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동굴 안 햄스터 (2)
“이게 무슨…….”
분명히 뭔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나는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통로의 끝, 그러니까 우리가 방금 나온 출구 쪽 일부가 무너지며 길이 막혔다. 우리를 따라 서둘러 빠져나온 제임스를 제외하고는 다들 그 길목에 갇힌 듯했다.
하지만 돌아갈 여유 따위는 없었다. 카일의 목을 노렸던 그 푸른빛이 우리를 향해 다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여러 개였다.
카일은 놀라운 속도로 검을 고쳐 잡고 그것을 튕겨 냈다. 날아왔던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증명하듯 크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비수다. 마법을 사용했고. 제임스!”
“예, 전하!”
제임스가 나서며 등에 메고 있던 방패로 나를 보호했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공격은 카일을 노리고 있었기에 제임스가 실력 발휘를 할 일은 많지 않았다.
푸르게 빛나는 날붙이의 수는 기껏해야 네댓 개에 불과했지만, 수차례 튕겨 내도 다시금 쉼 없이 날아들었다.
섬뜩할 만큼 예리한 날이 카일의 망토와 털 장식을 베어 냈다. 마치, 녹은 버터를 베어 내듯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때때로 그것들은 카일의 갑옷에 부딪치기도 했다. 까가각,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는 것을 보며 내가 외쳤다.
“어딜!”
내가 앞으로 나서자 제임스는 반사적으로 나를 뒤로 당기려 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카일의 전신에 얇고 푸른빛이 감돌더니 네 개의 비수를 동시에 튕겨 내는 것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현재 보유 현황 | ♣×3]
문제는 방금의 방어로 가진 행운 수치를 거의 다 썼다는 점이었다.
나는 제임스에게 통로에 갇힌 다른 기사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카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내 곁으로 가까이 붙어 왔다.
제임스가 물러나자마자, 나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비겁하게 숨어서 잔재주나 부리지 말고, 나오시지!”
커다랗게 내지른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나지막한 웃음이 끼어들었다.
“난 숨은 적이 없는데.”
나와 카일의 고개가 위로 번쩍 들렸다.
목소리는 우리의 위에서, 그리고 뒤에서 들려왔다. 무너져 막힌 동굴 출구 위에 쌓인 거친 얼음덩어리 위에 사람 한 명이 무심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어 말했다.
“안녕.”
새하얀 눈을 닮은 사람이었다. 북부의 녹지 않은 얼음을 빚어 만든 것처럼 희고 불길했다. 마치, 그 자체가 이 땅을 척박하게 만든 추위인 것처럼.
곧고 긴 백발의 남자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아 속이 울렁거렸다.
“너구나. 세계의 틈을 벌려 낸 이가.”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내가 사납게 대꾸하자, 카일이 검 끝으로 남자를 겨누었다.
“넌 누구지?”
“예상하셨다시피…….”
남자의 얇은 입술이 매끈한 곡선을 그렸다.
“동굴에 작은 선물을 놓아둔 사람이지요. 어떠십니까, 전하. 이번 선물은 마음에 좀 드십니까?”
“선물…….”
카일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 단어라면 정말이지 신물이 난다는 태도였다.
남자는 아예 이죽거리기로 작정한 건지 양팔을 펼치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 유명한 대공작께서 직접 움직이실 줄은 몰랐는데. 의외야. 마인하르트의 이번 대 황자들은 하나같이 성미가 급하군.”
흰 남자는 얼음 바위 위에 앉은 채 발끝을 까딱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일견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운이 좋아. 아, 너희에게는 운이 나쁜 건가? 귀찮지 않게 이 자리에서 죽어 주는 게 좋겠어.”
말이 끝나자마자 종적을 감추었던 비수들이 다시 날아들었다.
나는 그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 커다란 바위로 뛰어가 몸을 바짝 붙이고 카일을 주시했다.
예상대로 남자의 공격은 카일에게 집중되었다. 그만 죽이면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처럼 맹렬하고 집요한 기세였다.
물론 카일도 재빠르게 검을 휘두르고 검기를 날리며 방어했지만, 사방에서 날아드는 네댓 개의 비수를 감당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위험하다. 공격을 하나라도 놓치는 순간, 저 뾰족한 끝이 카일의 급소를 후벼 팔 것이다. 벌써 갑옷 군데군데 움푹 파인 자국이 남기 시작했다.
초조해진 나는 시스템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야, 뭐라도 좀 줘 봐!’
아이템 말고. 그건 먹어야 하잖아!
아이템 가지고 어중간하게 달려들어서 카일을 혼란스럽게 하느니, 여기 딱 붙어 서서 카일을 보조하는 게 훨씬 낫다. 활을 쏘자니, 저렇게 맹렬하게 움직이는 것들을 정확히 맞힐 자신이 없었다.
‘행운 수치!’
지금 남은 수치로는 공격 한 번도 제대로 막아 내기 어렵다. 수치가 적을수록 방어막이 얇고, 또 약했다.
저 비수를 상대로 모험할 수도 없으니, 넉넉하게 채우는 게 좋겠는데…….
‘주변에 마수도 없고. 무슨 수로 행운을 긁어모으냐고. 다른 방법 없어?’
기적 수치를 깎아서라도 행운을 채울 수 있다면 이번만큼은 타협할 용의가 있었다. 그만큼 카일은 내게 중요한 사람이고,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러나, 시스템의 대답은 의외였다.
[행운을 강제 충전하겠습니까?]
나는 화색이 되어 물었다.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나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뭐야. 그게 돼? 진작 좀 알려 줄 것이지.”
내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백발의 남자가 물었다.
“거기 조그만 녀석은 뭘 그렇게 작당…….”
그러나, 그 순간 제자리에서 도약해 검을 휘둘러 오는 카일 때문에 남자는 자리를 황급히 피했다.
“이런.”
“그쪽에는 신경 끄시지.”
카일이 붉은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달려들었다.
“네 상대는 나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끌어온 그가 남자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나는 바위를 뛰어넘으며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시스템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강제 충전. 그래, 그것 좀 하자. 어떻게 하는 건데?’
평소의 장난기 같은 건 온데간데없는, 파란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당신이 이곳에서 새로 얻은 삶은 수많은 행운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행운은 생명을 유지하는 힘. 그러므로 필요한 행운은 당신의 생명력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몇 줄의 문장이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내 목숨을 당겨 쓰면 ‘행운’을 충전할 수 있다는 거잖아.
[신중하게 선택하세요.]
[생명력을 당겨 쓰는 것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내가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남자는 다시 다섯 개의 비수를 꺼내 카일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비수와 마법으로 파랗게 벼려 낸 레이피어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니만큼 카일이 주춤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남자는 카일을 향해 달려들면서도 눈동자를 살짝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림처럼 올라간 입꼬리가 기이한 인상을 만들어 냈다.
“아주 재미있는 힘을 쓰네.”
“…….”
“가지고 가서 그 조그만 몸을 반으로 뚝 갈라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야.”
가르기는 무슨.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재빨리 속삭였다.
‘지금 부작용이고 뭐고 따질 때가 아니야. 저거, 완전히 미친놈이라고!’
나는 눈을 딱 감고 외쳤다.
‘백 개만 충전하자. 얼른!’
[현재 보유 현황 | ♣×103]
그리고 그 순간, 남자가 마음을 고쳐먹은 듯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카일 또한 위기를 직감하고 전속력으로 내게 다가와 양손으로 검을 쥐고, 내 앞을 막아섰다.
쨍―!
나는 가진 모든 행운을 끌어, 카일의 앞을 막았다.
비수와 비슷하면서도 더 짱짱하고 맑은 푸른색이 장벽처럼 드리워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정확히는 비수가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꽉 쥐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됐다!’
하지만 안도하기가 무섭게, 속에서 뜨끈한 열이 치솟았다.
“……커헉.”
“슈!”
부작용.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고, 나는 그대로 목구멍까지 치솟은 피를 토해냈다.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속이 뜨겁고 불쾌했다. 이해할 수 없는 통증과 어지러움에 몸이 앞으로 훅 꺾였다.
카일이 크게 당황하며 내 허리를 당겨 안았다.
“이게 무슨…….”
“어쩔 수 없었어요. 얌전히 죽을 수는 없잖아.”
나는 잔기침 몇 번으로 입에 고여 있던 피를 뱉고, 우리 앞에 내려선 남자를 쏘아보았다.
“당신이 누군지 알겠어.”
푸른 눈동자가 휘어졌다.
“나를 알겠다고? 꼬마야. 신기한 일이군. 자, 말해 봐. 내가 누구지?”
꼬마는 무슨. 나이 스물일곱, 180센티미터 조금 안 되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시다.
나는 시스템이 알려 주었던 단어를 그대로 읊었다.
“무법 지대의 주인.”
“…….”
“서리 마탑의 정복자. 세계의 끝에서 태어난 놈. 규율을 어기는 자들. 선물이 어쩌고, 하면서 되먹지도 않은 말을 농담이랍시고 지껄이는 걸 보니, 마법사단 소속일 거고.”
“…….”
손등으로 피를 훔친 내가 따지듯이 말했다.
“하얀 망령.”
“흐음…….”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카일은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오면 찌르겠다는 듯 검을 바짝 들며 내 몸을 제게 붙였다.
남자는 그런 위협 같은 건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마지막 말은 조심하는 게 좋아. 그 호칭을 함부로 입에 올린 이들은 전부 살아 있지 못했거든.”
마치 오늘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벼운 어조였지만, 모든 낱말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어 그 어떤 협박보다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확실히 신기하네. 무법 지대의 놈들만 아는 단어를 네가 쓸 줄은 몰랐거든. 아둔한 마인하르트 놈들은 북부의 사정을 알 턱이 없고. 대체 어떻게 알아냈을까?”
그가 가볍게 땅에서 발을 떼었다 붙이자, 얼음 조각이 콰득 부서졌다.
“기록되지 않은 호칭을 알고, 마법이 아니면서도 비슷한 힘을 쓰고, 그 대가로 피를 쏟아 냈지. 허공을 보며 중얼거린 건…… 예지 능력?”
“…….”
눈치 한번 귀신같이 빠르다. 잘못 대답했다가는 실마리만 쥐여 주는 꼴이기에 나는 침묵을 선택했다.
남자의 수려한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아무래도 좋아. 답은 스스로 찾을 때 가장 흥분되는 법이지. 그러니, 꼬마야. 대답하고 싶어도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 즐거움을 방해하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거든.”
대답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욱신거리는 속을 달랬다.
하지만 결국, 불평 한마디가 토해져 나왔다.
“정성스럽게 미친놈이네…….”
놈에 대한 내 한 줄짜리 감상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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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