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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90화 (90/129)

90화

물론, 나를 믿는다고 해서 모든 의심이 말끔하게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다. 기사단은 한 명 한 명이 북부의 전력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은 무한한 신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의심이란 살기 위한 본능과도 같았다.

하여, 마땅한 증거조차 없이 그들을 설득하는 일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이 더 이어졌다. 연무장에 모인 그들은 검을 드는 것마저 잊고 질문을 쏟았다.

나는 때때로 거짓말을 섞었지만, 대부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그들과 한편이라는 사실만큼은 한 점의 부끄럼 없이 진실이었으니까.

“그럼, 그 작아지는 것도 마법이란 말이야?”

“네. 그건 뭐…… 할 수는 있는데, 저에게만 한정된 거라서요.”

“공간 이동 마법으로 설원 지대까지 갈 수 있나?”

“못 갑니다. 돌아오는 것만 가능해요.”

“치유 마법은?”

“……그게 가능했으면 지금 제 팔이 이 지경이겠습니까?”

웅성거리던 기사들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겨울의 심장’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안 거지?”

“스승님께서 들려주셨습니다. 저도 다 아는 건 아니에요. 사람의 생명을 뽑아내서 만드는 거고, 모든 섭리를 부수며 영생을 약속하는 도구라는 것만 압니다. 그리고, 그런 건…….”

제임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말을 이어 주었다.

“……세상에 없어야지.”

그 말대로였다. 영생을 꿈꾸는 건 개개인의 자유라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결론적으로 기사들은 우선 나를 지켜보기로 했다. 아무렴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하지만, 긴 대화 끝에 분위기는 호의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제임스를 비롯한 기사들은 나의 진의를 파헤치는 일을 잠시 미뤄 두고, 이젠 내 팔에 새겨진 낙인이 정말로 나을 수 있는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사흘 안에 퍼진 것치고는 범위가 넓어.”

“마법으로 억누른다면 괜찮겠지만…… 상당히 강력해 보이는데. 움직이지 않을 때도 통증이 있지?”

나는 고개를 느릿느릿 끄덕였다.

지금도 팔꿈치 근처가 기분 나쁘게 욱신거렸다. 카일이 걱정할 테니 웬만하면 내색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을 정확히 공유하고 도움 받는 게 악화를 막는 방법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말인데…… 한동안 오른팔을 이용한 훈련은 어려울 것 같아요.”

기사들이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아니, 왜. 훈련하고 싶을 수도 있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무법 지대 같은 이 세계에서 내 몸 하나는 건사해야 할 거 아냐!

신광산 탐사에 동행했던 마법사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한동안 쉬기나 하십시오. 훈련은 무슨…….”

카일이 엄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슈는 한동안 훈련 금지다. 게다가 군사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 혼란을 유발했으므로…….”

잠깐. 편들지 말라고 했지, 갑자기 책임을 물으라는 건 아니었는데?

카일은 당황한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한동안 근신형에 처한다.”

“…….”

공식적으로 싸고돌겠다는 뜻이다.

[~( ̄▽ ̄)~]

저 말에 숨은 뜻을 알아차린 내가 떨떠름하게 쳐다보았지만, 카일은 한쪽 눈썹만을 삐딱하게 들어 올릴 뿐이다.

기사들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큼 부당한 처사가 아니고서는 영주의 뜻에 따르겠다는 태도였다.

나는 입을 댓발 내밀었다.

근신이라니. 사흘 내내 햄스터로 산 것도 지긋지긋했는데, 이제 서재와 침실 밖으로는 발도 못 내밀게 생겼잖아!

“근신형은 지금부터 일주일이다.”

명료한 통보와 함께 카일이 내 왼쪽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맥없이 끌려갔다.

“그래. 이참에 푹 쉬라고.”

기사들은 천연덕스럽게 나를 배웅해 주었다.

“올 때 마법사단 놈들에 대해 달리 아는 게 있으면 다 정리해서 가져오고!”

“그래요, 마수학자님. 겨울의 심장인지 뭔지 하는 그것도요!”

“최대한 상세하게!”

“……미치겠네! 아무도 안 말리냐고요!”

“우리가 어찌 대공 전하의 명령에 불복할 수 있겠나.”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결국 카일의 뒤를 따라갔다.

‘하긴.’

한 번쯤은 달래 주기는 해야 했다.

“전하.”

“…….”

“전하, 전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앞서가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나는 재빨리 그를 추월해 문을 등진 채로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카일은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싶은 듯 손을 뻗었다가, 오른쪽 어깨를 만지면 아플 거라는 사실을 상기했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팔을 내렸다.

그대로 달칵, 문고리를 돌리자 어둠에 잠긴 침실이 드러났다. 나는 뒷걸음질로 성큼 들어서며 카일에게 물었다.

“화나셨어요?”

카일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네게 화낼 리가. 다만…….”

약간의 침묵 후에 그가 내게 한 걸음 다가서며 속삭였다.

“슈. 너는 내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를 거다.”

“알아요.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서 돌아오셨잖아요.”

“아니, 반도 알지 못해.”

그의 시선이 부자연스럽게 늘어진 내 팔로 향했다.

성에서 지내는 마법사에게 응급 처치를 받을 때 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도깨비 같았다. 새파랗게 질렸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는지 일그러졌다가, 다시 혈색을 잃으면서 동요하던 모습은 조금 슬프게까지 느껴졌다.

처치를 끝낸 후, 내가 기사들과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연무장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카일의 표정은…….

‘그렇구나.’

나는 침실 안으로 그를 이끌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네요. 몰랐어요.”

안전한지 확인하지도 못한 채 떨어지고, 돌아오고 나니 한쪽 팔을 거의 쓰지 못하는 걸 본 데다 기사들이 의심하고 추궁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할 뿐 제대로 감쌀 수 없었다.

그간 카일이 느꼈을 죄책감과 무력감은 깊었을 것이다. 나는 차마 그 감정을 다 이해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변명처럼 들렸겠지만, 이게 최선이었어요. 사흘간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예요.”

“네가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는 건 알아.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그게 뭔데요?”

“네 안전.”

딱 잘라 말하시네.

따지고 보면 사실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무어라 덧붙여 나를 타박하지 않았지만, 나로서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초조했다.

“일주일 근신형. 가벼운 산책은 되지만, 반드시 내가 동행한다. 그 외에는 침실과 서재를 벗어나서는 안 돼. 훈련은 물론이고 과격한 운동, 성 밖으로의 외출도 금지다.”

“알겠어요.”

몰래 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상 카일의 속을 뒤집어 놓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가에 앉아서 옆을 두드리자 그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앉았다.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이 한없이 다정했다.

나는 한쪽 팔로 그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궁금하신 건 없습니까? 아까는 기사들에게 양보하느라 질문다운 질문도 제대로 못 하셨잖아요.”

그러자 카일이 머뭇거리듯 물었다.

“많이 아픈가?”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하지만, 견딜 만합니다. 생각보다 괜찮아요.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은데…… 어차피 근신형 아닙니까? 무리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인데요.”

그가 애써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그의 몸을 타고 내 몸을 부드럽게 울렸다.

“그 말, 진짠가?”

“말?”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기사들과의 대화를 되짚었다. 그가 예상하지 못할 만한 이야기가 뭐가 있었을까.

“아. 은둔 마법사의 제자라는 것 말이죠?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하면 이래저래 충격도 크고, 무엇보다 안 믿어 줄 것 같아서요.”

겸사겸사 마법사단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게 되면 스승님의 유산인 척 슬쩍 공유할 수도 있게 된다.

하지만, 카일은 그걸 묻고 싶은 게 아니었던지 고개를 저었다.

“마법의 재료로 마력이 아닌 생명력을 사용한다는 것.”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그의 앞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 절대로 안 믿겠지.

나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네.”

“슈!”

“일부 마법만요. 대체로 그렇진 않아요. 이 정도로 생명력을 끌어다 쓰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때처럼 행운을 강제 충전하지만 않는다면, 몸에 직접적으로 무리가 가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러고 보니 내가 행운을 소비해 만든 방어막을 본 녹스가 그랬다. 내가 자기들과 비슷한 힘을 쓴다고.

“놈들이 쓰는 마법도 비슷할 겁니다. 다른 생명을 흡수해서 마력으로 바꾸는 식으로 한계를 돌파하는 종류겠죠.”

카일이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가?”

“…….”

“다시는 그러지 마라. 날 살리기 위해 네 목숨을 깎는 일 같은 것. 그렇게 빚지게 되더라도 고통스러울 뿐이다.”

“피 좀 토한다고 죽지는 않아요.”

카일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원망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들어 보세요. 그때 전하께서 다치셨다면 상황은 더 나빴을 겁니다. 속이 조금 상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뿐이었어요. 대신 전하의 목숨을 구했고요.”

내가 재빨리 덧붙였다.

“저도 웬만하면 안 그랬을 겁니다. 그땐 어쩔 수 없었어요.”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네 목숨을 야금야금 깎아 내 목숨을 연명하고 싶지 않다.”

“저는 목숨 조금 깎아서라도 전하를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거예요.”

“…….”

“좋아요. 이건 대화가 필요하겠는데요. 앞으로 일주일 동안 근신형이니까 제게 남는 건 시간이고, 전하는 다친 저를 돌본다는 이유로 이 근처에서 멀리 떨어지시지도 않을 테니까.”

“……그래. 천천히 해결하지.”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카일도 순순히 동의했다.

나는 그제야 몸에 힘을 빼고 그에게 늘어지듯이 안겼다. 내심 긴장했던 모양이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아쉽다. ‘불러오기’ 시간도 생각보다 많이 남았는데. 그는 혹여라도 내가 아플까 봐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로 그저 부드럽게 안고만 있었다.

“달리 하고 싶었던 말은 없습니까?”

그러자 카일이 나를 제 품으로 당기며 말했다.

“보고 싶었다.”

아, 따뜻하다.

나는 그 품에 마음껏 고개를 파묻으며 대답했다.

“저도요.”

그 말이, 세상 무엇보다 나를 사랑한다는 말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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