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하룻햄스터 마법사 무서운 줄 모른다 (4)
“오른팔은 좀 어떻지?”
“움직이기는 어려운데, 그래도 아까보다는 훨씬 낫네요. 아무래도 그 자식이
제가 마수일 때 팔 가지고 장난을 좀 친 것 같습니다.”
“역시…….”
“죽였어야 했다는 말은 그만두시죠. 일흔 번쯤 들은 것 같으니까. 물론, 동의
는 합니다. 다음에도 그런 개수작을 부리거든 꼭 죽여 주세요.”
카일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셔츠를 풀어냈다.
희끄무레한 피부 사이로 언뜻 드러난 푸른 멍 자국은 여전히 선명했지만, 그
래도 대여섯 시간쯤 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상태였다.
휙휙 움직일 수는 없어도 노력하면 어떻게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할 수는 있
다. 아무래도 녹스가 마력을 어느 정도 거둔 모양이었다.
나는 어깨에 힘을 주며 어떻게든 괜찮은 모습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가, 이
내 통증이 올라와 결국 앓는 소리를 냈다.
“무리하지 말고.”
“……아하하.”
카일이 인상을 찡그리더니 내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이내 그의 손끝
에서 붉은 기운이 올라오더니 내 살갗을 타고 천천히 스며들었다.
왜 갑자기 마법사를 만나러 갔나 했더니, 마력 쓰는 법을 배워 온 모양이었
다.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서 낙인을 없애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하면 일시적으
로나마 통증을 줄여 줄 수는 있다더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니냐…….’
하지만,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뼛속까지 울리던 통증이 옅어지자 훨씬 편해
지긴 했다.
나는 카일의 무릎에 걸터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양쪽 팔을 천천
히 움직여 그의 어깨에 둘렀다. 나름의 애교였는데, 다행히도 카일이 알아채고
는 눈을 살짝 접어 웃어 보였다.
“일부러 이걸 배워 오신 거예요?”
내 물음에 카일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가 아픈 게 싫으니까.”
“…….”
“그러니까…….”
큼직한 손이 다가와 내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없이 다정한 손길이었다. 본래 그의 품에서는 긴장하는 일이 별로 없었지
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경계심이 누그러질 만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놈과 최대한 얽히지 말았으면 좋겠다.”
“당연하죠.”
나는 조금 떨떠름하게 대꾸하고 말았다. 누가 들으면 내가 녹스랑 일부러 같
이 다니는 줄로 알겠네. 아니라니까.
“저도 그러고 싶은데, 그 자식이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겁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귀찮아 죽겠어요.”
카일은 대답 대신 내 팔에 마력을 쏟아붓는 데 집중했다. 해 본 적이 거의 없
는 일이었기에 효율이 떨어질 텐데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그 정성스러운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서, 나는 고개를 살짝 내리며 속
삭였다.
“제가 녹스랑 같이 있는 걸 유독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요, 전하.”
“네게 해를 끼치는 것 외에도 그놈이 네게 관심을 보이니까.”
“뭐 어때요. 저는 전하에게만 관심이 있는데.”
“알아. 믿고 있고. 그러니까 참는 거다. 하지만…….”
짧은 침묵이 흘렀다. 카일은 내 팔의 한기가 한결 가신 것을 확인하고는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어딘가 간절한 시선이었다.
“……역시, 너무 유치한가?”
본인이 질투한다는 자각은 있나 보다.
“왜 새삼스럽게 그럽니까? 태어나서 질투 처음 해 보는 사람처럼.”
“…….”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정말 처음입니까?”
카일은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 대꾸했다.
“태어나서 누굴 좋아한 게 네가 처음이니, 질투도 당연히 처음이겠지.”
“그…….”
“…….”
“……정말요?”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뺨은 물론이고 귀
까지 불그스름하게 익어 있었다.
그는 매사 진지하고 차분해서 동요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나와 관련된 일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하는 일은 없겠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져서, 퍽 가여운 얼굴로 나
를 바라보는 그가 애틋해서, 그가 이 세상의 누구보다 사랑스러워서.
“그거 잘됐네요.”
나는 아주 작게 속삭이며 이마를 맞대고, 카일의 뺨을 엄지로 느릿느릿 훔치
다가 쪽 소리 내어 입술을 맞댔다.
“저도 처음인데.”
카일이 살짝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차분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예쁜데, 아무도 눈독을 안 들였다고?”
“……어휴, 콩깍지.”
주접이 정말 수준급이다. 어떻게 날이 가면 갈수록 질리기는커녕 더하는지
모를 일이다.
타박하듯이 말했으나 그가 미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속절없이 들
뜨는 마음 때문인지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설령 있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겠어요.”
카일의 시선은 불길을 닮았다. 홧홧한 열기가 내게 옮겨붙은 것만 같았다. 뺨
과 귓불은 물론이고 목덜미를 타고 내려간 높디높은 온도가 심장을 속절없이
데우고 있었다.
“제가 좋아하는 건 전하뿐이에요.”
맹세하듯이 건넨 말에 그가 웃었다.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한들, 지
금의 그보다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서로의 숨결만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접촉이었다. 나는 마치 그에게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순순
히 눈을 감았다.
평화로운 어둠 속에서 카일은 조금 더 대담하게 움직였다.
한 손으로는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다가 뺨을 감싼 뒤 턱을 가볍게 누르고, 다
른 팔은 허리춤을 감아 두 상체를 바짝 붙였다. 굳은살과 흉터로 가득한 손이
그 부근을 자유롭게 더듬거리다가 옴폭하게 패인 등줄기를 따라 천천히 올라왔
다.
내가 입을 벌리자, 카일은 기꺼이 그 안을 파고들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농밀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나는 어느새 그의 옷자락을 꽉 쥐며 손끝을 세웠
다.
숨이 가빠져서 살짝 뜬 눈으로 번진 빛이 새어 들어왔다. 흐릿한 시야 속, 카
일이 조금 웃었던 것도 같았다.
그는 내가 다친 팔로 저를 잡는 것이 싫었는지 어깨에 반쯤 매달려 있던 오른
팔을 천천히 떼어 내고, 등을 감싸 중심을 잃지 않도록 받쳤다.
“……아.”
눈이 다시 마주쳤다.
카일은 내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눈을 뜨고 저를 바라보기만을
열렬히 기다린 것처럼.
나는 눈빛만으로 애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를 통해 배웠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아니, 오히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전해져, 온 영혼을 살
라 먹을 것처럼 뜨거웠다.
말해 주고 싶었다. 그만큼 열정적일 수는 없어도, 그래도 온 진심을 다해 속
삭이고 싶었다.
나도 당신을 좋아한다고. 나 또한 당신을 당신만큼이나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기꺼이 이 세계를…….
“전하, 잠깐…….”
그때, 몸이 뒤로 젖혀졌다. 푹신한 침대에 반쯤 파묻히고 눈앞이 어두워졌다.
온몸이 카일의 그림자에 가려진 탓이었다.
조금 당황하여 허리를 뒤채자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이마와 뺨, 눈두덩 곳곳
에 입술을 내렸다. 새가 부리로 쪼는 듯 조심스러운 모양새였다.
“안 되나?”
그의 얼굴은 나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그에 비해 목소리는 단정하고 낮았다.
다만, 그 말투에 배인 묘한 애원은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긴장한 나머지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미
묘한 망설임을 알아챈 카일은 그 와중에도 꾹 참고 기다려 주었다.
어린애가 아니니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게 될지 모
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겁도 났다.
“네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아. 약속하마.”
하지만,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다정해서. 닿은 곳부터 온
마음을 녹일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해서.
그래서 나는 차마 싫다고 하지 못했다. 싫지 않았다. 두려우면서도 기꺼워서
그의 옷깃을 붙잡아 가까이 당길 수밖에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래도 되나 모르겠어요.”
그러자, 카일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늘 생각하는 건데, 그 조그만 머리로 정말 많은 걸 생각하는군.”
“어쩔 수 없잖습니까!”
따뜻한 입술이 뺨에 닿았다. 깃털로 간질이는 듯한 입맞춤이 수차례 떨어지
더니, 이내 입술을 한입에 집어삼킬 듯 굴었다.
기분 탓이었을까? 그의 바닥 없는 갈망을 언뜻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루 정도는 괜찮다.”
아주 작은 틈으로 그 한마디가 샜다. 다급하고 간절하게마저 느껴졌다.
카일은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약빠른 구석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누가 거절할 수 있겠냐고!’
다 알면서 이러는 거지? 아니, 분명 알고 그러는 거다. 곰인 줄 알았는데, 은
근히 여우라니까.
사실 그의 말이 옳다. 하루 정도 노닥거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
다. 자료는 그에게 가져오라고 한 뒤 햄스터일 때 실컷 봐도 그만이었다. 정 안
되면 직접 마탑에 가서 알아봐도 되는 거고.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은근슬쩍 분위기를 태우는 카일이 얄미운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이를 세워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그가 낮게 앓는
소리를 삼켰다. 고통보다는 다른 감각 때문인 것 같았다.
“내일 아침에는 저 자료들을 봐야 해요. 그러니까 적당히, 눈치 있게. 알죠?”
카일이 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으며 웃었다. 귀여워 죽겠다는 태도였다.
눈치 없는 심장이 쿵쿵 박동함에 따라 함께 팔딱거리는 얇은 살갗 위로 그의
뜨거운 호흡이 머물렀다.
“응.”
“착하다.”
물론, 십 분쯤 뒤부터는 그 ‘착하다’는 말을 취소하고 싶어질 줄은 그 당시에
는 몰랐지만.
나는 얼른 팔을 휘둘렀다. 마법으로 밝혀 두었던 머리맡의 등이 눈치 좋게 꺼
지며, 침실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