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햄스터가 제 발 저린다 (1)
내 팔에 새겨진 ‘서리의 낙인’은 한쪽 팔꿈치와 어깨까지 그 서늘한 영향력을 행사한 데 반해, 놀랍게도 그 이상으로 퍼져 나가지는 않았다.
팔 한쪽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분간 계속 이렇겠지.
나는 생각보다 큰 불만 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뭐가 됐든 심장까지 냉기가 퍼지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나니 이마저도 호사처럼 느껴졌다.
물론, 지극히 내 입장의 이야기다. 카일은 당장 북부의 모든 마법사를 불러와 내 팔을 고치고 싶은 눈치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어차피 녹스가 작정하고 남긴 이상,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괜한 힘을 빼는 것보단 우선은 다른 급한 일부터 처리하는 게 옳았다.
“그러니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멀쩡한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제 제가 질문을 받을 차례인 거죠?”
나는 연무장 중앙에 의자 하나를 놓고 앉은 채로 나를 둥글게 둘러싼 기사들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내 정면에 선 카일은 내내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이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섣불리 나를 감싸려 들지는 않았다.
이 순간만을 벼렸다는 듯 제임스가 곧장 말했다.
“어떻게 영지까지 왔지? 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곤란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름길을 통해 왔습니다. 여러분과 멀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출발했죠.”
“……하, 지름길.”
지친 기색이 역력한 다른 기사 한 명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넌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아무리 지름길이 있다고 한들 우리를 절대로 앞지를 수는 없다. 하늘을 날아서 왔다면 모를까.”
옆에서 제임스가 쓰게 웃으며 거들었다.
“그래. 설령 날 줄 안다고 해도 이렇게 먼저 와서 기다리는 건 불가능해.”
그 말을 들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대체 얼마나 닦달하며 왔길래 기사들이 저러는 거야? 거의 산이라도 뚫고 온 모양인데.
카일은 시치미를 뚝 뗐다. 결국,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녹스…… 그 백의의 마법사 놈이 그려 둔 마법진을 이용했고요. 말이 나와서인데, 마법사단 놈들은 북부 곳곳에 마법진을 그려 두고 그것을 타고 다니는 듯했어요.”
변종 고블린과 함께 나타난 마법사, 녹스를 떠올린 기사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누군가 내게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녹스’? 그 이름은 어떻게 안 거지?”
“설마, 내통한 건가?”
“북부에 잠입했나?”
“목적이 뭐지?”
“공간 이동 마법으로 여기까지 와? 그런 고위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잠깐만, 잠깐만요.”
어수선하게 쏟아지는 질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손을 홰홰 내저으며 말했다.
“하나씩. 하나씩 대답하겠습니다.”
“…….”
“첫 번째. 녹스의 이름은 놈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어쩌면 가짜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렇겠군.”
“두 번째. 공간 이동 마법을 쓴 건 맞습니다. 세간에서 말하는 ‘마법’과 느낌이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위기에서 한 번쯤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에 가까워서, 이래저래 제약이 많아요.”
내 기나긴 설명에도 기사들은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간 마법사들과 갈등을 빚은 게 한두 해의 일도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첨예한 눈길이 쏟아지는 걸 보니, 이전에도 마법사단 놈들이 첩자를 끼워 넣어 내부 분열을 유도한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전 마법사가 아닙니다. 무법 지대 놈들과 한 패거리는 더더욱 아니고요. 그것만큼은 분명해요.”
나는 여기까지 말한 후, 입을 잠시 다물었다.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떠올린 핑곗거리가 있기는 했지만, 묻지 않는 정보를 주절주절 나열해 봤자 더한 의심만 살 뿐이다.
그러니, 내가 더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도 분위기가 조금 더 곤두서야 했다. 내가 의뭉스럽게 웃자, 기사들이 다시 질문을 이어 갔다.
“그래, 마법진을 통해 우리보다 앞서 영지까지 혼자 돌아왔다고 치지. 하지만, 녹스는 어떻게 따돌린 건가? 척 보아도 보통내기가 아닌 듯했는데. 순순히 돌아가게 둘 것 같지도 않았고.”
“맞습니다. 그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고블린 무리까지 제 손으로 죽인 놈이 아닙니까? 그런데 마수학자님을 그대로 놓아준다고요?”
“은근한 호의를 보이던데…… 혹시, 구면인 거 아닙니까?”
“구면은 무슨.”
이 정도면 알맞다.
나는 잠시 심호흡한 뒤, 사흘간 푹신한 톱밥 위를 뒹굴며 떠올렸던 적당한 핑계를 술술 늘어놓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저는 사실 그 사람들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법사단 놈들도 제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고요. 아마 그것 때문에 저를 데려가려고 했을 겁니다. 저 하나를 캐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 되니까요.”
“그냥 마수학자 아니었어? 출신이 좀 불분명하기는 했지만…….”
“맞아.”
“어쨌든!”
그들의 웅성거림을 끊어 낸 내가 이어 말했다.
“사연이 좀 복잡하기도 하고, 잘못 설명해서 오해를 부를까 두렵긴 하지만요. 어쨌든, 놈들과 한통속은 아닙니다. 협력 같은 것도 안 해요. 전 오히려 그 자식을 막고 싶은 심정뿐이라고요. 완전히 따돌리는 데 실패해서 오른팔도 못 쓰게 됐잖습니까.”
어수선하게 이어지는 내 말에서 무언가를 알아낸 듯 제임스가 말했다.
“아니, 그건 실패가 아니다. 비록 낙인을 얻긴 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영지로 돌아왔으니까. 그 마법사…… 녹스는 네가 영지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다. 그렇다면 다시 잡으러 오지 않겠나?”
그가 적의를 채 떨쳐 내지 못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블린 무리보다 더한 것을 들고 남하할 수도 있겠군. 영지에 마수 군대가 들이닥치거나, 더 운이 나쁘다면 다른 마법사 놈들까지 내려올지도 몰라. 대처하기엔 시간이 촉박할 텐데…….”
그때, 팔짱을 낀 채로 내내 침묵하던 카일이 그 말을 끊고는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십중팔구 밀어닥칠 놈들로부터 안전하기 위해서라도 얌전히 희생당해야 했다?”
“…….”
“내가 기사단을 잘못 길렀군.”
카일은 뭐라고 더 비난하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그와 눈을 맞춘 내가 고개를 천천히 내젓자 입을 다물었다. 물론 눈길은 여전히 흉포했지만, 어색하게나마 침묵을 지켜 주었다.
카일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안전하기 위해서 하나둘씩 희생하면 점점 더 많은 것을 잘라 내게 된다. 누군가의 희생은 타인이 함부로 요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복잡한 문제니까.
하지만 지금, 나와 사이가 돈독한 카일이 내 편을 든다는 건 기사들에게 더한 반발을 일으킬 뿐이었다. 카일은 나와 관련된 일이면 언제나 쉽게 이성을 잃는다. 거리감을 둘 필요가 있었다.
‘야속하다고 느끼려나?’
나는 조금 미안해져서 카일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서운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안하다. 무사히 돌아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때, 냉정함을 되찾은 제임스가 재빨리 사과했다. 이럴 때 보면 그가 영지와 카일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나쁜 사람은 아니네.’
그럼 됐지.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 녹스가 나를 왜 데리고 가려 했는지 묻는 기사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음, 그러니까. 저는 그놈들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의 제자 같은 거예요.”
평범하기 짝이 없던 직장인의 삶을 이들이 알 리 없으니, 나는 적당히 양념을 쳐서 모두가 이해할 만한 판을 깔기 시작했다.
신원 불명의 남자, ‘슈’는 사실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마법사가 쓰는 마법과는 조금 다른 힘이라서 그 힘을 가르치는 사람도, 물려받은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슈’는 남쪽 깊은 곳에서 은둔하며 살던 그 마법사의 하나뿐인 제자로, 그의 스승은 과거 북부 마법사들과 인연이 있었으나 현재는 뜻이 달라져 대립하고 있다.
수도로 내려가는 길에 일행과 떨어지기 위해 잠깐 들렀던 그 마을에서 가족을 잃었었고, 그 일로 마법사를 따라간 거라고 덧붙이니 기사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자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어쨌든, ‘슈’는 이러한 기구한 팔자 끝에 마법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법에 재능이 없어, 스승으로부터 몇 개의 편법만을 물려받은 게 다였다.
“마법을 위해 생명력…… 을 사용한다고?”
“그러니까, 목숨을 건다는 거잖아.”
“세상에 그런 마법이 있나…….”
“아니, 이건 마법이라고 하기에도 좀…….”
혼란스러움을 가득 담은 기사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경계심이 완전히 누그러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얼추 믿을 만한 구석은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다뇨?”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전 언제나 북부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는데요. 놈들이 북부를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그리고 카일 전하께서 무사하기 위해 전 아무것도 아낀 적이 없었어요.”
“…….”
그들의 머릿속에 그간의 일이 빠르게 지나가는 듯했다.
벨리알을 감싸기 위해 떨어지는 샹들리에에 맞았던 일, 함께 정찰을 나서거나 황성으로 갔던 일, 정쟁에 함께한 뒤 북부로 돌아온 것까지.
단순한 첩자라면 그렇게까지 할 리 없다. 게다가, 하루 이틀 함께 지낸 것도 아니지 않나. 그렇게 여론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쯤에서 동정표를 살짝 더하기 위해 오른쪽 어깨를 움직여 보였다. 끔찍한 통증과 한기가 전해졌다.
내가 몸을 웅크리고 낮게 앓자, 카일의 발이 살짝 들썩였다.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오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애써 상기하고 입술을 깨물며 참고 있었다.
“이건 제 스승님의 뜻이기도 하고, 제…… 의지기도 합니다. 마음 둘 곳 없었을 때, 북부는 제게 고향이 되어 주었죠.”
“…….”
“저 마법사단 놈들이 이 터전을 흙발로 짓밟지 않게 하는 게 우리의 공통된 목표인데, 이렇게까지 서로를 의심해야 합니까?”
그 말마따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녹스는 반드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황제가 된 로렌츠도 슬슬 움직이겠지.
벨리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영원히 숨길 수 없다. 로렌츠는 ‘겨울의 심장’을 손에 얻기 위해서, 그리고 벨리알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이쪽에 손을 뻗을 것이다.
즉위하는 당시 로렌츠는 북부를 적대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녀석이 약조 따위 신경 쓸 리가 없지. 믿을 사람을 믿자.
분명히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카일을 제거하려 할 것이다. 로렌츠가 바라는 건 절대적인 황권이니까.
“그놈들은 ‘겨울의 심장’이라는 것을 만들 겁니다. 마수의 핵과 비슷해요. 그건 수많은 생명을 빼앗아서 만드는, 놈들이 가진 힘의 결정체이고요. 그걸 만들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날 영원히 믿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나도 이런저런 일을 해결하고 나면 본래 세계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영 미덥지 않거든 일시적인 동맹 정도로만 생각해 주세요. 그 정도도 어렵겠습니까?”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다들 치열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진지한 나머지 심각하고 음울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차분하게 돌아올 답을 기다렸다. 누군가의 신뢰는 억지로 끌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기사들이 말했다.
“난 믿으련다.”
“나도.”
“그래, 나도. 솔직히 거짓말할 사람으로는 안 보이거든.”
그러자, 줄곧 나를 보고 있던 카일이 말했다.
“나 또한 믿는다.”
그건 조금 애틋한 울림으로 내 귓가에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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