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하룻햄스터 마법사 무서운 줄 모른다 (3)
이마와 뺨 언저리에 닿은 체온은 홧홧하게 느껴질 만큼 선명했다.
“서재에서 만날 줄은 몰랐군.”
카일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조금 기쁜 기색을 담아서.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갔을 텐데.”
물론 용무가 있어서 서재에 들른 건 맞지만, 구태여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
다. 나는 카일을 기쁘게 하는 선택지를 골랐다.
“전하가 보고 싶어서요.”
“…….”
물론,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만 아까보다 더욱 기뻐 보이긴 했다.
그가 내 어깻죽지에 고개를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는 지나치게 기뻐
질 때마다 숨을 고르는 습관이 있었다.
“궁금한 것도 있고.”
“블레이크 영지에 대해서?”
“음, 그건 아니고요. 영지에 대해 궁금한 건 굳이 서재로 올 필요가 없죠. 전
하께 여쭤보면 되는데.”
“그렇긴 하지. 그렇다면 뭐가 궁금할까, 내 마수학자께서는.”
“그건…….”
그때 창백한 손 하나가 불쑥 뻗어져 나와 문을 똑똑, 두드리며 능청스레 끼어
들었다.
“좋은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저도 여기 있어서요.”
안 갔냐, 망령 놈.
카일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게 말할 때와는 달리,
말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개인적인 공간이니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어라, 금지 사항 같은 겁니까? 계약서에는 안 적혀 있었는데.”
“글쎄…… 계약으로 정해 둔 사안은 아니나.”
내 이마와 뺨을 매만지던 손이 눈을 슬쩍 가린다.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내
게 날 세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쪽은 손님이고, 이쪽은 주인이라서.”
“그럼…….”
녹스가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공 전하께서 쥐고 있는 그쪽은?”
카일이 태연하게 말했다.
“모든 금기로부터 예외가 되는 유일한 존재.”
“졌군, 졌어.”
나는 손을 올려 여전히 눈가를 덮고 있는 카일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카일이 손힘을 느슨하게 풀었고, 동시에 내 왼쪽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돌렸다.
[✿(///◡‿◡///)✿]
‘나한테 잘해 주는데, 왜 네가 부끄러워하냐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카일의 표정을 살피자, 평소보다 조금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아무래도 내가 여태 녹스와 함께 있었다고 생각하
는 모양이었다.
‘그런 거 아닌데.’
카일이 마법사를 만나고 오겠다기에 기다리다가 배가 고파서 샌드위치를 먹
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저 망할 마법사가 멋대로 다가왔고, 그대로 내 뒤
를 따라온 것뿐이지만…….
“슈.”
“네, 전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무래도 대충 알고는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뭔가 서운하다기보다는…….
‘그냥 마음에 안 드는 거네.’
일종의 질투인가? 아니면, 어리광?
그 무시무시한 대공 전하께서 질투가 난 나머지 입이 댓 발로 나온 상황이라
니.
솔직히 귀여웠다. 나는 그의 뺨을 가만히 만져 주었다. 살다 살다 카일 블레
이크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날이 다 오네.
카일은 부루퉁한 얼굴을 하다가도 내 애정 어린 손길에 금세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저 내 마음 하나만 있으면 다른 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타인의 마음에 쉽게 휘둘리지 말라고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래, 아무렴
어떻겠어. 나는 그를 배신하지 않을 거고, 그런 카일의 모습이 꼴사납기는커녕
사랑스럽기만 했다.
나는 그를 적당히 달랜 뒤에 말했다.
“기왕 여기서 만난 김에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어차피 녹스는 저기서 더 들어오지도 않을 테고. 안 갈 거면 염장질이나 구경
해라. 나는 발돋움을 살짝 하고, 그의 귀에만 들리도록 소곤거렸다.
“자료를 찾고 있어요. ‘익사체’와 ‘장의사’를 조사하고 싶어서요.”
처음에는 녹스의 헛소리인 줄 알았지만, 체스보드 앞에서도 혼잣말하는 것으
로 보아 단순히 넘길 만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그가 말하던 게 북부 마법사단의 다른 존재들일지도 모르니까. ‘하얀
망령’처럼 일종의 명칭일 수도 있다.
‘게다가, 내가 저들과 비슷한 힘을 쓴다고 했지. 그런데 혼잣말이라면…….’
내가 시스템과 대화하듯이 녹스도 그 사람들과 원거리로 소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익사체’와 ‘장의사’에 대해 시스템에게 물어봤을 때, 시스템은 이렇
게 답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값입니다.]
한마디로 원작 <겨울의 심장>의 전개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존재들이라는 거
겠지. 혹은, 센과 마주칠 일이 없었거나.
하지만, 알아볼 필요는 있다. 이들의 존재로 인해 미래가 바뀔지도 모르니
까.
그들의 존재는 ‘소설’에선 조명되지 않았으나 지금 내가 숨을 쉬고, 발을 선
이곳은 단순한 소설 속이 아닌 ‘실제’이기에 사소한 것 하나라도 변한다면 충분
히 달라질 수도 있다.
“그래. 마침 나도 찾고 있었다.”
카일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단호함을 띤 채 빛나고
있었다.
그가 녹스를 힐끗 바라보더니 내게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최근 마법사에 관한 기록을 찾아봤을 때, 별다른 소득이 없었어.”
“최근 기록이 아니라, 한 세기쯤 예전 기록 같은 건 없습니까?”
“한 세기?”
“네. 더 이전이어도 상관없는데, 아무래도 구하기가 어렵겠죠?”
녹스의 나이가 세 자릿수에 달한다면 그들의 동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
다. 적어도 한 세기 전의 기록을 찾아야 쓸 만한 정보를 얻어 낼 테지.
카일은 내 말을 골똘히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법학에 관련된 거면 보존되었겠지만…… 자료를 기간별로 분류해 둔 게
아니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금지된 마법을 쓰다가 죽은 마법사라거나,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돌연 세
상에 나타났다거나, 본인이나 타인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에 대단한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거나…… 그런 이야기들 있잖아요. 마인하르트에 가십거리로 남
을 법한 떠들썩한 사건 같은 거.”
‘망령’, ‘익사체’, ‘장의사’.
그리고 그것들과 나의 공통점은 바로 ‘죽음’이다. 나는 죽음을 겪을 뻔했고,
그들의 별칭은 전부 죽음과 관련되어 있으니까.
카일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점의 문제였군. 그래, 찾아보마.”
그가 제법 기특해 죽겠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책장 앞을
한참이나 오가며 양피지 뭉치와 책, 서류 묶음 따위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나는 카일이 건넨 것의 내용을 확인하고 책상 위로 하나씩 옮겼다. 일단 시기
와 주제가 맞는 자료들만 골라낸 뒤, 자세한 건 침실에 가서 함께 확인하기 위
함이었다.
내친김에 여기서 확인하면 자료를 옮길 수고를 덜 수 있겠지만…….
“안 갑니까?”
내 심드렁한 목소리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답했다. 녹스가 서재 문가에 기
댄 채 팔짱을 끼고, 우리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그쪽이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니까 될 일도 안 되겠다고요.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것도 안 되나? 권고대로 서재 안으로는 발끝 하나 들이지 않았는
데도.”
능청스럽기 짝이 없다. 똑같이 심술을 부려도 한쪽은 귀엽고, 한쪽은 짜증 나
는 걸 보니 카일을 향한 내 애정이 얼마나 확고한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관음증이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모름지기 그런 말을 하려면 셔츠 정도는 시원하게 벗어 줘야지.”
“……뭐, 뭐요? 못 하는 말이 없어!”
내가 버럭 화내자, 책을 살피던 카일이 우리를 힐끗 바라보았다. 또 불만스러
운 기색이었다. 은근히 질투 많다니까.
나는 재빨리 카일에게 다가가, 통증이 없는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냥 빨리 갑시다. 나머지는 또 와서 확인하고요. 네?”
카일은 나를 바라보는 대신, 무심한 손길로 책 몇 권을 더 꺼내 들었다. 낡은
책은 가죽 표지 곳곳이 헤져 있었고 먼지도 조금 날렸다.
“그럴까.”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애써 아닌 척하려 해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을 거다.
이 덩치로 귀여운 건 반칙 아닌가? 나보다 반 뼘은 더 큰 주제에.
뭐, 어쨌든.
나는 그의 등에 친근하게 뺨을 비비적거리며 대답했다.
“네. 시간도 별로 없는데, 얼른 갑시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갈무리해 옆구리에
끼우고, 활짝 열린 서재 문으로 걸어갔다.
녹스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며 문가에 기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좀 도와줄까? 꼬마야.”
꼬마는 무슨 꼬마냐고 핀잔하고 싶었지만, 가까워지자 키 차이가 두드러져서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성의 없이 문밖을 턱짓했다.
“비켜 주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안 밀치고 지나간 걸로 오늘치 웃어른 공경
은 끝이고요. 어때요, 점잖죠?”
“그런 기록만으론 찾아보기 어려울 텐데.”
마치, 내가 뭘 찾아보려 하는지 뻔히 안다는 듯한 태도다.
“내게 물어보는 게 빠른데, 어때? 네가 대공작에게 하듯이 가여운 얼굴로 애
교만 부린다면 친절을 베풀 수도 있어.”
하겠냐?
하여튼, 놈은 허튼소리도 정성스럽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꺼지십쇼.”
카일이 눈앞에 없었다고 해도 내 대답은 같았을 거다. 저놈에게 애교를 부려
서 정보를 구걸하느니, 그 자리에서 혀를 콱 깨물고 만다.
시스템의 말에 따르면 이변에 간섭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지식을 수집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처음엔 조금 더디긴 할지라도, 있는 대로 정보를 모아서
읽다 보면 어떻게든 이변 수치를 채울 수 있을 테다.
나는 애써 모은 자료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팔에 단단히 힘을 주며 시스템을
불렀다.
‘이런 것들도 지식이니까, 이변 수치가 오르긴 하겠지?’
그러자, 눈앞에 파란 창이 떠올랐다.
[현재 이변 간섭률 1%]
……응? 뭐야. 어디서 1퍼센트를 채웠는데?
내가 조금 멍해진 사이, 녹스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그놈은 속이 텅 비었어. 아무것도 없지. 얼빠진 말조차도 하지 못하는 그
걸…… ‘살아 있다’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어렵겠지만 말이야.”
“…….”
“그런데도 그걸 사랑한다며 끌어안은 사람이 있었지. 내심 신기했어. 제대로
가지지도 못했는데, 손에 쥔 것이 없는데도 사랑할 수 있나? 아니, 그게 정말
사랑일까?”
몹시 이상해서 일견 엉뚱하게마저 들리는 말이었으나, 어쩐지 그가 충동적으
로 내뱉는 그 낱말들을 전부 다 기억해야만 할 것 같았다.
“꼬마야.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제가 대공 전하에게 주는 것. 그리고 대공 전하가 제게 주는 것이요.”
“…….”
“당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것 하나만큼은 명확하겠네
요.”
“음?”
“손에 넣어야만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귀한 물건을 가지듯이, 무언가를 수집하듯이 곁에 잡아 두는 건 사랑이 아니
라는 건 안다.
나는 녹스를 동정하듯이 바라보고는 홱 지나쳐 지나갔다. 평소보다 흐릿하게
떠오른 듯한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현재 이변 간섭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