불만을 용케 알아들은 듯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네가 너무 귀여우니 어쩔 수 없다. 걱정하지 말도록. 이렇게 있어도 바깥에

기척이 생기면 금세 들을 수 있으니…….”

말하기가 무섭게 카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재빨리 나를 가슴팍으로

당기더니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똑똑.

맥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얇은 정적을 깨뜨렸다.

문 너머의 이는 노크 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일 역시 재빠르게 칼을

뽑아 들었을 뿐 먼저 문을 열어 주지는 않았다.

“누구지?”

다시 문이 울렸다.

똑똑. 아까보다 조금 더 느긋하고 작았다. 어쩐지 섬뜩한 기분이 들어, 나는

몸을 낮추고 카일의 손바닥에 엎드렸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카일은 나와 비슷한 것을 떠올린 듯 아, 하고 작게

탄식했다. 분명히 녹스가 아까, ‘하인을 보낸다’고 했지.

“들어오도록.”

카일의 명령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흰 셔츠에 검고 긴 치마 차림의 창백한 낯빛을 띤 여인 두 명이 느린 걸음으

로 들어왔다. 손에는 깨끗한 천, 얼음이 담긴 그릇과 주전자, 그리고 장작과 성

냥 따위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기만 할 뿐, 어떤 설

명도 없이 가져온 물건을 탁자 위에 내려놓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

렸다.

나는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걸음걸이는 마치 관절이 뻑뻑한 나무 인형처럼 어색했고, 눈에는 초점이 없

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 성에서 지낸다기엔 너무 얇은 옷차림이었고, 그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난 피부에는 혈색이라고는 없었다.

무엇보다 셔츠 너머로도 새어 나오던 그 푸른빛. 명치께에서 은은하게 퍼지

는 그 빛은 분명 그들의 심장이 있는 부분에서부터 나오는 광채였다.

‘혹시, 다 죽은 사람인가?’

이번에도 카일은 나와 같은 의견을 냈다. 그가 물건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

렸다.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군.”

카일은 하인들이 문을 닫고 방에서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뻣뻣하게 굳어 있

다가, 이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물건을 살펴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물건들이었다. 가져온 사람이 수상할 뿐 물건들에는 죄가 없

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 딱 필요한 것들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카일은 양탄자 위에 손수건을 깔고 나를 그 위에 내려 두었

다.

얌전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한 뒤, 장작을 가져와 벽난로에 넣고 불을 피우자

방의 한기가 조금씩 걷혀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내친김에 주전자에 얼음 조각을 집어넣고 끓였다. 작은 찬장에서 잔과

조그만 숟가락을 꺼내, 따끈하게 데운 물을 받아 와 조금씩 떠서 내게 내밀었

다.

“몸이 얼었겠구나. 좀 들거라.”

나야 귀마개가 있어서 중간부터는 별로 춥지 않았는데. 정말로 추운 건 그였

을 것이다. 지금도 귀 끝이 불그스름했다.

하지만, 내가 따뜻한 물을 먹기 전까지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한숨

을 폭 내쉬며 카일이 주는 물을 받아 마셨다. 후후 불어 식혀 준 덕에 딱 좋았

다.

“조금만 더.”

―찍. (나만 마시냐.)

“네 몸부터 녹이고 나서 나도 마시마. 얼른.”

카일은 내가 물을 마실 때마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길로 바라보며 검지로

이마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봐요, 햄스터 안에 사람 있다니까. 그것도 장성한 이십 대 남자입니다.

하지만 나를 향한 카일의 살뜰함과 다정함이 나쁘지만은 않아서, 그래서 얌

전히 그가 하자는 대로 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물을 나눠 마신 뒤, 잠들 준비를 했다. 어느새 밤이 깊어진 것

이다.

큼직한 창에 커튼을 꼼꼼히 친 카일은 벽난로의 불을 신중하게 살핀 다음, 나

를 침대 중앙에 올렸다. 담요를 덮어 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러더니 그 옆의 바닥에 걸터앉아 칼을 가볍게 끌어안은 채 기대는 것이 아

닌가.

‘또 이 자세구나…….’

황성에서도 그랬었지. 그때와 같은 상황이 펼쳐지자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 다른 게 하나쯤은 있다.

―찍. (난 네 곁에 있어.)

카일은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알아듣지 못했을까?

그 수려한 얼굴에 잠시나마 엷은 미소가 떠올랐던 걸 보면…… 어쩌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에게 햄스터 말을 기막히게 알아듣는 재주 같은 게 생겼

는지도 모를 일이다.

*

그의 엄호 속에서 숙면한 나는 어느새 아침이 되었음을 깨닫고 무거운 눈꺼

풀을 들어 올렸다. 꿈도 안 꾸고 푹 잔 것 같은데 묘하게 몸이 찌뿌둥하다.

‘아무리 벽난로를 땠다지만, 추워서 그런가…….’

나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불러오기’를 했다. 침대가 기울자, 눈을 감고 있

던 카일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슈.”

“전하도 좀 주무세요…….”

‘불러오기’ 할 때 기본적인 옷차림인 셔츠와 바지는, 이 방에서 입기에는 조

금 추웠다.

내가 부르르 떨자, 카일은 검을 놓고 몸을 돌려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한

팔로 능숙하게 이불을 끌어다가 둘러 주더니 틈 없이 상체를 붙여 안았다.

“조금 잤다.”

“정말로 조금 잤을 거면서.”

“네 걱정이나 하지. 옷이 너무 얇아.”

“그러게요. 따뜻한 옷을 몇 벌 더 지어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이따가 녹스한

테 좀 가져오라고 합시다.”

“그래.”

그간 시스템이 말하는 ‘이변의 영역’이 뭔지 몰랐는데, 인간이 되자마자 깨닫

게 되었다. 녹스의 영향을 받은 낙인에서 무시 못 할 통증이 계속 올라왔던 것

이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카일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제법 익숙하게 제 마력을 흘려보냈

다.

“조금만 참아라. 곧 마법사에게 말해서 풀어 달라고 할 테니까.”

“그래야겠네요. 오늘은 유독 아픈 것 같아요.”

“마음 같아서는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지만…….”

“무슨 소리예요, 무슨 일 생기면 전하는 싸우셔야 하는데. 마력도 아껴 두세

요. 언제 어디서 싸울지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카일은 미안함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망토를 벗어 내게 둘러

주었다. 키 차이 때문에 무거운 망토가 바닥에 살짝 끌렸지만, 따뜻해서 한결

버틸 만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가까이했다. 이런 한가한

짓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냥, 문득 본 그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입을 맞추려던 순간…….

꼬르륵.

“…….”

눈치 없는 위장 같으니!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딱 키스 1초 전에

뱃고동이 이렇게 우렁차게 울릴 수가 있냐. 인생과 쥐생을 넘나들며 인권 같은

건 개나 줘 버린 팔자가 되었다지만……!

“푸훗.”

다행인 점은 대공 전하의 콩깍지가 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이었

다.

“그래, 어제부터 제대로 된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하다.

뭐라도 먹으러 나갈까.”

“……네.”

내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묻어나는 것을 느낀 걸까? 카일이 고개를 숙여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따스하면서도 보드라운 숨결이 광대 언저리에 닿았다가 스며들며 마음 한구

석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가자.”

문을 열고 나서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하인 두 명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

제 물건을 가져다준 그 하인들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나타난 것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수그린 채 앞서 올라갔다. 어

떤 대화도 없이 그저 앞서 걸어가기만 할 뿐이었다.

탁, 타닥, 탁.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그 몸짓을 따라 한 층 위로 오르자 널찍한 식당이 나왔

다.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듯 녹스가 긴 탁자의 끝에서 손을 가볍게 흔들

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라도 만나는 듯한 태도다.

“간밤에는 별 탈 없었나? 둘 다.”

“네, 뭐. 별다른 수작질을 안 해 주신 덕분에.”

녹스의 가벼운 손짓에 하인들이 물러났다. 곧 드르륵, 음식이 가득 담긴 하얀

수레를 끌고 오는 것이 보였다.

생기라고는 없는 이들이 나르는 따끈한 음식이라. 대체 저 음식은 또 어디서

난 건지. 이상한 것투성이였으나 딴지를 걸 기운조차 없었다.

세 명 몫의 음식이 차려졌지만, 나는 잠시 기다렸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34일 남았습니다.]

좋아. 독이 든 건 아닌 모양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고, 카일이 시험 삼아 음식을 한 입씩 먹었다. 독이 없는

것으로 확인된 그의 쟁반은 내 쟁반과 바뀌었다.

녹스는 자신이 의심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우리 두 사

람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새 포크로 치킨 커틀릿을 쿡 찍었다. 마치 만들어진 이후 제구실을 해

본 게 처음인 듯 식기에는 잔기스 하나 없었다. 얼굴이 고스란히 비쳐 보일 정

도로 매끈한 접시와 유리잔은 꼭 소꿉놀이에 쓰는 소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슴이 파랗게 빛나는 죽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식사는 맛있

었고, 녹스는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마탑에서의 첫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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