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남의 햄스터가 커 보인다 (2)
사방이 온통 희고 파르스름했다.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할 즈음부터는 하늘과
땅의 경계마저 모호하게 느껴졌다.
카일 블레이크 대공작은 주변을 빈틈없이 경계하며 천천히 나아갔다. 북방의
패자라 불리는 그조차도 함부로 들어설 수 없었던, 굳이 들어서지 않았던 황량
한 구역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상의 끝에서 왔다던 마법사는 점점 더 빠르게 걸었다. 이 차가운 바람이나
얼굴 곳곳에 달라붙는 눈송이 따위가 오히려 더욱 기껍다는 듯 경쾌하고 거리
낌 없는 걸음걸이였다.
“이쪽에 서지.”
보는 눈이 없어지니, 녹스는 자연스레 존댓말을 그만두었다.
묘하게 깔보는 기색마저 느껴졌으나 카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가리킨 동굴 안쪽의 마법진을 의심 어린 눈초리로 쏘아보다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가 설 뿐이었다.
이동 마법진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은 습하고 오싹한 느낌을 주었다. 슈가
쓰던 마법과 비슷한 색인데도 이렇게나 다르다는 게 신기했다.
왜냐하면 그의 당차고 똑똑한 연인이 제 수명마저 깎으며 둘러 주던 기적 같
은 힘에는 찬란하고 애틋한 빛이 서려 있었으니까.
카일은 주머니에 가만히 손을 넣었다. 그를 위로하듯 따스하고 보드라우면서
도 조그만 발이 제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얕은 온기에 자
그마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함께 있으니까 괜찮다. 이번에는 다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슈를 지켜
낼 것이다.
직접,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이번만큼은 반드시.
“각오가 대단해 보이는군.”
카일의 표정을 힐끗 살핀 녹스가 말했다.
“그래.”
“그렇게까지 할 만한 상대인가?”
카일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물론.”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생각보다 적어 보이던데.”
세상이 푸르게 물들어 가는 와중, 유일하게 붉은 그의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
졌다.
“그게 중요한가?”
“음?”
“글쎄. 서로에 대해 잘 안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랑할 순 있겠지.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라서.”
상관없다. 카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어쩌면 평생을 들여도 슈를 전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른 세계
에서 왔다던 그의 이질감이나 외로움을 절반 정도는 알고, 또 절반은 그저 가늠
하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그가 연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모르는
지가 아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선택했으며, 함께 있기를 바란다는 것만이 중요
했다.
그건 카일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선택이었다. 슈가 저를 위해 목숨
을 걸었듯, 카일 역시 그를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지.”
“대공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지체하지 않고.”
마법이 발동되자, 눈앞이 가볍게 이지러졌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았다. 피를 한 움큼씩 토해 내고도 버틸 수
있을 만큼 인내심에는 일가견이 있는 이였다.
영원 같은 찰나 뒤, 온 영혼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감각과 함께 어디론가
이동했다.
“…….”
가장 먼저 변화를 느낀 것은 피부였다.
갑옷을 뚫고 스며드는 한기는 잘 벼린 칼날 같았다. 북부 특유의 혹독한 추위
에 제법 익숙해졌던 그에게마저도 녹록지 않게 느껴지는 온도였다.
글자 그대로 살을 엘 듯한, 뼈에 스며드는 추위 속에서 카일은 주변을 둘러보
았다.
눈이 아플 만큼 흰 정경이었다. 하얀 눈을 빚어 만든 듯한 땅은 편평했는데,
얼음이 너무 두꺼워서인지 분명 그 아래에 있을 바다의 푸른빛이 보이지 않았
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새하얀 탑은 외딴섬처럼 그곳에 있었다. 우뚝 서 있는 그
것은 엉뚱한 마음을 먹은 거인이 떨어뜨린 것처럼 어색하면서도 압도적인 존재
감을 자랑했다.
파르스름하게 빚어낸 흰 철제 울타리는 훤칠한 사내의 키 두 배쯤 되는 높이
였다. 수백 개의 창을 세운 것처럼 이어진 그것들 사이에는 문은커녕 틈조차도
존재하지 않아서, 이 너른 세상으로부터 탑을 유리해 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카일은 긴장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주머니 속의 반려 마수를 부드럽게 어루
만졌다.
아무리 두툼한 외투 속이라고 해도 이 지독한 추위는 어쩔 수 없었는지 슈는
아까부터 가엾을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다. 감기라도 드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
울 정도였다.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카일의 손도 지금은 평소와 달리 썩 따뜻하지 않은 상태였다. 마력을 끌어 올
려 살짝 데우는 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손님을 데려오는 건 처음인데.”
앞으로 나선 녹스가 양손을 쭉 뻗어 보였다.
우아하고 한가로운 몸짓 아래, 카일과 녹스가 나란히 선 곳의 앞쪽 울타리가
느리게 녹아내리며 틈이 생겨났다.
그 너머로 성큼 들어선 녹스가 허리를 과장되게 굽히며 궁중식 절을 해 보였
다.
“서리의 마탑에 온 걸 환영한다.”
카일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를 따라 성벽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컥하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다시 생겨난 울타리의 살들이 저들끼리 맞물리
는 것이 언뜻 보였다.
마수의 소굴에 머리부터 들이민 격이다. 이제부터 바짝 긴장해야겠지. 그렇
게 생각하던 카일이 손끝으로 마력을 조금 더 움직여, 제 연인을 보듬으려던 차
였다.
“……슈?”
조그만 몸이 언제부터인가 떨지 않는다.
혹시, 추위를 이기지 못해 기절이라도 한 건가? 카일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
‘와, 미친! 추워 죽겠다!’
나는 속으로 포효하며 온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셔츠 한 장 훔쳐 입은 채 블레이크 성을 맨발로 질주한 적도 있지만, 그때의
추위는 지금에 비하면 그냥 봄날 훈풍 수준이었다.
살을 움푹움푹 깎아 낼 정도로 몰아치는 추위 때문에 그야말로 꽁꽁 얼어서
죽을 것 같았다.
‘추워 죽겠다고! 진짜로 죽겠어! 추위를 막는 아이템 같은 건 없는 거야?’
[부적절한 개입으로 인한 적정 수치를 찾고 있습니다.]
[각종 정산에 시간이 소요됩니다.]
무슨 말인데.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나 기절하기 전에 얼른 해!
[(︶^︶);;;;]
시스템이 곤란한 듯 몸을 떨더니, 이내 기적 수치가 차례로 정산되며 견과류
상점이 나타났다.
[‘서리의 마탑’에 도착했습니다.]
[원작의 이야기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등장인물, ‘녹스’에 대한 정보가 추가됩니다.]
[현재 기적 수치 85.7%]
[현재 이변 간섭률 10%]
[조율 중…….]
조금만 더 모으면 기적 수치가 90%에 달한다. 새삼스럽게 내가 정말 많은 일
을 해냈구나,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NEW! [말랑 포근 땅콩 크림 찐빵 | 기적 수치 2% 소모 | 약 3시간 동안 깊은
수면을 보장합니다. 꿀잠 추천 템!]
NEW! [아몬드 콕콕 해열 태피 | 기적 수치 2% 소모 | 열을 싹 내려 드려요!]
전체적으로 다른 아이템에 비해서 싼값이었다.
경제적이네. 마음에 든다.
하지만 지금 잤다가는 그대로 입이 돌아가든가 얼어 죽을 테고, 열이 부족한
판국이니 태피 사탕을 먹을 필요도 없다.
‘어쩌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러브러브 코너를 뒤적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급하게 추
가된 듯한 신상품이 반짝이고 있었다.
NEW! [복슬복슬 햄스터용 귀마개 | ❤x500 ← 추천!]
[슬롯 추가 완료!]
[현재 보유 현황 | ❤ x 1999]
‘……많기도 하다.’
대공 전하의 뜨겁고 넘치는 사랑 덕분에 햄스터용 귀마개를 무리 없이 구매
했다. 주머니 안이 어둡고 좁아서 생김새는 정확히 보지 못했다. 따뜻하기만 하
면 됐지, 뭐.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짧은 팔을 힘껏 뻗어, 보들보들한 털로 둘러싸인 귀
마개를 머리에 착 씌웠다.
물론, 햄스터 귀는 조금 위에 있어서 엄밀히 따지면 ‘귀’마개는 아니지
만…….
―찍. (와.)
용하다. 아무래도 마법 아이템인 모양이었다. 귀마개를 쓰자마자 뼛속까지
엄습하던 추위가 한결 나아졌다.
카일이 주머니에 넣어 준 손에 마력으로 인한 온기가 미미하게 서려 있어서
딱 좋게 따뜻했다.
나는 이제 바들바들 떨던 것도 멈추고 그의 손에 딱 달라붙어서 이 순간을 만
끽했다. 저도 모르게 얼굴에 평화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 좀 살겠네.’
하지만 아무래도 이건 지극히 내 사정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카일의 손이 대번에 뻣뻣하게 굳었다. 그의 손끝이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감
지한 것처럼 황망하게 주머니를 휘저었다.
설마, 내가 기절한 줄 아는 거 아냐?
“무슨 일이지?”
눈치가 더럽게 빠른 마법사가 재빨리 참견했다.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카
일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다.”
“어째 꼬마가 말이 없는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안전
을 책임져야 하는 의무를 지닌 몸이라.”
얼른 정신을 차린 나는 카일의 손끝을 찰싹찰싹 때렸다. 정신 차려라, 인마.
“……춥다는군.”
“낙인이 있으니 그럴 법도 하지. 잠깐 꼬마를 이리 내. 약속대로 팔에 걸린
마법을 풀어 줄 테니.”
나는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걸쳤다. ‘강화된 통찰의 눈’의 지
속 시간이 조금 남았던 것이다.
녹스는 이쪽을 향해 손을 내밀며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주머니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카일은 한 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일 하지. 숙소부터 안내해라.”
“재미없네.”
녹스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럴 리 없는데, 두툼한 주머니를 사이에 두
고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도 녹스는 더 추궁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얼음을 깎아 다진 반투명한 계단을 따라 한참 오르니, 특이하게도 탑의 정문
은 맨 아래층이 아닌 중간 즈음에 자리해 있었다.
그 아래로 탑의 절반 정도가 까마득한 계단 아래에 파묻힌 꼴이었는데, 뾰족
뾰족하게 솟은 빙산들 때문에 살벌하고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탑에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을 올라갔다. 나선 계단을 따라 수없이 많
은 층을 오른 뒤에야 스산하고 긴 복도가 나타났다.
“왼쪽 방. 둘이 사용하기에 부족한 점은 없을 거야. 조금 춥긴 해도. 원한다
면 방 하나를 더 내주겠지만…….”
“아니, 충분하다.”
나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해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그의 의견에는 동의했다.
적의 소굴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금기 사항이 따로 있나.”
녹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래층에는 내려가지 마. 상당히 춥거든. 하인들을 곧 보낼 테니, 필요한 게
있다면 그쪽으로 전해.”
“…….”
“아침에 모시러 오도록 하지.”
하얀 망령이 내 쪽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모쪼록, 무탈히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