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98화 (98/129)

98화. 하룻햄스터 마법사 무서운 줄 모른다 (2)

‘……갑자기 웬 체스?’

잠에서 깨어났더니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

나는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가 얼른 다시 집어넣었다. 도저히

기척을 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주머니 안에 있으니 바깥을 볼 수 없어 영 답답하다. 그렇다고 고갤 내밀 수

도 없고. 녹스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니까.

나는 하는 수 없이 아이템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강화된 통찰의 눈.

햄스터용 안경인 ‘통찰의 눈’의 렌즈를 바꿔 낀 것으로, 강화 기능을 사용할

때마다 렌즈가 검게 물들며 선글라스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 비록 모양은 좀 빠

지지만…… 어차피 내 모습을 볼 사람도 없고.

또한 생긴 것과는 달리 빛을 차단하는 용도가 아닌, 내가 보고자 하는 바깥을

투시하는 용도였다.

투시 능력을 무한정 사용할 수는 없다는 시스템의 안내에 따라 하루에 한 번,

한 시간의 제한이 있긴 하지만.

‘이거, 생각보다 좋네.’

[( ̄︶ ̄*)b]

그렇게 나는 주머니 속에서 조심히 바깥 상황을 주시했다.

신중한 침묵 속에서 둘이 놓은 체스 말은 때때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도 했

고, 벗어나기도 했으며, 완전히 탈락해 네모난 세계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녹스는 상당히 과격한 방식으로 게임을 주도했다. 그는 체스의 가장 중요한

패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킹과 퀸을 직접 움직여서 카일을 압박했다.

반면, 카일은 상당히 수비적이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최대한 어떤

말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다. 그 탓에 체크메이트의 기회를 몇 번이나 놓치

기도 했다.

“하찮은 것을 끌어안고 계시면 대의를 그르치실 텐데요.”

카일은 나이트를 옮겨 퀸의 앞을 막았다.

계속 이런 식이었다. 부득이한 순간이 오면 킹은 한 칸씩 자리를 옮겼지만,

퀸은 웬만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말인데도 그

랬다.

그러다 보니 녹스의 흰색 퀸은 조그마한 체스보드 위를 자유자재로 누비며

검은색 퀸을 압박하곤 했다. 카일은 그럴 때마다 나이트를 보내, 퀸을 지켰다.

“충성스럽기도 하지.”

녹스가 비아냥거리듯이 웃었다. 흰 퀸에 의해 마지막 검은 나이트가 쓰러졌

다.

“잘 활용하지도 않을 퀸은 왜 그리 애지중지하시나 모르겠습니다.”

카일의 엄지와 검지가 검은 비숍을 쥐었다. 광택이 돌지 않아 그림자를 뭉쳐

빚은 듯한 그것이 새하얀 퀸을 쓰러뜨렸다.

“존재 자체만으로 귀한 게 있는 법이라서. 아, 그대와는 별 인연이 없는 단어

인가? 존중과 애정이라는 건.”

“음.”

녹스는 가만히 웃었다.

그는 나가떨어진 새하얀 퀸에 어떤 관심도 두지 않았다. 게임도 꼭 저처럼 한

다. 그는 그저 남은 말을 움직여, 새카만 킹의 숨통을 끊을 순간만을 노릴 뿐이

었다.

“존중보다 생존이 먼저지요. 아무리 사랑한다고 한들, 죽어 나가떨어진 것에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검은 퀸이 쓰러졌다. 흰 룩이, 그리고 숱한 폰들이, 나이트가, 비숍이, 검고

흰 말이 점점 네모진 세계의 바깥으로 추방당했다.

새하얀 퀸이 검은 킹의 앞에 놓였다. 체크메이트였다.

그러나 녹스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기도 전, 카일이 담담하게 말했다.

“적어도 자신이 이 세상의 바깥으로 무참히 버려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겠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건 아니니까.”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방금까지 이어지던 미묘하게 팽팽한 긴장감은 그저 어

린애 장난에 불과했다는 듯 기류가 싸늘해졌다.

녹스는 그야말로 눈앞의 사내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시선을 보냈다. 카일 역

시 물러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떤 날붙이도 꺼내지 않았건만, 눈길로 상대를

수십 번씩 난도질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

내내 얌전히 있던 나는 주먹을 야무지게 말아 쥐고 카일의 허벅지를 팍팍 두

드렸다.

때마침 시스템 메시지도 떠올랐다.

[‘강화된 통찰의 눈’ 사용 시간이 종료됩니다!]

‘이제 돌아가자니까요!’

차마 소리를 낼 순 없기에 나는 팔과 다리를 연신 버둥거리며 카일의 주머니

에서 난동을 부렸다.

그가 녹스를 이길 거라 생각한 건 아니다. 카일이 마지막으로 체스를 둔 건

십오 년 전쯤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황성의 배부른 귀족들을 상대할 때나 조금 두었던 그 알량한 놀이는, 북부로

와 살아남는 일에 온 신경을 쏟아부은 뒤로는 규칙이나 잊지 않은 것이 고작이

라고.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녹스의 건너편에 앉았던 이유는 그렇게라도 해야 저

사고뭉치 마법사를 어떻게든 얌전히 매어 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겸사겸사 그

의 속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면 좋기도 하고.

내 항의를 알아챈 카일은 내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망토로 교묘하게 가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의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어 최대한 기척을 죽였다.

좋아. 이대로 무사히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카일은 그리 급하지도, 느슨하지

도 않은 걸음걸이로 등을 돌렸다.

그러나.

“전하.”

녹스의 서늘한 목소리가 카일을 불러세웠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그의 몸이

우뚝 멈추었다.

뭐, 뭔데? 왜 갑자기 부르는데? ……설마, 내가 여기 숨어 있는 걸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약속을 잊으신 듯해서.”

“…….”

“체스에 이긴 쪽이 질문을 하나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카일이 아, 하고 작게 탄식하더니 대답했다.

“그래, 그랬지. 궁금한 것이 있나?”

하얀 망령이 고개를 앞으로 살짝 숙이며 말했다.

“당신의 그 작고 발칙한 애인 말입니다.”

“…….”

“다른 세계에 속해 있거나, 다른 세계에서 왔거나,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 있

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안경의 능력이 다한 탓에 눈앞은 새카만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보이는 게

없어서일까?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댔다.

체스에서 이긴 쪽은 녹스였다. 약속했던 대로 카일은 녹스의 질문에 진실만

을 대답해야 했다.

카일이 허리를 살짝 폈다. 그의 몸이 긴장감으로 잠시 굳어졌다가 풀어졌다.

“그렇다.”

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어떻게든 더 질문을 이어 갈 줄 알았지만 돌아오

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대답을 들은 후, 녹스는 제법 경쾌한 걸음걸이로 응접실

을 나가 버렸다.

‘다른 세계라니……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카일의 손바닥 위에 올라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카일 역시 아

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녹스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요원한 일인 듯했다.

*

이튿날.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으려니 뻔뻔한 서리 마탑의 주인께서 내 맞은

편에 앉았다.

“정말 파헤쳐도 파헤쳐도 끝이 없다니까. 신선하고 마음에 들어.”

“사람을 무슨 채소 고르듯이 쳐다보시네. 당신 텃밭의 무나 감자 따위가 되

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거든요? 눈 치우십쇼.”

나는 목소리를 낮춰 으르렁거리며 손에 든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먹었다. 신

선한 양상추와 적당한 물기를 머금은 토마토가 입안에서 부드럽게 으스러졌다.

“그거 잘됐군. 씹어 먹었는데 사라지면 너무 허무하잖아.”

그는 내가 먹는 샌드위치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 가련한 토마토처럼.’ 하고

덧붙였다.

갑작스럽게 입맛이 떨어진 나는 질린다는 얼굴로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상도덕 없는 새끼.

“오늘도 정성스럽게 재수가 없으시네요.”

“칭찬 고마워, 꼬마야.”

“심술도 다양하게 부리시고요.”

끓는 속을 잠재우며 입매를 끌어 올리자, 경직된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오늘은 기사단과 상의할 게 있어서 조금 이르게 ‘불러오기’를 썼는데, 본래의

몸으로 돌아오자마자 오른팔의 상태가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마도 낙인을 자극했는데 내가 대답하지 않아서 저 망령 놈이 장난을 쳐 둔 모양

이었다.

“네가 대답을 안 하니까. 어쩔 수 없었거든.”

뻔뻔한 놈. 이 와중에 내 탓을 해? 나는 치미는 욕과 샌드위치를 동시에 꿀꺽

삼켰다.

“괜찮나? 상당히 아팠을 텐데. 평소라면 ‘진짜 손 많이 가시네요!’ 따위의 말

을 하며 내 방문을 벌컥 열고도 남았을 상황임에도 조용하더군. 마치…….”

“…….”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어제 체스에서 이기고 나서 한 질문이 그 모양이었던 모양이다.

“하아…….”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먹던 샌드위치를 정리하고서 손을 탁탁 털며 자리에

서 일어났다.

그래, 대거리해서 뭐 하냐.

저런 놈들에겐 무관심이 답이다.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속이 벅벅 긁히는 것

이 혈압 관리에도 아주 안 좋을 게 분명했다.

대답하지 말자. 대답해 봤자 내 손해다.

[(#`O′)/!]

어쩐지 오늘 ‘불러오기’ 하자마자 내가 비틀거리니 시스템이 노발대발 날뛰

더라.

어떻게 보면 시스템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었을 테니까. 잘 숨겨

놨는데 엉망으로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몇 번인가 힘이 부딪치기도 했었다.

‘그래, 그래. 나도 저놈 싫어.’

이럴 땐 우리도 뜻이 잘 맞네. 나는 시스템을 적당히 달래며 부지런히 걸었

다.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는 두 개였다. 하나는 내 것이고 하나는 그 자식이었다.

나는 부러 내 속도에 맞춰 걷는 그가 얄미워서 걸음을 늦췄다 빨리하기를 반복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재에 도착했을 때, 지친 건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마법사도 사무직 아닌가?”

“꼬마 다리가 짧은 탓이지.”

“가세요, 좀. 사람 귀찮게 하고 난리야.”

나는 묵직한 서재 문을 열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따라 들어오겠지

만 일 초라도 좀 덜 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큰 책장 앞에 서자 문이 열렸다. 나는 손으로 책등을 더

듬으며 최대한 그쪽을 외면했다.

‘가까이 오지 마라.’

서재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어 구둣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손에 잡히는 책을 아무거나 펼치고 글에 빠져든 척했다. 이러면 잠깐이

라도 관심을 끊을까 싶어서였다.

청소 후 창을 열어 뒀는지 검붉은 벨벳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며 부드러운 햇

살이 함께 들어왔다. 손등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햇살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뒤로 다가온 상대가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슈.”

일순 경직되었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긴장감이 봄볕에 녹아 가는 얇은 얼음

처럼 사르르 풀렸다.

익숙한 체온, 익숙한 감촉,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나는 몸을 뒤로 살짝 기대어 웃다가 턱을 돌려 카일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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