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95화 (95/129)

95화. 햄스터 잡으려고 북부 태운다 (3)

착각할 수도 없을 만큼 노골적인 살기가 피어올랐다.

녹스의 매끈한 미소는 꼭 그림으로 그린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이 낯설고 이

상하게 느껴졌다.

놈은 친절하게 웃는 낯과 흥미가 뚝뚝 떨어지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

시에 내 숨통을 끊어 버리고 싶어 했다. 그것도, 제법 진심을 다해서.

그 불길한 예감을 증명하듯 녹스가 입을 열었다.

“고삐 없는 말에 오르는 취향은 없는데. 차라리 지금 죽여서 데리고 갈까?”

아니, 저기요. 더 나쁜 취향이 있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그래. 처음으로 옳은 말을 하는군. 지금 죽이는 게 좋겠어.”

그러더니 순식간에 검을 뽑아서 녹스에게 겨누었다.

자르랑.

쇠붙이 특유의 서늘한 소리에 주변의 분위기가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다리

를 꼬고 건방지게 앉은 녹스도 새하얀 비수 몇 자루를 불러, 제 주변을 호위하

듯이 띄워 두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둘 다 지금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는 양 상대를 섬뜩

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녹스야 원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니 그렇다 치고, 카일은 대체 왜?

“……자, 잠깐만요. 전하. 이러면 기껏 협상하겠다고 자리를 마련한 의미가

없잖습니까.”

“협상?”

카일이 산뜻하고 살벌하게 웃어 보였다.

“마법사단 놈들을 상대로 협상한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저놈

목을 탁자에 올려놓으면 그게 협상이다.”

은근히 막 나가시네.

그런데 나로서도 마법사 놈들이 설치는 걸 본 적이 있다 보니, 저 말이 제법

그럴싸하게 들렸다. ……아무래도 애인 따라 물들었나?

한편, 녹스는 새하얀 비수를 빙글빙글 돌리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듯하더

니 손을 허공에서 한 바퀴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희고 서늘한 빛이 펑 터져

나가며 섬뜩할 정도로 예리하던 무기가 자취를 감췄다.

그 광경에 감탄할 사이도 없이, 혈색 하나 없는 녹스의 손이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큭.”

동시에 어깨를 타고 한기가 흘렀다. 싸늘하고 불쾌한 감각이 혈관을 타고 흐

르며 닿는 모든 걸 긁어 대는 것 같았다.

내가 허리를 숙이며 숨을 삼키자, 카일이 다급하게 다가와 어깨를 받쳐 안았

다.

“슈, 왜 그러지?”

“…….”

온몸을 휘감는 한기에 나는 대답 대신 부르르 떨었다. 저도 모르게 이가 딱딱

부딪치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서리의 중독’. 하필이면 그 낙인을 남긴 당사자가 눈앞에 있었다. 그는 지금

껏 이런 식으로 마법을 활용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는 듯 흥미롭게 눈을 반짝이

며 손끝을 휘둘렀는데, 그럴 때마다 오른팔에 고여 있던 냉기가 꿈틀거리며 나

를 괴롭혔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불가능했다. 결국, 악문 입술 새로 앓는 소리가 샜다.

카일은 내 팔에 감히 손도 대지 못하고 쩔쩔맸다. 다만 심상찮은 분위기가 느

껴지는 걸 보니, 분명히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 있을 거다.

“팔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카일이 이를 갈며 녹스를 바라보았다.

“검을 집어넣어, 대공.”

녹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곳에 있는 어중간한 놈들로는 치료할 수 없는 낙인이었을 테니 남아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요긴할 줄은. 그동안 난 뭘 살려 두는 성격이 아니었

거든. 그런데 지금 보니까 새로운 실험을 해 봐도 되겠어.”

나는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몸을 옹송그렸다.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주저

앉은 채, 속으로 이를 갈며 시스템을 불렀다.

‘어떻게 좀 해 봐! 무슨 인질이라도 잡힌 것처럼 이래야겠어?’

[((((o(≧口≦)o;;;]

시스템이 초조하게 동동거렸다.

물론, 바뀌는 건 없었다. 팔은 여전히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고, 끙끙거리

는 나를 보던 카일은 이제 금방이라도 녹스를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으며,

놈은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검을 쥔 카일의 손이 떨렸다. 당장 달려들고 싶지만, 내 팔에 낙인이 찍힌 이

상 쉽사리 나설 수 없다는 듯이.

[현재 녹스의 마법에 간섭할 수 없습니다.]

[기적과 같은 힘, ‘이변’에 간섭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수치가 필요합니

다.]

[‘이변’에 간섭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지식을 수집해야 합니다.]

[현재 이변 간섭률 0%]

그때, 시스템이 창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변 간섭률이고 나발이고, 중요한 건

지금 상황에서 아무 쓸모도 없다는 거다.

내가 카일의 품에서 발버둥 치기 시작하자, 그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그만둬!”

녹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그만두길 원한다면 검을 집어넣어, 대공. 간단한 문제야.”

카일은 이를 갈면서도 오래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검을 검집에 밀어 넣

었다. 여전히 살기등등했지만, 어쨌든 녹스의 말대로 한 셈이었다.

“그래 봤자 팔 하나 잘릴 뿐인데.”

“…….”

“사랑하니까 지켜 주겠다, 그런 건가? 눈물겨운 순정이로군.”

그제야 고통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나는 재빨리 손등으로 눈가를 훔쳐 뿌옇

게 흐려진 시야를 닦아 내고는 고개를 들었다.

“……집어치워, 이 낙인인지 뭔지 하는 거.”

내 말에 녹스가 몸을 일으켜 천천히 다가왔다.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카일

이 재빨리 내 앞을 막아섰다. 키는 비등비등했지만 덩치는 카일 쪽이 조금 더

컸다.

나는 카일의 등 뒤에 어정쩡하게 숨은 채 어깨 너머로 녹스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내게 향해 있었다. 꼭, 속을 파헤치는 듯한 시선이었

다. 놈은 나만큼이나 나와 카일의 관계에 흥미를 가진 듯했다.

“‘서리의 중독을 치료’하고 싶어?”

“당연한 거 아니냐?”

“그렇다면 나를 따라와.”

녹스가 산뜻한 말투로 대답했다.

“내 마탑으로 온다면 치료해 주지. 후유증 따위 없이, 깔끔하게.”

내 대답보다 카일의 으르렁거림이 더 빨랐다. 그는 어찌나 화가 났는지 흰자

위의 실핏줄이 터져, 눈 전체가 불그스름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난 약속을 지켰어. 그것도 제법 성실한 방식으로. 전하, 지금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전하 뒤의 그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애인 되시는 분이거든

요.”

조그…… 뭐? 사랑…… 뭐라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 버럭 소리쳤다.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말고!”

사납게 외치기는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낙인을 없애지 못하면 여러모로 번거로워질 거다. 한쪽 팔을 전혀 쓰지 못할

테니 행동에 제약이 있는 건 당연하고, 이런 식으로 녹스가 나를 쥐락펴락하면

내가 카일의 약점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를 따라가서 이 중독 현상을 해결하고 ‘이변’ 수치를 올린다면……. 언젠가

마법사단과 북부가 정면충돌하게 될 때, 내가 그들의 마법에 간섭하여 카일에

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전하.”

나는 카일의 등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안 돼.”

아직 별다른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카일은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네 말은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지만, 그것만큼은 허락할 수 없다.”

“…….”

“이번에도 내가 보는 앞에서 널 보내라고? 그것도, 저 미친 작자에게? 나는

네가 없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알지도, 하지도 못한 채로 내 무력함을 깊게 통

감하겠지. 네 안전을 그저 기도할 수밖에 없어서.”

카일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내 왼쪽 어깨를 짚으며 인상을 살

짝 찡그렸다.

“내게 너무 잔인한 처사라 생각하지는 않나?”

“……전하.”

죄책감이 숨통을 콱 막는 기분이었다.

미안해진 나는 잠시간 머뭇거렸다. 그러다 시선을 조금 들며 시스템을 불렀

다.

‘시스템, 이변 간섭률이 100퍼센트가 되면 어때? 녹스가 건 ‘서리의 마법’을

해제할 수 있어?’

그러자, 우리 두 사이를 가로막듯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가능합니다.]

‘저 비수 같은 걸 못 쓰게 가로막는 건 어때? 그것도 가능해?’

[가능하지만, 추가로 행운 수치가 필요합니다.]

안 되지는 않는다는 거네.

행운 수치와 이변 수치, 그리고 기적 수치를 올리면 녹스를 해치울 방법이 있

다는 거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

카일은 결코 약하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북부를 떠받치는 힘

이라고 한들 무적은 아니다. 특히 지금의 녹스는 주기적으로 그의 생명과 북부

를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0일 남았습니다.]

나는 초조한 속을 힘겹게 달랬다.

이 협상이 결렬된다면 카일은 죽게 된다. 녹스의 손에 의해서.

그렇다면 역시 이번에도 녹스를 따라가는 게 좋겠다. 한동안 그의 장단에 맞

춰 주면서 마탑의 정보를 속속들이 빼내고, 이변 수치를 올려 시간을 벌어야 한

다. 그리고 그들이 본격적으로 북부를 공격할 것 같을 때 다시 돌아오면 되니

까.

나는 다시 한번 시스템을 불러 확인했다.

‘다른 곳에 며칠 더 머무르더라도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지? ‘불러오

기’를 해제한다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을 때도, 녹스의 곁에서 도망쳤을 때도, 북부에 있는 내

방과 10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을 때도 ‘불러오기’를 해제해 돌아올 수 있었다.

‘일종의 편법이긴 하지만, 두 번이나 했으니 세 번이라고는 못할 것 없잖아.’

[(  ̄︿ ̄)=3]

‘가능하지? 가능하잖아!’

파란 불빛이 깜빡거리는 게 꼭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가능합니다.]

좋아. 그럼 돌아올 길은 마련됐고.

나는 비장한 얼굴로 카일을 마주 보았다. 그는 시스템과 대화하느라 시시각

각으로 변하는 내 표정을 내내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봐도 안 된다, 슈.”

기분 탓이었을까? 카일은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저는 무사할 겁니다, 전하.”

“네 팔이 방금 어떻게 되었는지 잊었나?”

나는 카일의 어깨 너머로 녹스를 째려봤다. 저 개자식. 하여튼, 도움이 안 돼

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로서는 다 알 수 없다. 너는 영민하고, 때때로

나보다 몇 걸음씩 앞서가곤 하니까. 네 판단이 정확하고 현명한 편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그러니…….”

“…….”

“네가 간다고 하면, 정말로 가야만 하는 상황일 테지.”

알긴 아네.

나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에게 살짝 웃어 주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다음

말로 인해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렇다면, 같이 가자.”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