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83화 (83/129)

83화. 동굴 안 햄스터 (1)

우리는 차디찬 땅에서 하룻밤 야영한 뒤, 이튿날 광산으로 향했다.

기사들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어지는 여정에 만족한 듯 표정이 밝았다. 내 무장을 도와주고 이것저것 알려 주는 모습이 제법 의욕적이기까지 했다.

“고블린을 조심해야 합니다.”

동굴에 들어가기 전, 나는 제임스에게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그는 내 말이 이상하게 들렸는지 고개를 기울였다.

“고블린은 이쪽까지 내려오는 일이 없다. 보통 설산 지대의 협곡에 무리 지어 살지.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먼저 공격해 오지도 않고.”

나는 어디까지 말해 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변종이 있을 수도 있어요.”

내 대답에 제임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해한다. 아무래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어렵겠지. 아직 고블린들이 제 서식지 바깥으로 나오는 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를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나를 선택한 카일을 믿는 거겠지만.

‘타인의 신뢰는 쉽게 얻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카일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새삼스럽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가, 다른 병사들이 말을 안전한 곳에 잘 숨겨 두었다는 보고를 전해 주었다.

“들어가지.”

낮게 깔린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했다. 기사들이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자세를 고쳤다.

“마법사에게 불을 나눠 받아라. 두 명이 한 조로 움직인다. 나머지는 지시받은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될 거다. 벽을 함부로 만지지 않도록 주의해라.”

“예, 기사 단장님!”

제임스의 지시에 기사들이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나는 당연하게도 카일과 함께 움직이게 됐다. 검을 뽑은 그를 대신해서 마법으로 밝힌 작은 램프로 주변을 비추는 역할이었다.

동굴 안의 공기는 차갑고 습했다. 불길하고 서늘한 어둠이 도처에 짙게 깔려 있어서, 이 광산 안에 값진 보석들이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잘그락, 잘각. 잘각.

발밑에서 돌인지 얼음인지 모를 것이 연신 밟히고 부서졌다. 그 소리마저도 어쩐지 섬뜩하게 들려,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물론, 그 두려움에 질 수는 없었다. 나는 램프를 바짝 들어 올렸다. 잎사귀 같은 녹색 불빛이 부지런히 타오르며 길을 밝혀 주었다.

“뭔가 보이나?”

카일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아뇨, 하고 짧게 답했다.

현재 나는 인간용 안경인 ‘진실의 눈’을 쓰고 있는데, 아직은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사실 마수의 기척을 확인하는 데는 ‘통찰의 눈’이 더 유용하지만, 그걸 위해서 일찌감치 햄스터로 돌아가는 건 비효율적인 짓이었다.

“적어도 변이종은 없는 것 같아요. 계속 가도 될 것 같습니다.”

“좋아.”

변종 고블린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우리는 사위를 밝히며 침착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동굴 벽에는 최대한 손을 대지 않았다. 폭발물이 묻혀 있을 것을 염려해서였다.

곧, 폭발이 일어났다는 지점에 다다랐다.

열 명이 전열을 갖춰 설 수 있을 만큼 뻥 뚫린 공간은 마치 광장 같았다. 마법 폭발 때문에 통로가 넓어진 모양이었다.

램프를 가진 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팔을 들어 올렸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등 뒤에서 기사 한 명이 당황한 듯 숨을 들이켰다.

“전하!”

그뿐만이 아니었다. 변화와 동요는 차례로 우리를 덮쳤다. 마법으로 밝힌 램프가 돌연 꺼져 버린 것이다.

마법사가 긴장감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력의 간섭입니다.”

카일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방어 진영으로. 가까이 붙어라.”

기사들은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고, 어둠 속에서 자리를 잡았다. 서로 등을 맞댄 채 검을 고쳐 쥐는 자세에 서린 의도는 명백했다.

그건 카일의 등을, 그리고 카일의 뒤에 따라붙은 나를 둘러싸고 지키는 형태였다. 나를 진영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진영의 중심으로 두고 보호하는 것이다.

“슈. 반걸음 더 가까이 와라.”

“네, 전하.”

나는 그의 등 뒤에 아예 바짝 달라붙었다. 제임스가 내 오른편을 지켜 서는 것이 느껴졌다.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이건 현실이니까. 열흘간 함께 섞여서 훈련 좀 했다고 평생 검을 휘두른 기사들과 동등해질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하면 된다. 나는 안경을 고쳐 쓰곤 주변을 넓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보여요.”

내가 조그맣게 말하자, 카일이 몸을 굳히며 물어 왔다.

“뭐가 보이지, 슈?”

나는 그사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뻥 뚫린 공간의 벽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빛이 보여요. 아니, 빛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희미해요. 마치, 긁힌 자국처럼……. 어두워지고 나니까, 이제 보이는 것 같아요. 푸른색이고요. 익숙한 색인데……. 어디서 봤지?”

제임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아.”

“예?”

“우리에게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뿐이다.”

“……아, 혹시.”

나는 뿔테 안경을 재빨리 벗어 보았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위가 시커멓게 가라앉고, 빛을 놓친 내 동공이 팽팽하게 확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마수의 핵. 전하, 마수의 핵으로 만든 폭발물을 쓴 것 같습니다.”

“핵의 흔적을 읽었던 거군. 알겠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긁힌 자국뿐인가? 폭발물로 추정되는 빛의 덩어리 같은 건?”

“지금으로서는 없습니다. 특별히 더 밝은 곳이 곳도 없는 걸 보니까, 폭발물은 하나가 전부였던 것 같은…… 어? 잠시만요.”

나는 카일의 어깨에 손을 얹고 신중하게 말했다.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 봐도 되겠습니까? 긁힌 자국이 없는 곳이 보입니다.”

카일은 제 어깨에 올라온 내 손을 쥐더니, 느린 걸음으로 함께 앞서 걸어갔다.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며 눈썹 근처까지 내려온 앞머리를 불어 넘겼다. 손댄 적이 따로 없는데도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바람이 부는 것 같아요.”

“동굴에 바람이?”

카일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바깥으로 통하는 길이겠군.”

폭발물을 이곳에 심어 둔 이가 사용한 통로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긁힌 자국이 없는, 뻥 뚫린 어둠을 가리켰다. 저곳이 바로 그 길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카일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와 자리를 바꿔 앞장섰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벽을 더듬어 가며 앞으로 걸어갔다.

요사하고 푸른빛이 손끝을 희미하게 비추었다가 사라졌다.

[마수의 핵.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원인으로, ‘겨울의 심장’의 원천이다.]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이 폭발에 휘말렸던 사람들이 ‘서리의 낙인’을 얻어, 냉기가 심장을 향해 퍼져 나갔다고 했지. 비슷한 계열의 마법인 듯했다.

이 폭발물을 심어 둔 마법사 놈은, 어쩌면 사람들을 상대로 제 마법의 위력을 실험해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익히 보고 들었던 마법사단 놈들은 그러고도 남을 자식들이었으니까.

‘쓰레기 같은 놈들.’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어둠을 헤집듯이 나아갔다.

바깥으로 향하는 통로는 비좁았다. 나조차도 허리를 조금 숙이고 어깨를 움츠려야만 걸을 수 있었으니, 덩치 큰 기사들이 어떨지는 안 보아도 훤했다.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에 이어 카일이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좁군.”

“조금만 참으십쇼. 나가서 허리 실컷 펴시면 되잖아요.”

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눅눅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함임을 알았는지 카일이 작게 웃었다.

이따금 차갑고 습한 바람 몇 자락이 내 코끝을 스쳤다가 흩어졌다. 이내 톡, 아주 작은 얼음덩어리가 안경에 부딪히는 것이 느껴졌다.

와드득.

그때, 머리 위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어둠 속에서 꽉 쥔 손아귀를 더듬어 보았다.

카일이 내 머리 위로 손을 뻗어 고드름을 부서뜨렸다.

“떨어질 것 같아서.”

“잘 안 보이는 것 아니었습니까?”

“안 보인다.”

“감이 좋으시네요.”

그는 내 농담에 웃는 대신, 낮게 읊조렸다.

“빨리 나가는 게 좋겠어. 급하게 뚫은 통로라 불안정하다.”

“좋아요.”

우리는 발을 재촉해 더 앞으로 나아갔다. 카일의 말대로 머리 위에서 불안하게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나는 듯해, 더욱 서둘렀다.

이내, 멀지 않은 곳에서 새하얀 빛이 내 눈을 찔러 왔다.

출구였다.

“내가 먼저 나가지.”

“좁아서 자리를 바꾸기가 힘들 텐데요.”

그러자, 카일이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더니 제 품으로 바싹 당겼다.

“통로가 좀 넓어져서 다행이군.”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따스하게 퍼지는 숨결마저도 닿을 정도였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댄 채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대로 카일은 나를 감싸 자리를 바꾸었다.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얼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서로의 존재가 유독 뜨겁게 느껴지는 찰나였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열렬한 시선이 얼굴 곳곳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부끄러웠지만, 싫지 않았다.

카일이 새하얗게 빛나는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새파란 빛이 쇄도했다.

“전하!”

그의 목덜미를 향해 무언가 뻗어져 나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내가 가진 ‘행운’을 끌어모았다.

‘목을 보호해야 해!’

쨍!

카일의 목덜미 근처에서 푸른빛이 퍼져 나오며, 맹렬히 날아들던 것이 튕겨 나갔다.

공격을 튕겨 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잠시.

“자, 잠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3)============================================================

북부대공의 햄스터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