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미칠 것만 같다. 카일 블레이크는 자신의 연인을 보며 이따금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다정하고 활발하면서도 어딘가에 비밀스러운 면모를 품은 그의 연인은 카일을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따금 그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게 하고, 무력함을 통감하게 하고 마는 것이다.
그를 지켜 주고 싶었다. 좋아하니까.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이미 한차례 죽어 낯선 세계에 떨어졌다던 그에게 위험하고 괴로운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해서.
하지만, 그 소원은 정말이지 이루기 어려웠다.
돌이켜 보면 슈는 온갖 위험한 일에 떠밀리곤 했다. 사소하게는 햄스터 도둑, 샹들리에 사건, 북부 정탐, 정쟁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번 신광산 탐사에서는…….
“……전하.”
“…….”
“전하!”
몇 번이나 거듭된 부름 끝에 카일은 제 뒤를 따르는 이들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가 훅, 하고 차가운 숨을 내뱉는 동시에 사나운 기세로 고개를 돌리자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제임스가 헐떡이며 말했다.
“조, 조금만 쉬었다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와이번과의 전투로 인해 기사들이 지쳐 있습니다. 해가 곧 질 시각이라, 이대로 산길을 뚫는 것도 위험합니다.”
카일이 무감정한 어조로 대답했다.
“……위험? 누가?”
“…….”
“와이번 좀 만났다고 누가 죽기라도 했나? 정말 위험한 건 누군가의 도움으로 무사히 지나쳐 왔으면서, 더 무엇이 남았길래 이렇게 꾸물거리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카일에게 있어 그들의 휴식 요청은 무정하게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말은 그 흰 마법사에게 자신을 바쳐, 일행을 무사히 빼낸 슈에게나 어울리는 표현이 아닌가?
실제로 이곳의 누구도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다. 반대로 이들 중 누구도 슈가 지금 안전할 것이라 자신할 수 없었다.
“서둘러 돌아간다고 한들 마수학자님께서 더 안전해지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반드시 돌아올 수 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고…….”
“…….”
“저희 모두 무사히 살아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카일의 걸음이 멈추었다.
아무리 슈의 안전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다고 해도, 그는 블레이크 영지의 주인이자 기사단을 통솔하는 대공작이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았던 그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조금 어리자, 눈치 빠른 기사들은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쉴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그 행동들을 잠시 눈에 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제임스의 말마따나 슈는 돌아올 것이다. 그가 원하는 순간, 제 반려 마수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상대는 그 백의의 남자였다. 어딘가 섬뜩하리만큼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던 마법사. 어쩌면 무법 지대에서 가장 강한 존재일지도 모르는 자.
그가 슈에게 작은 틈조차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그 짧은 사이에 부상이라도 입으면? 혹시, 돌아오는 길이 막히기라도 하면?
불안했다. 처음으로 이성이 반쯤 마비될 만큼 두려워졌다.
“……슈.”
카일이 제 머리를 감싸며 앓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널 어쩌면 좋을까.”
공허한 목소리가 얼어붙은 산에 넋두리처럼 퍼져 갔다.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런 카일의 걱정은, 그리고 자멸감에 가까운 분노는 이후 슈를 보고 나서 더욱 심해졌다. 서리의 중독에 당한 팔은 사흘 만에 어깨까지 번져 이젠 거의 팔을 들어 올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마법사를 데려와 응급 처치를 받는 내내 식은땀은 흘릴지언정 앓는 소리 한 번 내지 않는 슈를 보며 카일의 속은 더더욱 새카맣게 타들어 가기만 했다.
더 서둘러야 했다. 이 낙인이 더 번지기 전에, 그야말로 죽도록 뛰어왔어야 했다.
아니다. 그때 그놈을 죽여 버렸어야 했다.
자신이 압도적으로 강했더라면, 그에게 밀리지만 않았더라면 슈가 그 빌어먹을 마법사를 따라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지키겠다고 무리하다가 피를 토할 필요도 없었겠지. 그 모든 현실에 화가 치밀었다.
심지어 그렇게 피를 토한 이유가 생명력을 끌어 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카일은 직감했다. 아, 이 순간은 오래도록 악몽이 되어 나오겠구나.
“다시는 너를 홀로 두지 않을 거다.”
그러자 슈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앱니까?”
말은 퉁명스럽게 하면서도 카일의 표정을 살뜰히 살피는 것이, 걱정을 끼쳐 미안하다는 기색이 뚜렷했다. 그래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절대로 물러나지 않으면서도 연인의 마음이 다치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카일은 대답 대신 이마를 가볍게 맞댔다.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한숨이 입술과 뺨을 간질였다.
묻고 싶었다. 너는 왜 이런 상황에서도 억울하다는 표정조차 짓지 않느냐고. 당연한 것처럼 남들을 위해 희생하고 의심까지 받았는데도 그저 곤란하거나 귀찮다는 표정을 지을 뿐, 짜증이나 배신감 같은 건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여긴, 네가 나고 자란 세계도 아닌데.
“괜찮아요.”
슈의 속삭임이 카일의 귓가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입술 끝에도 달래는 듯한 입맞춤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새의 깃털처럼 보드랍고 다정했다.
“저는 정말 괜찮다고요, 전하. 그러니까, 그런 표정은 하지 마세요.”
“……내 표정이 어땠지?”
슈가 작게 킥킥거렸다.
“글쎄요. 뭐라고 표현하기는 조금 어려운데…….”
그러더니 날렵하게 움직여 카일의 콧잔등에, 입술에, 그리고 눈두덩이나 뺨에 쪽쪽 소리를 내어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서 카일은 금방이라도 슈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혹여라도 눌린 어깨와 팔이 아플까 봐 그러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했다.
그러자, 슈가 재차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다정하시니까요.”
카일은 눈을 내리깔며 미소 지었다.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뿐일 거다.”
카일은 그야말로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밥을 먹여 주는 것부터 시작해 물건을 집어 드는 거나, 심지어는 문을 여는 것까지 일일이 그의 손으로 하고자 했다.
멋대로 굴어 속상하게 만든 건 내 탓이니까 얌전히 받아 주고는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씻는 것까지 맡길 순 없잖아!’
나는 욕실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카일을 밀어내며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편안한 옷을 입고, 팔에는 수건을 건 채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퍽 가여운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걱정되어서 미칠 것 같았다.”
“…….”
“마음만 같아서는 그 자식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이길 재간이 없었어. 무엇보다 네게 빚진 것이나 다름없는 목숨을 덧없이 내던지는 것은 네게 가장 잔인한 짓일 테니까.”
나는 더없이 진중한 카일의 얼굴에 숨을 삼켰다. 흔들리는 내 눈빛을 읽었는지 그가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속삭였다.
“전부 내가 부족한 탓이다.”
“…….”
“그러니, 팔을 씻을 때만이라도 내게 맡겨다오.”
“……수작인 거 다 압니다.”
“슈…….”
“하아!”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려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카일은 제자리에 얌전히 서서 차마 따라오지도 못하고 내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절반쯤 걸어가던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흘끔 고개를 돌렸다.
“……얼른 오십쇼.”
그가 좀 전보다 환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서너 걸음 만에 따라잡힌 나는 그의 어깨에 장난스럽게 기대며 웃었다.
“이번 한 번만입니다.”
“그래.”
내쫓기기라도 할까, 냉큼 대답한 카일이 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당겼다. 팔을 건드리지 않도록 긴장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져서 나는 결국 당분간 고집을 꺾기로 했다.
그래. 이것 역시 그가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일 텐데, 내가 너무 모질게 군 것 같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이라고 못 들어줄 게 있나.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제법 소박한 축에 속한다. 같이 씻겠다는 말도 아니잖아?
[(/▽\)]
“아니라니까!?”
내가 허공을 향해 소리치자, 카일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뭐가 아니라는 거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옷을 벗어라.”
“……예?”
스스로 듣기에도 얼빠진 목소리였다. 나는 목을 몇 번 가다듬고 다시금 그를 향해 말했다.
“여기서요? 지금요? 갑자기요?”
“욕조에 진정 효과가 있는 약초를 넣고, 피로 회복을 위한 마법도 걸어 뒀다. 효과가 가시기 전에 들어가야 하니 서둘러라.”
덤덤히 말한 그가 한 꺼풀씩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카일이 말한 욕조를 바라보았다.
‘……욕조?’
아닌데? 목욕탕인데?
원형으로 된 커다란 욕조는 장정 다섯이 들어가도 될 만큼 넓고 넉넉했다. 잔잔하게 찰랑거리는 물 역시 꼭 온천 같은 색깔이었고, 냄새도 엇비슷했다.
‘약초 달인 물쯤 되는 건가.’
나는 바지를 대충 걷고 물 위에 발끝만 살짝 대어 봤다. 그리고 깜짝 상자처럼 튀어 올라, 카일이 있는 곳까지 물러났다.
뭐, 뭐, 뭐, 뭐야? 뭐야? 이거 뭔데?
“슈?”
“아니! 저게 물입니까? 용암이 아니라요? 사람을 솥에 끓여 잡술 생각인가!”
카일은 나와 욕조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순식간에 움직였다.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내 눈으로는 결코 좇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전…….”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내게 다가온 그가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익숙한 손길로 셔츠를 홱 벗겨 버렸다.
“왁! 뭐 하는 짓입니까!”
“옷을 입고 욕조에 들어갈 건가?”
“아니, 저긴 욕조가 아니라고요! 솥이라고요, 솥! 저런 데 들어가면 죽어요!”
“안 죽는다. 괜찮아.”
“죽는다니…… 아악! 뜨거워!”
나는 한쪽 팔로 카일을 붙들어 안고 절대 놓지 말라며 비명을 질렀다. 그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음을 꾹꾹 눌러 참다가, 기어이 크게 웃고 말았다.
웃긴 왜 웃어! 삶아질 것 같다니까!
햄스터…… 아니, 사람 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