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위험이 찾아오기까지 앞으로 15일. 그동안 나는 ‘서리의 낙인’이 번지는 것을 막으며 얌전히 근신 생활을 즐기기로 했다.
사실 근신형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었다. 기사단 훈련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거의 평소와 비슷했다. 인간으로 지내는 내내 카일과 붙어 있으니,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더 좋은 것도 같다.
“그래서, 표정이 심각한 이유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겠죠?”
나는 그에게 기댄 채로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길쭉한 소파에 앉아 그의 어깨에 고개를 늘어뜨린 채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또 잠깐 졸았다가, 다시 깨면 생각에 잠기곤 했다. 누워서 자다가 뒤척거리면 어깨가 아프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남은 시간?”
“네. 열흘쯤 뒤에 전하께서 위험해지실지도 모른다는 꿈을 꿨어요.”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0일 남았습니다.]
보름쯤 벌어 두었던 시간은 기세 좋게 사라져 갔다. 여전히 카일의 목숨은 수많은 이유로 위협당하고 있고, 북부의 안전 역시 확보되지 않았다.
“원인을 알 수는 없나?”
“네. 그것까지 정확히 알면 좋겠지만, 아깝게도 안 보이네요.”
“원인을 모른다면 내가 죽는다는 건 어떻게 아는 거지?”
서류를 살피던 카일이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죽는 모습이라도 나오나?”
“……아뇨, 그것도.”
“내 사인도, 죽음의 원인도 알지 못하면 그냥 내가 죽었다는 사실만을 알게 되는 건가?”
나는 움찔하며 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달리, 그는 내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신기하다는 듯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곰곰이 생각할 뿐이었다.
“그건 예지몽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통보에 가까워 보이는군.”
눈치 진짜 빠르네.
이 세계가 <겨울의 심장> 속이며, 내게 미래를 알려 주는 게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둘러댔는데도 어떻게든 본질을 꿰뚫고야 만다.
이러다가 이곳이 소설 속 세계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들키는 거 아니야?
“열흘 뒤에 전하께서 위험해질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요?”
내가 재빨리 화제를 돌리자, 카일은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음. 당분간은 영지 밖으로 나갈 예정이 없다. 그렇다면 무언가 이곳을 침범한다는 뜻으로 봐도 되겠군. 영지와 나를 위협할 만한 것이 있다면…… 변종 마수 떼?”
“글쎄요. 약 오른 녹스 본인이 직접 나타날지도 모르죠.”
“그건 좀 싫군.”
“저도요.”
아무리 그래도 설마 여기까지 직접 오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가 방금까지 꼼꼼히 검토하던 서류를 가리켰다.
“근데, 이건 뭐예요?”
“영지 밖의 소식통이다. 마인하르트 전역에서 문제가 조금씩 생기는 듯해.”
“문제?”
내가 고개를 살짝 숙여 글씨를 들여다보자, 그가 내가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서류를 살짝 기울여 주었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 이 장황한 보고를 한 줄로 줄이자면 그랬다.
가난한 마을이나 폭정을 일삼는 영주를 둔 영지민들 혹은 영주들의 힘겨루기에 매사 피를 보는 지역민들이 점점 실종되고 있다. 빈민이나 전쟁 난민, 고아, 가족을 잃고 떠도는 유랑민들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을 눈엣가시로 여겨 온 사람들에게는 언뜻 반가운 소식처럼 들리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자연적으로 세상에서 ‘도려내졌다’는 뜻이니까.
“사람이 땅으로 꺼질 리도 없고 하늘로 솟을 리도 없는데, 갑자기 없어져요?”
“단체 실종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군. 이쪽으로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규모가 상당한 정도다. 어떤 빈민촌은 마을의 흔적만 놔두고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고도 하더군. 영지 업무를 처리하는 게 급선무라 그간 소식만 전해 듣는 것이 전부였지만…….”
확실히 수상하기는 하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카일은 요령 좋게 내게 내주지 않은 쪽 어깨를 움직여 서류를 넘겨주었다.
마인하르트 전역에서 실종 사건이 일어난 지는 약 석 달. 더 정확히는 로렌츠가 정식으로 황위에 오른 이후의 일이었다.
물론, 그저 사라진 것만으로 끝났다면 이렇게 보고서까지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때때로 인근 지역의 영주들이나 가족 또는 동료를 잃은 이들이 황성에 진상 규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별 소득은 없었다. 황실 파견군은 예의상 둘러본 후 그저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거나 사라진 거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살길이 막막해진 이들은 황실 파견군을 따라 수도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황실에서는 ‘새로운 곳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지만 사라졌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이들 중 살아남거나 도망친 이들이 북부로의 망명을 희망하더군.”
카일이 진지하게 말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렌츠와 관련이 있을 거다. 블레이크 영지를 선택한 이들도 그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일 테고.”
벨리알의 생사가 불분명하고 수도 부근의 중립파 귀족이 하나둘 숙청당하는 지금, 그들이 믿을 만한 곳이라고는 카일뿐일 거다. 어쨌든 로렌츠가 황위에 오르면서 카일을 황족으로 예우하겠다고 선언했으니까.
“겨울이 오기 전에는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거다. 다만, 북부도 형편이 그리 녹록지 않으니 대책을 강구해야겠군.”
무법 지대의 마법사 놈들만 해결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구나.
영주로서의 업무를 처리하는 그를 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그의 자리가 얼마나 버겁고 귀찮은 일들로 가득한지 알게 되곤 한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내 위로에 카일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부드럽게 드리운 검은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였다.
“이곳을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일 뿐이다.”
“그러니까요. 그걸 귀찮다거나, 답답하다거나,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길게 하품한 내가 그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편하다. 따뜻하고.
“당연하게, 그리고 기쁘게 생각한다는 게 대단하다는 거예요.”
“…….”
“저도…….”
그의 작고 차가운 세계가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려 했다.
평생 불행하고 외로웠을 ‘설정’ 속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그에게 이 땅이 가장 따뜻하고 다정한 안식처가 되어 주기를 바랐다.
척박한 땅에도 꽃 피는 계절이 온다면. 누구도 이곳을 흙발로 짓밟지 않는 미래가 온다면. 그럼 나도 마음 놓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저, 조금만 잘래요.”
햄스터일 때 그렇게 잤는데도 졸음이 쏟아졌다. 낙인의 진행을 막는 효과가 있는 약차에 잠이 오는 성분이 조금 있다더니, 확실히 평소보다 자주 졸았다.
“이러다가 다시 마수로 돌아갈 텐데…….”
“그래, 괜찮다.”
“서류 다 보시면요?”
“훈련 가야겠지. 몸이 굳으면 안 되니까.”
“음…….”
이제 나는 거의 눈을 감은 채로 잠꼬대하듯이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자 카일이 살짝 웃었다. 그의 목소리가 은은한 울림이 되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혼자 있기 싫은데.”
“같이 갈까.”
“…….”
고개를 끄덕였던가.
모르겠다. 나는 그대로 곤히 잠들었다.
“와. 말로만 듣던 바로 그 반려 마수입니까?”
“데려온 지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안 자라네요…….”
“마법사님께 듣기로는 심장에 마력이 모이지 않았다더라고요.”
“그럼, 평생 새끼 형태라는 겁니까? 방사하기는 어렵겠네요.”
“방사는 무슨. 전하께서 애지중지하는데 어디로 보낸단 말인가? 게다가, 이 모습으로 나가 봤자 동족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얼어 죽을 텐데.”
머리 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은은하게 퍼졌다. 따가울 정도로 날아드는 시선도 함께 느껴졌다.
‘뭔데?’
분명히 서재에서 카일의 어깨에 기댄 채로 잠들었던 것 같은데? ‘불러오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니까, 그렇게 있다가 다시 햄스터로 돌아갔을 거고…….
“만져 봐도 됩니까?”
제임스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찌나 곤히 잤는지 눈이 부었다. 가늘어진 시야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기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미안한데, 로우 앵글이라 좀 못생겼다. 하긴, 비교 대상이 카일인 건 이 사람들한테도 다소 가혹한 일이기는 하지.
막 깨서 떨떠름한 내게 누군가의 손이 가까이 다가왔다.
오래도록 검을 잡아 상처와 흉터가 많은, 거칠고 다부진 손이었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살면서 이런 식으로 마수를 조심스럽게 만져 본 적이 없는 듯했다.
물론, 나도 없다. 시커먼 사내가 머뭇거리면서 손대는 꼴이라니.
―찍. (저리 꺼져!)
나는 가까이 다가온 손가락을 냅다 물었다.
물론 이 연약한 앞니로 두꺼운 손 가죽을 물어뜯어 봤자 흠집조차 못 냈겠지만, 물렸다는 사실만으로 제임스는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무, 물었어…….”
안 물겠냐.
만지지 마라. 눈으로만 곱게 보십쇼.
“물었다고? 착한 녀석인데.”
멀리서 맹렬한 기세로 검을 휘두르던 카일이 다가왔다. 다른 기사가 건넨 수건으로 땀을 적당히 닦곤 입을 비죽 내밀고 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캐슈넛, 이리 온.”
조그마한 방석에 누워 있던 나는 다른 기사들이 만질세라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그대로 카일을 향해 얼굴을 대고 몸을 동그랗게 말자, 그가 검지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착하다.”
―찌직. (다른 놈들이 만지지 못하게 해라.)
“낯을 가리는 모양이구나.”
“…….”
아니, 그냥 귀찮다고.
아무리 내가 쥐생에 익숙해지며 기존의 인권과 극적인 타협을 봤다지만, 다른 놈들한테까지 햄스터 취급 받으며 이 손바닥 저 손바닥 오가야겠냐?
나의 원활한 여생을 위해서라도 까칠한 주인이 되어다오. 다른 놈에게 내주지 말란 말이야.
“그래. 나도 너를 좋아한다.”
카일이 따뜻하게 웃으며 내 이마에 뺨을 비볐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나까지 얼이 빠졌다.
잠깐만, 잠깐만!
이렇게 다정한 얼굴은 반칙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