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열흘은 순식간에 흘렀다. 마법사들이 적잖이 노력해 주기는 했지만, 내 오른팔은 이렇다 할 만한 호전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냉기가 어깨 이상으로 번지지는 않았다는 점이지만, 그건 마법으로 막았다기보다는…… 어쩐지 녹스가 그 이상을 희망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지낼 만했다.
인간일 때보다는 햄스터일 때가 많았고, 설령 인간으로 지낸다고 하더라도 오른팔 하나쯤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카일이 살뜰하게 돌봐 주었으니까. 억지로 움직이려 하지만 않으면 그 저릿한 감각도 이젠 참을 만했다.
“식사는요? 전하.”
“이제 막 하려고 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다른 기사들은 다 챙기다 못해 출출하다고 부엌을 기웃거릴 시간이다.
내가 눈을 뾰족하게 뜨고 흘겨보자, 카일이 어색하게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겸사겸사 서류도 좀 처리하고.”
“말이나 못 하면.”
그리고 카일은 그 열흘을 백일처럼 살았다.
본격적인 추위가 찾아오기 전, 캐스터네츠 상단과의 교역 물품을 늘렸다. 마수 사냥이나 광산 채집품, 북부의 장인들이 만들어 낸 세공품과 갑옷을 팔아 생필품을 차곡차곡 비축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번부터 꾸준히 이야기가 나오던 난민과 망명자의 문제도 해결해야 했으며, 그나마 얼지 않은 땅에서 한시적으로 키울 만한 작물을 살펴야 했다. 잡아들인 마수 고기를 염장해서 보관하고, 창고에 있는 것들을 풀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무엇이 찾아올지 모른다. 다들 긴장하도록 해.”
한편으로는 열흘 뒤 찾아올 정체 모를 위험에 빈틈없이 대비했다. 블레이크 기사단을 중심으로 모여든 북부의 병력이 영지를 지키기 위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마수 떼나 무법 지대의 마법사단 놈들과 대치하는 건 그들의 유구한 과업이었다. 모두가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성벽을 지키고, 성실하게 훈련했다.
본래대로라면 나도 저 틈바구니에 껴서 어떻게든 활이나 승마 따위를 연습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지.’
나는 주제를 아는 얌전한 햄스터였다. 카일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적당히 노닥거리기만 해도 그를 도와주는 거였다.
물론, 아주 놀기만 한 건 아니다. 카일과 함께 서류를 처리하고, 그가 필요 이상으로 무리하는 것을 막았으며, 자잘한 심부름을 돕기도 했다.
그렇게 카일을 둘러싼 모든 것이 예상보다 오래 버텨 준 덕이었을까?
[현재 기적 수치 76.8%]
부쩍 올라간 기적 수치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질 정도였다.
우선, 원작에서 카일이 죽기로 예정된 구간을 한참 벗어났다. 벨리알도 죽지 않았고, 제임스 역시 살아남았다. 아직 녹스와 로렌츠가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기는 하지만, 구심점을 잃고 무너지거나 처절하게 고립되지는 않았으니까.
특히 제임스가 신광산 탐사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을 때는 4퍼센트 정도 올랐었다. 생각만 해도 뿌듯해서 미소가 절로 나온다.
‘요 며칠은 퀘스트도 안 했는데. 이대로면 금방 채우겠다.’
그럼, 드디어 내 죽음도 번복되는 거겠지?
기적의 힘을 빌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지긋지긋했던 가난과도 영원히 안녕이다. 전쟁이니 마법사니 하는 것도 없는 평범한 인생은 물론이고, 툭하면 햄스터로 변하는 일도 없을 거라고!
‘24시간 인간으로 살 수 있다, 이거지!’
……물론, 이게 정상인 거지만.
속으로 쾌재를 부르던 나는, 문득 어느새부터인가 오래도록 기다렸던 이 사실에 생각만큼 대단히 기뻐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딘가 아쉽고 서운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 그렇게 애쓸 땐 언제고.
“그 작은 머리로 또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고 있지?”
나는 카일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살짝 떨어뜨렸다. 어느새 그의 시선이 복잡한 서류가 아닌 내 얼굴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농담과 진담을 반반 섞어 대꾸했다.
“어떻게 해야 전하께서 오래오래 사실까 하고요. 기왕이면 행복하게.”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끝까지 읽지도 않은 소설이었음에도 네 존재만큼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으니까. 네 외로움이 마치 내 외로움인 것처럼 느껴져서 좋았지만, 기왕이면 너도나도 외롭지 않은 게 가장 좋으니까.
“이미 생각보다 오래 살고 있지 않나.”
카일이 소탈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슈.”
“…….”
“그리고, 네가 있어 준 덕에 나는…….”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딘가 조금 미안해하는 것처럼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였다.
나 역시 무어라 말하려던 입을 벙긋거렸다가 꾹 다물어 버렸다.
내가 있으니까 행복하다는 말은 결국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랬다. 그와 함께 지내면서, 아무것도 아닌 농담으로 웃고 시시콜콜한 일을 함께해 내면서 내가 긴 시간 동안 버텨 왔던 것이 지독한 외로움이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행복을 배웠지만, 얄궂게도 헤어져야만 하는 운명 앞에 놓여 있다. 어쩌면 기적 수치를 이만큼 모았는데도 그리 기쁘지 않았던 건, 그와의 이별이 싫어서인지도 모르겠다.
“…….”
세상 모든 건 영원하지 않다.
비단 내가 이 기적 수치를 다 채우면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태어난 이상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만남은 이별을 동반하니까.
“그런 건 지금 따지지 맙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따지며 걱정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불안해서 발을 동동거린다고 해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가까이 댔다. 입술이 맞닿자 카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한쪽 손으로 내 뺨과 턱, 귓가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며 호응했다.
처음에는 어딘가 뻣뻣하고 서툴렀던 손길은 이제 부쩍 익숙해졌는지 자유분방하게도 나다녔다.
나는 입맞춤을 이어 가면서 어느새 내 옆구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찰싹 쳤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데 이럴 시간 있으세요? 대공 전하.
“……으음.”
숨이 모자라서 그의 어깨를 꾹 밀어냈다.
물론, 바위처럼 버티고 선 카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저를 거절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숨 막히다니까, 숨! 살려 줘. 키스하다가 질식사했다는 괴담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고!
결국, 내 버둥거림이 더 심해졌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기분이 좋은 것과 숨이 모자라는 건 별개였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나는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에는 녹여 먹을 것처럼 다정하게 굴더니, 꼭 한 번씩 마음에 안 들면 이렇게 어깃장을 놓는다.
“슈.”
“네에, 네.”
나는 삐친 어린애라도 달래는 듯한 말투로 대답하며 그의 뺨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왜 골이 나셨을까, 우리 대공 전하께서는.”
“그야, 네가…….”
카일이 문득 내 어깨를 쥔 손에 힘을 더하며 항변하려던 때였다. 어디선가 뿔피리를 부는 소리가 울렸다. 낮으면서도 어딘가 오싹하고 서늘한 소리가.
우리 주변을 부드럽게 감싸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변했다. 그의 표정이 싸늘해지는 동시에 누군가 거친 손길로 문을 두드렸다.
“대공 전하!”
“…….”
“침입자입니다! 북쪽 성문을 향해 누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블레이크 영지의 북문은 누군가 방문하기 위해 찾는 문이 아니었다. 영주인 카일 블레이크의 허가 없이는 절대로 열리지 않는 곳이며, 사방의 다른 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하고 두껍고 철저하게 잠겨 있었다.
‘돌아오는’ 이는 있어도 ‘들르는’ 이는 없는 문.
저번 신광산 탐사 이후로 누구도 영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기사, 광부, 사냥꾼을 비롯한 누구도 북문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카일이 단단히 일러두었으니까.
“침입자라고? 누구지?”
카일의 목소리가 사납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 질문을 꺼낸 그도, 곁에서 바짝 굳은 채 그 질문을 들은 나도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얼굴을 정확히 볼 만큼 가깝지는 않습니다만…….”
기사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하얬습니다.”
“…….”
“옷도, 머리카락도, 그러니까…… 전부 다 하얘서 눈으로 빚은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녹스였다.
“하…….”
카일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붉은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황당함, 적의, 분노, 그리고 지난날의 원한으로 인한 증오가 또렷하게 맺혀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그의 눈앞에 녹스가 있었더라면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 버렸을 것만 같은 기세였다.
“언제 도착할 것 같던가?”
“느릿한 속도를 고려한다면 한 시간입니다. 넉넉히 어림잡아 그 정도면 성문 앞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전하.”
“……또 다른 것은?”
사람을 데려왔을 수도 있고, 마수를 데려왔을 수도 있다. 그가 무엇을 데려왔느냐에 따라서 대처법도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카일의 질문에 기사가 음, 하고 낮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대답했다.
“그게…… 혼자 온 것 같습니다.”
그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 사람을 제대로 놀리는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하?”
군대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우선 그 목적을 들어 보는 게 옳았다. 십중팔구 내가 이곳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찾아온 것일 테니까.
북문을 걸어 잠그고 버틴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을 카일도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녹스의 성격을 긁어 봤자, 결과가 나빠지면 나빠졌지 더 좋아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손님을…….”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받을 준비를 해야겠군.”
블레이크 영지 역사상 처음, 북문으로 들어온 손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