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96화 (96/129)

96화. 햄스터 잡으려고 북부 태운다 (4)

어딜 같이 간다는 거야, 이 위기감 없는 북부 대공 양반아!

나는 그의 손을 힘주어 쥐며 말했다.

“전하, 노파심에 여쭙는 겁니다만……. 이 땅의 영주가 누군지 잊으신 건 아

니죠?”

그러자, 녹스에게 등을 지고 선 카일이 태연하게 대답해 왔다.

“내가 없어도 북부가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한 건 누구였지?”

“…….”

이렇게 되물어 오니까 또 할 말이 없네.

원작에서는 카일의 죽음 이후, 블레이크 영지는 빠르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물론 내가 빙의한 이후로 운명이 바뀌었고, 카일은 예정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

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언젠가 카일은 죽을 테고, 영주가 사라진 뒤에도 이곳의 삶은 이어질 거다.

어느새 나도 이곳에 정들어 버렸으니, 그들이 어떻게든 계속 살아가기를 바라

게 됐다.

카일이 없어도 북부의 안녕은 이어져야 한다.

그건 이 척박한 땅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숙제 같은 거였다. 그리고 카일은 이

거대한 문제를 제법 괜찮게 해결하고 있었다.

“그동안 영지의 제도를 정비했고, 각 분야에 알맞은 인재를 배치했다. 내가

영지를 떠나면 외부 방비가 허술해질 우려는 있다만…….”

그가 퍽 진지하게 덧붙였다.

“한 달 정도는 괜찮을 거다.”

우리가 제법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녹스는 제 존재가 무시당하고 있

다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우리를 마음껏 구경했다. 가늘게 뜬 눈동

자에서는 푸른 이채가 일렁거렸다.

“사랑하니까 어디든 함께 간다, 라…….”

“…….”

“상당히 괴상하기는 해도, 뭐. 장의사보다는 낫군. 좋아.”

장의사는 무슨 장의사. 이상한 소리 하고 있어.

나는 카일을 탁자로 이끌었다. 최대한 긴장한 내색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입꼬

리를 한껏 끌어 올린 것은 덤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협상을 시작해 볼까요?”

*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어떻게든 의견은 모아졌다.

기한은 한 달. 나와 카일은 녹스가 머무르는 곳, ‘서리의 마탑’에서 그의 연구

를 돕기로 했다.

그동안 북부 마법사단은 우리 두 사람은 물론이고 영지를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그 대가로 나는 녹스의 탐구에 더욱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조건

을 승낙했다.

그리고 카일은 내가 녹스의 허락 없이 마탑을 떠나지 못하게끔 하는 일종의

인질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카일이 절대로 물러나지 않

았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죽을 수도 있다. 북부가 취약해질 수 있다. 온갖 설득을 해 봤지만 그는 꿈쩍

도 하지 않았다.

“피의 계약을 하지.”

피의 계약. 고대 마법의 일종으로, 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약속’이기도 했

다.

카일의 제안을 따라 우리는 마법 계약서에 서명했다. 약속을 어기면 정도에

따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저주가 걸려 있지만, 녹스는 눈 깜짝 않고 칼로 자

신의 팔뚝을 베어 붉은 피를 떨어뜨렸다.

그다음으로는 카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내 차례였다.

「첫 번째, 녹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슈의 안전을 보장한다. 또한, 마탑에 도

착하는 즉시 서리의 중독 증상을 해결한다.」

계약서를 꺼내자마자 카일이 적어 내린 첫 번째 구절에는 자신의 안전도 아

닌, 나에 대한 내용만이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 그때의 그는 마치 제 목숨을 확

인받는 사람처럼 비장해 보였다.

카일의 진심 위로 내 피가 몇 방울 떨어졌다. 계약서에서 빛이 나는 것을 확

인한 카일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손등을 재빨리 지혈했다.

그사이 녹스는 색색으로 빛나는 마법 계약서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

았다.

얇은 양피지는 처음에는 싸늘한 푸른빛으로 반짝였다가, 그다음에는 카일의

눈동자를 닮은 붉은색으로 일렁였다. 그러다가 내 피를 흡수한 다음에는 다시

파르스름하게 빛났는데, 놀랍게도 그 빛은 녹스의 피를 막 머금었을 때 뿜어지

던 빛과 거의 비슷했다.

“신기하단 말이지.”

맑게 빛나는 푸른 광휘를 바라보던 놈이 감탄조로 말했다. 호기심과 놀람이

섞인 모양새였다.

“꼬마, 너는 극단의 땅에 살지도 않고 죽음을 겪어 본 적도 없을 텐데 어떻게

우리와 비슷한 힘을 쓸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욱 순수

해.”

죽음이라면 나도 겪어 봤는데. 물론, 말해 줄 생각은 없지만. 나는 녹스가 내

키는 대로 지껄이도록 놔뒀다. 그래, 이 자식아. 착각도 자유고 독백도 자유다.

녹스는 사뭇 황홀한 것처럼 제 창백한 뺨을 손으로 감싸며 수줍게 말했다.

“너는 우리가 찾아 마지않던…….”

“저기요. 잠깐, 잠깐. 그런 징그러운 얼굴 들이대지 말아 주실래요?”

변태 자식 같으니. □□□년 동안 어떤 해괴한 삶을 살았는지 관심 없으니까,

그 이상한 사고 회로에 날 끼워 넣지 마라.

‘비키라니까!’

카일이 쳐다보잖아! 금방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어 하는 표정이라고!

이후 카일은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제임스를 불러 계약서를 전달하고, 당분

간 북부를 떠나게 됐다는 뜻을 짤막하게 밝혔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준비할 것

이 많으니, 녹스가 닷새 정도 이 성에서 머물 거라는 이야기도 함께.

제임스의 표정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썩은 햄으로 따귀를 얻어맞은 사람처

럼 얼굴이 붉어졌다가, 이내 심각한 걱정에 시달리듯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변

화무쌍한 모습을 보니…… 솔직히 조금 불쌍할 정도였다.

“대공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나는 제임스가 나가기 전, 시스템을 불러 재빨리 그를 살폈다.

[제임스 러셀.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일 남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임스도 원작보다는 오래 살게 됐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뿌듯하다.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위기를 한 번 무사히 지나온 셈이니

까.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35일 남았습니다.]

카일은 0일에서 35일로 늘었다. 녹스는 이 협상이 결렬되면 카일 정도는 죽

이고 사라지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또다시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속을 쓸어내리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녹스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안 그래?”

“너무 오래 살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매정하긴. 그래도 한 달은 꼬박 함께 지내게 됐는데, 성 안내도 안 해 줄 건

가?”

나는 기가 막혔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설마, 진짜 이 성에 초대된 손님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녹스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손님 대접이 엉망이군. 영주의 역량을 알 만해.”

“이…….”

내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이 개자식,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가 재수 없는 건 둘째 치고 어쨌든 손님은 손님이다. 작위도 없는 내가 녹

스를 함부로 대하면 꼬투리 잡히기에 좋았다.

내가 비난당하는 거야 상관없다. 하지만, 내 존재가 카일의 명성에 흠이 되는

건 싫었다.

엿 같네, 진짜.

“좋습니다. 그럼…….”

말꼬리에 ‘다나까’ 좀 붙여 준다고 혀가 닳는 건 아니니까. 물론, 불쾌함은 별

개의 영역이다.

내가 이를 박박 갈며 그에게 성을 안내하려던 차였다.

“내가 해 주지.”

카일이 살벌한 기세로 다가와 나와 녹스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애꿎은 녀석은 괴롭히지 말고 이쪽으로 와라, 마법사. 성을 한 바퀴 가볍게

돈 뒤 숙소까지 안내하겠다.”

빌어먹을 망령 놈이 빙그레 웃었다. 정말이지,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만큼 얄

미운 미소였다.

“네 애인은 독점욕이 굉장해 보여, 꼬마.”

나는 그를 쓱 지나쳐 갔다.

“아니죠. 그냥 미친…… 아니다. 큼. 어쨌든, 위험한 상대로부터 소중한 사람

을 떼어 내기 위해서 보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

니까, 남의 연애사에 신경 끄시고.”

녹스가 회의실을 앞장서 나가자, 카일이 내 어깨를 감싸 제게 가까이 당기며

걱정스레 속삭였다.

“슈. 정말로 괜찮겠나?”

오로지 나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그 음성은 오늘도 낮고 다정했다. 이렇게 냉

엄한 얼굴을 한 주제에 내게만 어쩔 줄 몰라 한단 말이지. 솔직히 조금 감동적

이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웃어 주었다.

“오히려 잘됐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음?”

“아.”

뭐지. 너무 어려운 사자성어는 자동 번역이 안 되는데? 그렇지 않을 텐데?

[<(=.=)>zzZ]

그냥 직무 태만이잖아!

“슈?”

“아, 아뇨. 뭐…… 어쨌든 북부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불안해하기만 하는 것

보다는, 직접 알아내는 게 더 나으니까요. 그리고 자세한 건 나중에 따로 이야

기드리겠지만…….”

나는 녹스의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속삭였다.

“녹스에 관해 조사하다 보면 마법사단에 대항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몰

라요. 저놈의 말에 따르면 제가 가진 힘과 놈들이 가진 힘이 비슷하다니까요.”

카일은 손을 맞잡은 채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기적’ 수치나 ‘이변’ 수치에 대해 정확히 말한 적도 없는데, 그는 내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널 희생하는 방식이라면 동의할 수 없다.”

“…….”

희생은 아니지만, 나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 반박할까 하다가 그만두었

다. 카일에게 그 두 개는 별다른 차이 없이 느껴질 것이다.

“지금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게 방법을 찾아봐야죠.”

나는 달래듯이 말하며 씩 웃어 보였다.

“북부 마법사단과 로렌츠가 뭘 위해서 손을 잡았는지도 알게 될지 모릅니다.

분명히 로렌츠가 저 빌어먹을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을…… 이크, 여기 쳐다본

다. 나중에 방에서 얘기해요!”

녹스가 이쪽을 돌아보자 나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이어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자 카일도 표정을 얼른 갈무리했다.

그는 여전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짙은 눈썹을 모은 채였지만, 맞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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