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햄스터 잡으려고 북부 태운다 (2)
그날 오후, 성을 시끄럽게 만든 존재는 뻔뻔하게도 노크 한번 없이 발을 들였
다. 그 특유의 재수 없을 만큼 한들한들하고 여유작작한 걸음걸이로.
남몰래 숨어드는 것보다야 찾을 수고를 덜어 좋다지만, 계단을 성큼성큼 뛰
어 내려가자마자 본 낯짝이 허여멀겋게 웃고 있으니 심사가 비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혹여 내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뒤에서 따라오던 카일도 녹스를 보자마자
인상을 구겼다. 정작 북부의 한설만큼 새하얀 그 남자는 태양도 불살라 먹을 듯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 퍽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초대한 적도 없는데 잘 찾아오셨네요.”
내 불친절한 인사에 녹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말씀을. 먼 길 오느라 수고 좀 했지.”
“안 오셔도 좋을 뻔했는데.”
“아하하. 찾아오라고 인사도 없이 떠난 것 아니었어?”
“하하하하! 그럴 리가요! 그리고, 누가 인사를 안 했어요? 분명히 했습니다
만?”
그래! 분명히 했다. 아주 재수 없는 표정을 지어 주면서 “넌 날 절대 못 잡
아.” 하고 날려 줬잖아!
그리고 내 팔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지. 능구렁이 같은 자식. 서로를 향해
웃음을 터트리는 녹스와 나 사이에 날카로운 불꽃이 튀었다.
나는 그를 그야말로 샅샅이 파헤칠 듯 노려보았다. 빙글빙글 웃는 그 남자는
내 시선의 의도를 읽었음에도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리 쳐다본들 알 리가 없다는 도발 같았다.
‘진짜 열 받네.’
내가 속으로 울분을 터트리자, 시스템이 다급하게 떠올랐다.
[(((φ(◎ロ◎;)φ)))]
왜 네가 더 안절부절못하냐.
때마침 병사들에게 무어라 지시하던 카일이 내 곁에 와, 나를 숨기듯이 가로
막고 섰다.
“목적을 말해라.”
카일이 냉담하게 말했다.
녹스는 수상쩍게 웃으며 반쯤 가려진 나를 바라보다가 카일에게로 시선을 옮
기며 입을 열었다.
“영주와 협상을 하고 싶은데.”
협상.
그게 그렇게 껄끄러운 단어인 줄은 처음 알았다. 물론 광산에서의 태도를 생
각하면 그렇게 신사적일 수가 없는데, 그 협상이라는 것을 빌미로 무엇을 요구
할지 알 수 없으니 다 가식이며 위선으로 느껴졌다.
카일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 듯 잠시 인상을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 그러나
다짜고짜 박대하기보다는 그의 협상을 들어 보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이내
스산하리만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라.”
아무도 반기지 않았건만, 그는 마치 극진한 대접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허리
를 숙여 보이며 웃었다.
“그러지요, 전하.”
*
네모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카일과 내가 같이 앉고, 그 맞은편에 녹스가 따
로 앉았다.
미리 데워 놓지 않은 접객실은 약간 서늘하고 또 쌀쌀했는데, 비단 방의 온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에게서 흐르는 냉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리를 잡자마자 시스템에게 요청했다.
‘뭐 알려 줄 만한 정보 없어?’
시스템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녹스. 무법 지대의 주인. 하얀 망령. 서리의 마탑을 정복한.]
[세계의 끝에서 태어난 것. 규율을 어기는 자들.]
아니, 그거 말고. 그건 예전에 이미 알려 줬던 거잖아. 새로운 걸 줘야지, 이
미 아는 걸 재차 읊으면 어쩌자는 거야?
[녹스. 남성. □□□세. 국적 불명.]
나이 칸이 왜 이래. 설마, 백 년을 넘게 살았다는 건 아니겠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어쩐지 나이도 정상적이지 않을 것 같단 말이
야. 워낙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상하고 이상하셔서.
“음.”
잠깐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녹스 쪽이었다.
그는 입을 열기 전에 나를 흥미롭다는 눈길로 힐끗 바라보았다. 무언가와 맹
렬히 대화 중인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호의를 베풀어 내 수족을 죽이고 너희를 살려 주었지. 그런데, 꼬마가
도망쳐 버렸으니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녹스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편안하게 늘어졌다. 그다음 말은 나른하다고
생각될 만큼 나긋하게 흘러나왔다.
“나는 이 문제를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아. 그래서 ‘체불한 값’을 얌전히 내주
면 다른 건 요구하지 않으려 해.”
체불한 값이라는 표현을 듣자마자 카일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무릎 위에 얹어진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나는 얼른 손을 뻗
어 그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진정하자, 진정. 워워.
물론, 그게 저 빌어먹을 마법사 놈을 봐주겠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사이에서 신의와 이치를 찾아? 너무 오래 살아서 정신이 나가셨나 본
데?”
“아하하하. 웃어른에게 가차 없구나.”
놈은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더니 상체를 살짝 숙이며 속삭였다.
“그나저나, 내가 오래 살았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아셨을까?”
“그쪽이 방금 말했잖아.”
“그사이 말장난하는 재주가 늘었군.”
녹스의 푸른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맹수 앞에 서기라도 한 것처럼 몸
이 저절로 바짝 굳었다.
다행히도 내가 긴장한 것을 알아채자마자 카일이 나섰다.
“너는 우리의 터전에 들어왔다. 너를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호의를
보이고 있다는 뜻이지. 터무니없는 요구까지 들어줄 생각은 없다.”
무뚝뚝한 목소리에는 어떤 자비도 여지도 없어서 오만하게마저 들릴 정도였
다.
“나는 자비를 두 번 베풀지 않는다.”
“음, 이상하네.”
녹스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꼬리를 올렸다.
“대공께서는 분명히 내게 밀리지 않았던가? 일대일 결투에서.”
하지만, 카일은 그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지. 너는 하나고,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
“썩 멍청한 작자는 아닐 것 같았는데, 유감이야. 내가 아무 방비책도 없이 혈
혈단신으로 여기에 들어왔을 것 같나?”
은근한 협박이었다. 사실 그가 마물이든 마법사든 데리고 오지 않았다고 하
더라도 그가 여기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면 피곤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카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불굴의 위인다운 대답이 들려왔다.
“북부는 언제나 위기를 이겨 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아.”
하지만, 내 입장은 조금 달랐다.
이 협상이 나쁘게 끝나면 끝날수록 불리해지는 건 바로 나였다.
조금 전, 녹스는 내가 도망쳤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며 목소리를 살
짝 높였다. 문 너머를 지키고 있는 기사와 병사들이 그 말을 못 들었을 리가 없
다.
카일의 말대로 북부는 언제나 위기와 함께했으며 그걸 멋지게 이겨 냈다. 하
지만 동시에 북부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그들의 다음 위기가 나 때문이라는 사
실을 알게 되면, 과연 영지민들이 나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더 나쁜 점은 나 하나만 욕먹고 끝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카일이 나를 보호
하려 들면 들수록 이후 녹스와의 전면전에서 영주의 신뢰가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나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카일에게는 못 할 짓이다.
“내가 그쪽을 따라가면 뭐가 좋지?”
일단 들어나 보자. 얘기나 해 보자고 마련한 자리 아니냐. 하지만 카일은 동
의하지 못하겠다는 듯 탁자를 쾅 내리치며 일어났다.
“슈!”
이글거리는 시선이 이번에는 녹스가 아닌 내게 향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격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 내게 다정한 그라면 분명히 이렇게 말하겠지.
네게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
카일은 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내가 그의 행복을 바라는 것만큼. 아니, 어
쩌면 그보다 더.
그런 만큼 카일은 자신의 세계가 내 족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죽음을
번복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의 작은 안식처가 되기를 바라며 성심껏 돌볼 뿐
이었다. 누군가에게 터전이 되어 주는 것이 그의 사랑이었다.
그러니 이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위험해지는 건 그가 바라는 일이 아니
었다. 설령 그게 카일이 평생을 들여 일구어낸 영지를 저버리는 일이 되더라도.
언젠가 그는 과거를 후회하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 있었다.
‘네가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어.’
벨리알을 돕지 못한 내게 건넸던 말은 무심하면서도 다정했다.
‘사람은 매 순간 최선일 수는 없지. 게다가 너는 이 세계에 속한 이가 아니지
않나.’
그러니 내가 여기서 모른 척한다고 하더라도, 나로 인해 무법 지대의 마법사
들과 북부가 정면충돌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카일은 나를 원망하기는커녕 온
힘을 다해 나를 도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호의에 마냥 기댈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소설 속 세
계라고 해도 나는 이미 이 세계에, 그에게 진심이니까.
이용하고 적당히 내빼다가 보호해 달라고 요구할 만큼 나는 낯짝이 두껍지
않다. 잘해 준 만큼 돌려주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생각해 봐, 녹스.”
녹스가 침묵했다. 어디 말해 보라는 태도였다.
“난 언제든지, 어떻게든지 사라질 수 있어. 네가 이대로 북부에 화풀이한다
고 해도 별 소득이 없다는 뜻이야. 난 또다시 도망칠 테니까.”
“흐음.”
“상황이 바뀌었어. 원하는 걸 못 얻고 구경이나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 적어도 내가 도망치지 않을 적당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겠어?”
나는 최대한 느긋한 어조로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협상’하러 왔잖아? 마법사 양반.”
“…….”
카일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 결
정을 함부로 뒤집거나 말을 끊지는 않았다.
“나밖에 모르는 대공 전하를 두고 네게 협력하거나, 적어도 얌전히 따라가
네놈 연구실에 머물러 주려면 그에 따른 대가도 다시 내밀어야 할 거야. 지금의
나를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새로운 값으로.”
“…….”
“우리가 신의와 이치로 이루어진 사이는 아니니까.”
“오호.”
녹스가 환하게 웃으며 입술을 떨어뜨렸다.
“영리하군.”
기분 탓이었을까? 그 말이 꼭 반드시 죽이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