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남의 햄스터가 커 보인다 (1)
어느새 ‘마법사의 영토’로 떠나기로 한 날이 되었다.
팔이 불편한 나는 카일과 함께 말에 타기로 했고, 블레이크 기사단은 갈 수
있는 곳까지 우리를 배웅하기로 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북부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결연한 표정이었다. 소풍이라
도 나서는 듯 산뜻한 얼굴을 한 녹스와는 사뭇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그동안 나는 책 더미에 반쯤 파묻혀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든 나를 불러내려는 망령 놈을 이리저리 피해서 카일이 가져다준 책과
서류를 살펴보았는데, 다행히도 헛수고는 아니었다.
‘루키트, 라고 했지…….’
백 년 전. 마인하르트를 떠들썩하게 했던 죽음의 주인, ‘루키트’.
그는 당대 가장 위대한 마법사로, 사실 고매한 학식보다는 잔인한 손속으로
이름을 더 널리 알린 사내였다.
루키트는 자신의 삶을 수렁에 떨어뜨린 이들에게 복수하고자 거대한 폭발 마
법을 연구했다. 세상 모든 이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다음 생을 꿈꿀 수조차
없게끔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폭발 마법의 여파로 사
라진 건 루키트가 증오하는 이들이 아니라, 루키트 자신이었다.
그렇게 루키트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영혼은 갈기갈기 찢겨, 그의 몸을 떠났
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폭발한 영혼’이라고 불렀다. 백 년이 지나자 두려움은
점차 옅어졌고, 미묘한 동정과 한심한 시선만이 남았다.
[현재 이변 간섭률 5%]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루키트는 녹스의 동료이며, 현재
갈가리 찢긴 영혼 상태로 ‘마법사의 영토’에 남아 있다.
내 생각이 맞다는 걸 증명하듯 이변 간섭률이 크게 올랐다. 나는 시스템 창을
바라보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만 하면 머지않아 100퍼센트를 채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카
일을 더 안전하게 만들 방법도 찾을 수 있겠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은 카일의 시선을 느끼고서야 끊어졌다.
나는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뭐야? 왜 저런 눈으로…….
“……쓸데없는 생각 마세요, 전하!”
불현듯 스쳐 지나간 지난날의 기억에 소리를 죽여 외쳤다.
카일은 여전히 염려가 담긴 눈으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느슨히 하며 속삭였다.
“너무 무리하지는…….”
“즈 믈쯩흡느드.”
이를 꽉 사리문 채 중얼거리며 팔꿈치로 그의 배를 꾹 눌렀다. 낮게 웃는 소
리를 뒤로하고 고개를 들자, 파르라니 펼쳐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날씨 한번 화창하다.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는 길인데.
[(˘・_・˘)]
어딘가 불만스럽고 내키지 않은 듯한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성을 나설 때부
터 이러더니, 북부로 나아갈수록 더 자주 떠올랐다.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창을 밀었다. 그래, 나도 안 내켜.
‘그나저나, 얼마나 온 거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영지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불러오기’를 해제할 때, 원한다면 영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시스템에
게 몇 번이나 확인받기는 했지만…… 묘하게 불안한 마음을 떨치기는 힘들었
다.
무엇보다 지금 몇 시간째 타고 있는 이 말. 말이 특히 문제였다. 전생에 차선
을 넘나들며 묘기를 부리던 버스를 타도 안 나던 멀미가 말에만 올라타면 기다
렸다는 듯이 올라왔다.
거기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울퉁불퉁한 땅은 물론이며 팔꿈치까지 얼어붙
어 못 쓰는 팔까지 더해지니 정말 딱 죽을 맛이었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지금 기절했다가 도착하면 일어나고 싶을 정도로…….
나는 메슥거리는 속을 애써 잠재우며 앞장서 말을 모는 녹스를 노려보았다.
그래 봤자 눈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금세 항복을 표하며 카일의 가슴팍에 기댔
지만.
“슈. 역시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머니를 살짝 두드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햄스터로 돌아오라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집부리지 말자.’
카일이 고삐를 당겨 말의 속도를 늦추고 한 손을 오목하게 내밀었다.
눈속임이 필요하겠지. 나는 이번에도 견과류 상점에서 미리 산 ‘미니미니 브
라질넛 마들렌’을 먹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기사단이 한 번도 탐사하지 않은 지역을 연속으로 살핀 덕
에 기적 수치가 조금씩 오른 터라 몇 개는 더 사 먹을 여유가 났다.
밝은 빛에 휩싸인 내 몸은 그의 손바닥 안에 무사히 안착했다.
일전에 소형화 마법임을 보여 준 덕분에 블레이크 기사단들은 다행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기하게 여기기는 해도 구태여 묻는 사람도 없고.
문제는 앞서가던 녹스가 어느새 말을 똑같이 늦추어 우리의 옆에 와 있었다
는 것이다. 나는 카일의 주머니에 들어가 몸을 푹 수그렸다. 눈도 마주치기 싫
다. 저리 가라.
“또 신기한 힘을 쓰네.”
눈을 가늘게 접어 웃은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반사적으로 검 손잡
이에 손을 뻗은 카일이 이내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길 안내나 똑바로 해라.”
“어차피 한 갈래로 난 길인데 굳이 제 안내가 필요할까요? 전하.”
“객을 맞이하는 태도가 엉망이군.”
“객은 무슨. 인질이지.”
보이지 않는 불꽃이 파바박 튀는 것 같다.
나는 주머니에서 고개만 비스듬히 내밀어, 유독 거대하게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나중에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데 지금 미리 싸워서 어디다 쓰게. 놔
둬, 놔둬.
꾹꾹 눌러 두었던 피로가 다시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저렇게 싸우는 걸 볼 바
엔 ‘불러오기’ 상태인 게 낫다.
나는 시스템을 불러 ‘불러오기’를 해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니, 해제하려 했다.
[‘불□오∝’가┌ 해제¿¿됩〈〈다¿¿.]
눈앞에 뜬 파란 창이 일그러지더니, 글자가 일그러지고 변형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자음과 모음이 뜯겨 나가듯 분리되면서 섬뜩한 문장이 떠올랐
다.
[ㅇㅣ¿¿¿게 ⇔ㅁㅝ┽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설마…… 녹스가 시스템에 개입한 건가?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그런 일이 가
능한 거야?
충격에 빠진 내가 몸을 움찔거리자, 이상함을 눈치챈 카일이 곧바로 검을 뽑
았다.
마치 그게 어떤 전쟁의 신호라도 된 것처럼 블레이크 기사단의 기사들 역시
검을 일제히 뽑아 들고 녹스를 포위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카일의 냉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녹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무슨 짓을 하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상한 걸 불러들
인 건 대공 전하의 조그만 애인이 아닌가 싶은데요.”
“슈는 수상한 걸 부르지 않는다.”
“대단한 믿음이시군요.”
“아니, 평범한 믿음이지.”
짧은 침묵 후, 그사이 안정된 시스템이 허공에 나타나 노발대발했다.
[┗|`O′|┛!!]
갑자기 누군가 끼어들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나 같아도 프로그래밍하고
있는데 누가 방해하면 주먹부터 쥐어질 테니까.
[부적절한 영향이 감지되었습니다! 간섭으로 인한 개입 허용량이 증가합니
다!]
어쩐지 화풀이하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인가.
‘개입 허용량이 증가’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정쟁 때처럼
파격 할인이라도 좀 해 주려는 모양이다.
‘적당히 좋은 거 생기면 미리 말해 줘. 이제 괜찮아졌으면 얼른 ‘불러오기’도
해제해 주고.’
나는 보수 공사를 하느라 바빠 보이는 시스템을 내버려 두고는 카일의 허벅
지를 톡톡 쳤다. 이제 괜찮다는 뜻이었다.
햄스터로 돌아오기도 했고, 좀 놀라긴 해도 바빠진 건 시스템뿐이니까.
나는 바깥 상황을 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강화된 통찰의 눈’을 꺼내 들었
다.
선글라스 너머로 주머니 밖의 풍경이 어렴풋이 보였다. 내 신호를 알아챈 카
일이 검을 천천히 거두었다.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 사이를 오가는 긴
장감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팽팽했다.
“정 애인이 걱정되시거든, 지금 꺼내서 한번 확인해 보시죠.”
꿰뚫어 보는 시선이 카일의 주머니에 내리꽂혔다.
기분 탓인가? 꼭 눈이 마주친 것처럼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녹스에게
도 투시 능력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물론, 이 꼴을 보고 별말 없는 걸 보
면…… 없는 것 같지만.
카일이 나를 보호하듯이 한 걸음 물러섰다.
“괜찮다는군.”
“그래요? 제 귀에는 안 들렸습니다만.”
“네게 들려줄 필요는 없으니까.”
녹스는 궁금해 죽겠다는 시선을 연신 던져 댔지만, 곧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
깨를 으쓱였다.
정적 속에서 차디찬 바람이 불었다. 녹스는 그 흐름을 가늠하듯이 허공에 손
을 내밀어 바람 몇 가닥을 움켜쥐었다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전하만 따라와 주셔야겠습니다.”
어느새 평야와 삼림을 넘어선 벌판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이 설산을 지나고
나면 얼어붙은 바다가 나오겠지.
누구도 직접 본 적 없는, 국경 너머의 무법 지대. 지도로만 봐 왔던 불온하고
수상한 이들의 터전.
북부의 극단에 존재하는, 마법사의 영토.
“초대장 없이는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라.”
녹스가 허락하는 곳까지만 동행하기로 했지만, 기사들은 여전히 불편한 기색
이었다. 그들은 꼭 그래야 하냐는 듯 불안한 시선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 역시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
한 뒤,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좋다. 기사단은 영지로 돌아가도록.”
“……전하.”
“여력이 생긴다면 편지를 보내마.”
그들이 일별하는 것을 잠시 기다리던 녹스가 여상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반드시 왔던 길로 돌아가. 목숨이 아깝다면 말이야.”
나는 그 말에 미묘하게 서린 악의를 애써 모른 척하며 시스템을 불렀다. 바쁘
겠지만 잠깐만. 제임스와 카일만 좀 확인해 보자.
[제임스 러셀.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일 남았습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35일 남았습니다.]
“무탈하셔야 합니다, 전하.”
“그래.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내가 명령했던 것들이나 착실하게 준비하도
록.”
“대공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깍듯하게 인사한 뒤, 멀어지는 제임스를 바라보던 카일이 가볍게 한숨을 내
쉬었다.
“가지.”
“그럼요.”
카일이 말 머리를 돌리는 순간, 내 눈앞으로 시스템 창이 줄지어 떠올랐다.
[?.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35일 남았습니다.]
[당신의 선택으로 인해 기적 수치가 소폭 증가합니다.]
[‘번복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면 기적 수치에 대대적인 변화가 생깁니
다!]
[현재 기적 수치 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