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97화 (97/129)

97화. 하룻햄스터 마법사 무서운 줄 모른다 (1)

“재수 없네.”

“재수 없다.”

“재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놀랍게도 녹스에 대한 나와 카일, 그리고 제임스의 의견은 한 치의 오차도 없

이 일치했다.

우리 셋은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아까부터 패키지여행이라도 온 사람처

럼 성을 돌아다니는 녹스를 바라보았다.

저 몰염치한 마법사는 카일이 그를 ‘손님’으로 대접하라는 말이 떨어지자마

자 성내 이곳저곳을 제 마음대로 종횡하기 시작했다.

블레이크 성의 벽이며 커튼, 심지어 등잔불까지 모든 사물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는가 하면, 비어 있는 방을 기웃거리고 사용인을 마주치면 친근하게 인

사를 건네기까지 했다.

그러다 이따금 허공을 보며 무언가 가늠하듯 달싹거렸는데, 거리를 둔 채 따

라가고 있었던 터라 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헛소리겠지.’

정신 나간 놈들이 허공 보고 하는 말이야 뻔하지 않나. 들어 봤자 혈압이나

오르고 속이나 뒤집힐 테다.

“그럼, 지시대로 성 밖의 경계를 더 강화하겠습니다.”

“그래. 당분간 내부에 신경을 써야 하니, 외부의 일은 맡기마.”

카일을 바라보는 제임스의 눈빛에 언뜻 측은함이 스쳤다 사라졌다. 물론, 내

눈빛 역시 마찬가지였다.

녹스를 ‘손님’으로 대접하는 저의는 알겠지만, 저런 시한폭탄을 끼고 지내면

수명이 쫙쫙 깎이고 말 텐데.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35일 남았습니다.]

나는 습관처럼 카일의 수명을 확인하고는 남몰래 안도했다.

다행히 아직까진 그저 피곤해 보이는 것뿐이지 녹스가 깎아 먹은 수명은 없

었다. 적어도 지내는 동안엔 허튼짓할 생각이 없다는 건가?

“이것저것 건드리지 말고 이쪽으로 오십시오.”

녹스가 내게 냉큼 다가오며 말했다.

“익사체가 제 몫을 빼앗아 가겠다고 질투하겠어.”

아까는 장의사더니, 이번에는 익사체냐. 하여간, 저놈의 광기는 기묘하게 구

체적이라니까.

“헛소리는 나중에 혼자 하시고요.”

그때, 카일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쪽 복도 끝방이 앞으로 네가 묵을 방이다. 필요한 게 생기면 탁자 위의 종

을 울려라. 단, 하인이 아니라 감시 중인 병사가 도와주는 것이니 자정 이후로

는 조심하길 바라지.”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 말했다.

“중요한 용무가 아니라면 방 바깥을 자주 오가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리고

방문을 지키는 병사들을 해친다면 북부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겠다.”

“음.”

“또한, 슈에게 손님 대접을 바란다면 내게도 기본적인 예를 갖추도록.”

녹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좋습니다. 블레이크 성의 법도를 따르도록 하죠. 그나저나, 고작 병사 두어

명으로는 ‘감시’가 불가능할 텐데.”

“…….”

“효과적인 감시를 붙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전하.”

놈이 과장된 몸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왜, 뭐. 왜. 팔 한쪽 제대로 못 쓰는 것도 억울한데 네놈 감시까지 해야겠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전 병사가 아닌데요.”

그러자 녹스의 푸른 눈이 가늘어지며 얄미운 미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내 오

른팔의 팔꿈치 부근에서부터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미친.”

마치 얼음으로 된 뱀이 피부를 타고 오르는 느낌이었다. 대단히 고통스러운

건 아니지만, 태연히 서 있기에는 상당히 거슬리는 감각이다.

내 변화를 알아차린 카일이 검 손잡이에 손을 얹으며 살기 어린 시선을 보냈

다.

“벌써 계약을 위반하겠다는 건가?”

“이 정도로는 ‘안전을 해친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을 듯해서.”

“…….”

“안심하시죠. 과한 장난을 칠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나섰다.

“됐습니다. 전하, 제가 틈틈이 감시할게요.”

그러자 불쾌한 냉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녹스가 이 성에서 가장 관심을 보이는 건 나다. 그러니 내가 얌전히 붙어 있

어 주기만 하면 쓸데없이 이곳저곳 들쑤시며 뒤숭숭하게 굴지는 않을 터였다.

‘닷새만 참으면 되니까.’

정 안 되면 시스템에게 부탁해서 기절 능력이 붙어 있는 아이템이라도 견과

류 상점에 들여 달라고 해야겠다.

카일의 얼굴에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으나, 내 결정에 동의했다. 그는

머뭇거리며 내 오른팔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아플까 싶어 감히 만지지는 못하

고 허공에서 주먹만 쥐었다가 떨어졌다.

물론, 그대로 두는 것이 미안하고 애틋했던 나는 왼팔을 뻗어 그의 등을 가볍

게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며칠만 견디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전하.”

내 말에 카일이 낮게 읊조렸다.

“……역시 죽여 버렸어야 했다.”

이때만큼은 나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대공 전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상대도 살뜰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피의 대공작’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블레이크 성의 주인은 차갑고 권태로

운 표정으로 체스보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녹스의 요청에 따라 그 건너편에 몸을 내리기는 했지만, 손님을 딱히 반가워

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 태도는 일견 오만하게마저 느껴졌다.

“저와 이런 시답잖은 놀이를 하실 만큼 한가하실 분은 아닌 것으로 사료되는

데.”

녹스의 매끄러운 목소리에 카일의 붉은 눈동자가 상대를 훑었다.

새하얀 옷을 입은 푸른 눈동자의 남자. 희고, 섬뜩하고, 잔인한 마법사를 바

라보는 그의 시선은 조금도 곱지 않았다. 계약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당장 일

어나서 검으로 남자를 두 동강을 내고도 남았을 정도로 살벌했다.

“그대가 불러오라던 이는 지금 바빠서.”

“공교롭군요.”

“공교롭지, 무척이나.”

정확히는 햄스터가 된 상태로 카일의 겉옷 주머니 속에서 자고 있다. 녹스가

슈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그 부름에 반드시 응해야 할 필요는 없으

니까.

푹 자고 카일이 침실로 돌아올 때쯤 깨어날 테다. 그가 바라마지않던 대로.

체스보드 위의 검고 흰 말들이 제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가운데 싸늘한 침묵

이 흘렀다. 녹스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고민했다.

이내 답을 찾은 듯, 찾지 않은 듯 그의 입가에 묘하게 삐딱한 미소가 걸렸다.

“음, 신기하군.”

그러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얼굴 가득 차오른 호기심이 넘치다 못해 아래

로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카일과 슈를 데려가기 위해 닷새간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그중 이틀이

흘렀다. 녹스는 진귀한 음식을 숙성시키듯 느긋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 얌전히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흥미를 가장 크게 불러일으키는 슈가 제 곁에 붙어 있기를 바랐

다. 물론 슈는 곁에서 고분고분 기다려 줄 이가 아니었고, 그는 그래서 더욱 슈

가 마음에 들었다.

지나치게 나 몰라라 한다 싶을 즈음엔 오른팔에 남겨 둔 낙인을 자극하기만

해도 이내 펄펄 뛰며 침실까지 찾아왔다. 혹은, 눈을 시뻘겋게 뜬 대공작이 대

신 나서거나.

하지만, 방금은 고요했다.

낙인을 제법 크게 움직였으니 고통이 꽤 심했을 텐데도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전해지지 않았나? 아니, 그건 아니다. 녹스의 마법은 언제나 완벽하게

그의 통제와 지휘를 따랐다.

“상대가 마법을 느끼지 않아.”

저번에도 그랬는데.

녹스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낭랑한 목소리

가 직접 울려 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망령, 네 주특기가 통제를 벗어나기라도 했다는 뜻이

야?]

“마법은 여전해.”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제 말했던 그 ‘꼬마’ 때문이지?]

“그래.”

녹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을 스치며 흘러 떨어졌

다.

[말도 안 돼.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라도 했다는 거야?]

“다른 세계…….”

[그나저나, 서리 탑을 너무 오래 비우지 마. 중요한 일을 앞두고 왜 이러는

거야?]

“네 말이 옳아, 익사체.”

녹스의 미소가 선명해졌다.

카일은 거의 들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는 녹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수십 마리의 마수를 눈앞에 두었을 때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

길로 눈앞의 마법사를 탐색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원수.

북부의 적.

그리고, 슈를 위협하는 이방인.

그의 달싹이는 입술로부터 한 개의 단어를 읽어 낸 카일이 그것을 잡아채듯

이 발음했다.

“익사체.”

“…….”

“그건 누구지? 동료인가?”

녹스가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던 눈길이 단정하고 차

가운 외모의 대공작에게 고정됐다.

“너무 깊이 알려고 들지 마시지요, 대공 전하.”

“알려 줄 수 없단 건가?”

카일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것치고는 선 안에 슈를 들일 마음이 만만해 보이더군.”

“오, 질투?”

“경계와 거부라고 해야 옳겠지.”

제 연인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저는 별난 것을 좋아하거든요.”

녹스의 손끝이 줄지어 선 새하얀 폰 중 가장 왼쪽의 것을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전하의 그 조그만 꼬마는 마치 이 세계에서는 안 맞는 퍼즐 조각인

것 같아서.”

날카로운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녹스는 이글거리며 끓는 붉은 눈동자 앞에서도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

히려 집요하리만치 그 사이에 있을 틈을 찾아 헤맸다.

“그 귀엽고 발칙한 꼬마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내 슈는.”

카일이 그의 말을 가로채 정정했다.

“안전한 곳에 있지.”

“…….”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

“더 궁금한 것이 있나?”

“있다고 해도 알려 주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물론.”

“그렇다면, 이렇게 할까요?”

녹스가 그 폰을 쥐어 한 칸 앞으로 보냈다.

“단판 승부를 보죠. 이기는 쪽이 진 쪽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할 수 있으며,

진 쪽은 진실만을 대답해야 합니다. 어떠십니까?”

카일은 대답 대신 자신의 폰을 앞으로 한 칸 보냈다. 그의 맨 오른쪽에 있던

것으로, 한 걸음 성큼 나아간 검은 폰은 마치 앞서 싸우듯 앞에 놓인 흰 폰을 노

려보았다.

“좋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