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동굴 안 햄스터 (3)
속은 여전히 불편했다. 나는 목 안쪽에서 명치까지 이어지는 길을 아주 얇은 막대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에 가볍게 헐떡였다.
고작 클로버 백 개 가지고 너무 치사한 거 아니냐. 두 번 충전했다가는 사람 잡겠네.
짧은 침묵이 흐를 동안, 흰 제복을 입은 ‘정성스러운 미친놈’께서는 나를 꼼꼼히도 살펴보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이대로 데려가서 해체하고 싶다는 마음을 듬뿍 담아.
“좋군.”
좋긴 뭘 좋아!
진짜 보통 미친놈이 아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카일은 내게 바짝 붙으며 나를 뒤로 살짝 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 너른 등에 몸을 반 이상 숨겼다.
“괜찮나?”
카일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스며 있었다.
내가 갑자기 피를 토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상황이 위태롭지만 않았다면, 당장 나를 안아 들고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온종일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는 나를 보고 싶어 죽겠다는 듯 굴면서도 차마 돌아보지 못했다. 우습게도 그 외면에서조차도 카일의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가능한 가장 태연한 목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당연하죠. 멀쩡합니다.”
“…….”
지금 카일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분명히 못마땅해 죽겠다는 얼굴이면서도, 날 쉽게 타박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 입을 꾹 다물고 있겠지.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로 내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내 힘이 영원히 이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는 저 남자와 백 번을 싸워도 백 번 다 위험해질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막아서는 것이다.
설령 그 끝이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북부의 삶이기에.
“흠.”
물러나듯이 높직한 바위 위로 뛰어오른 남자는 예의 그 자세로 적당히 걸터앉으며 턱을 괴었다. 내 쪽을 한 번, 그리고 카일을 한 번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가벼운 고민이 서려 있었다.
“어쩔까. 확실히 지금 죽이는 게 편한데. 애매하게 들쑤시면 숨어서 안 나올 테고…… 그러면 좀 피곤해지는데.”
뭐라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경계심 어린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며 카일을 보호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박수를 짝! 치며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대공 전하.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남자는 존경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지껄였다.
“지금 당장 전하를 죽이면 제 앞날이 좀 더 손쉬울 테지만, 저는 때때로 돌아가는 것을 더 즐기거든요.”
“…….”
“그래도 그쪽은 영지를 위해 분투하는 모습이 갸륵하니, 구미가 당기는 선물 하나를 줄까 하는데. 물론, 공짜는 아니고…….”
선물이 공짜가 아니면 선물인가? 강매지?
내가 딴죽을 걸려던 찰나, 창백한 빛을 띤 검지가 나를 가리켰다.
“내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던가?”
카일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난 너희 무법 지대 놈들이 말하는 ‘선물’에 넌더리가 난 참이라.”
“이런, 대공 전하. 모름지기 상대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요.”
푸른 눈동자가 싸늘한 빛을 머금은 채 형형하게 빛났다.
“등 뒤의 그 꼬마를 두고 가. 그러면, 이 절호의 기회를 모른 척 날려 줄 테니까.”
“헛소리.”
카일은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처럼 몸을 낮추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그와 다시 싸우는 건 위험하다.
원작에서 제임스 러셀을 죽인 남자다. 방금도 열 자루조차 되지 않는 비수만으로 카일과 호각을 겨루지 않았던가. 그런 그에게 다른 수라도 있다면 이쪽이 더 불리해진다.
또한, 카일의 예상 사망 시간을 줄인 원인이 저 남자라면 무조건 조심해야 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0일 남았습니다.]
아직 안전해지지 않았다.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저 동굴에 낙오된 놈들도 무사히 돌려보내 드리겠다, 약속하지요.”
어느새 여유를 되찾은 남자가 능글능글하게 말했다.
“네게 목숨을 구걸하는 일 따위는 없다. 제안은 거절하지.”
우리 카일 전하, 자존심이 쇠고집이시네. 하긴, 애인 내놓고 가면 살려 주겠다는 말을 받아들이는 쪽이 더 이상하겠지.
……사실, 감동해야 하는 타이밍이겠지만, 이렇게 뻗대다가 둘 다 죽는 건 사랑도 뭣도 아니다. 그냥 동반 자살이잖아.
더 싸우면 저 미친놈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차마 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할 때였다.
“제안?”
남자가 고개를 모로 꺾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눈의 폭포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 멀건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순수한 의문이었다.
“내가 제안을 했나? 난 제안을 한 적이 없는데…….”
“전하!”
그때, 동굴이 무너지지 않게 안전한 길을 따라 빠져나온 기사들이 우리의 근처로 다가섰다. 머리나 갑옷 따위에 얼음덩어리가 엉망으로 붙어 있어서, 꼭 눈발을 뚫고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기사들이 우리의 등 뒤로 자세를 잡으며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군더더기 없이 뽑혀 나오는 날붙이의 소리가 어쩐지 섬뜩하게 들렸지만, 혈혈단신으로 앉아 있는 남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슈, 조금 더 뒤로…….”
제임스가 내게 조언하려던 때였다. 나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얀 망령.
저 남자는 분명히 광산에 마법 폭발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블레이크 영지민들이 다쳤으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기사단에서 움직일 것 또한 예상했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혼자 왔다.
아니.
‘정말 혼자 왔을까?’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심장이 선뜩하게 조여 오는 듯한 불안감과 함께, 원작에서 설정되었던 제임스의 죽음이 떠올랐다.
[제임스는 변종 고블린에 의해 치명상을 입습니다.]
“조심하세요!”
내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혼자 왔을 리가 없어요!”
변종 고블린을 데려왔을 거다. 그가 바로 무법 지대의 마법사, 본인이니까! 그리고, 그게 원작의 설정이니까!
내 말에 마법사는 진실로 감탄했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그러더니 흥미와 호기심이 철철 흘러넘치는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똑똑해. 정말 똑똑하다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고문해서라도 알아내고 싶을 정도야. 분명히 기척을 완전히 죽여 놓았는데…….”
“……설마.”
“내가 그랬잖아. 난, 제안을 한 적이 없다고.”
제복을 입은 남자의 뒤로 무언가 우두둑, 우둑, 관절이나 뼈를 위협적으로 꺾으며 무언가가 몸을 일으키는 장면이 보였다.
바싹 마른 감청색 가죽을 두른 괴물들은 덩치가 작고, 몸은 구부정했으며, 볼썽사나운 매부리코를 가지고 있었다.
눈에 초점이 없어 푹 꺼진 듯한 우울한 생김새의 변종 고블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이 썩은 풀처럼 나부끼는 모습이 꽤 불쾌했다.
수가 꽤 많았다. 어림잡아 훑어보기만 했는데도 서른 마리가 넘었다. 저놈들이 없는 것처럼 주변에 숨어 기척을 감추고 있었다니,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손이 근질거렸다. 변종이면 분명히 저것들의 몸뚱이 어딘가에 핵이 있을 것이다. 그 핵의 위치가 어딘지만 알아도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텐데. 하지만, 지금 다짜고짜 안경을 꺼내 쓰면 엄청나게 수상하겠지.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널 두고 가기만 하면, 이놈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야.”
이쯤 되니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를 왜 탐내지?”
애인 있다, 자식아. 탐내지 마라.
“글쎄. 이유가 꽤 많은데. 일단, 그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가 너무 궁금하거든. 이 녀석들의 매복을 예견한 것도 꼬마, 너인 것 같고.”
“그 꼬마 소리는 집어치우시고요.”
이 덩치에 꼬마가 웬 말이냐. 망측한 소리 좀 그만해라.
“설령, 내가 그쪽으로 간다고 해.”
“슈!”
그 가정만으로도 당황한 건지, 카일이 나를 급히 돌아보았다. 어찌나 이를 꽉 악물었는지 턱뼈가 도드라졌다.
나는 홀린 듯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토닥였다. 착하지, 물지 마라. 미친놈 물어뜯어 봤자 광증 옮는다.
괜히 수명 깎지도 말고. 제발.
“이 사람들이 모두 안전히 영지까지 돌아갈 거라는 걸 내가 어떻게 믿지?”
저놈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뒤통수를 세게 치고 ‘이것 참, 유감스럽게 되었네!’라며 소리치고도 남을 놈이다.
카일에게 향했던 팔을 거둔 내가 손을 허리에 척 얹고는, 어디 둘러대 보기라도 하라는 듯 그에게 눈짓했다.
마법사는 여전히 얼음 바위 위에 앉은 채 손을 까딱이며 웃었다.
“귀찮으면 믿지 마.”
“…….”
“그런데, 안 믿으면 어쩔까? 여기서 다 같이 사이좋게 죽는 거지. 나라면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확률에 판돈이라도 걸어 보겠어.”
“……허.”
“꼬마야, 네가 지금 가져야 하는 건 누군가의 증명 속에서 피어난 신뢰 따위가 아니야.”
그의 얼굴에 퍼져 가는 새하얀 미소는 어떤 미친 예술가가 그린 그림처럼 아름답고 불쾌했다.
“절실함이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의 말에는 옳은 구석이 아주 조금쯤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신뢰가 아니다. 즉, 그는 내게 신의를 지킬 필요가 없으며 나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서 전투를 벌이는 건 위험한 일이다. 저 고블린들을 무사히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후발대가 올 수도 있다. 단출한 인원으로 움직이는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기만 할 거다.
그렇다면, 역시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붙잡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나는 ‘불러오기’를 해제하면 도망칠 수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영지로 돌아갈 수도 있다.
본래는 ‘불러오기’를 해제하면서 지정할 수 있는 장소의 범위 제한이 있는데, 카일이 마련한 햄스터 집만큼은 예외였다.
그래. 무사히 잡혀가는 척하다가 도망치자. 설령 ‘불러오기’에 실패하더라도 견과류 상점에서 아이템을 사다가 두르면 어떻게든 되겠지.
“계산은 끝났나? 제법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것 같던데.”
남자가 나를 부드럽게 채근했다.
나는 고개를 들며 씩 웃었다.
“얼추.”
“그래서, 대답은? 너는 대공작처럼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하는데.”
“물론…….”
“…….”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괴물도, 사람도, 마법사도, 카일도 침묵한 채 내 말만을 기다렸다.
“따라갈게. 네가 약속만 잘 지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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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