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햄스터도 석 달이면 활을 쏜다 (4)
먹고 살기 더럽게 힘드네!
나는 축축 처지는 몸뚱이를 억지로 이끌고 카일의 침실로 향했다.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내질렀다.
내일이 떠나는 날이니 오늘은 평소보다 훈련 강도를 한참 내렸다고 하는데도, 내게는 여전히 모든 게 벅찼다.
“하루에 다섯 시간씩 운동이라니. 이건 미친 짓이야…….”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그만두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화살 열 발을 쏘는 것으로 카일의 마음을 돌릴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블레이크 기사단을 설득할 수는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그냥 돌아가고 싶은데.”
“그건 안 되지.”
침실 문 앞에 나와 있던 카일이 내 혼잣말에 대답하며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이어 맥없이 허물어지는 내 몸을 받아 안았다.
“전하. 저, 땀투성이인데요.”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다.”
“배도 고파요.”
“음식도 차려 놨고.”
“피곤해 죽을 것 같아요.”
“먹고 나서 함께 쉴까.”
그는 싫은 내색 없이 나를 돌보았다.
씻고 나온 내 머리칼을 말려 주었고, 식사하는 동안에는 성 밖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나른해진 내 몸을 안고 나란히 누워, 팔베개를 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카일의 얼굴은 어딘가 어두웠다. 때때로 내가 근육통 때문에 앓는 소리라도 내면,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나는 그의 품을 파고들며 말했다.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전하.”
카일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고초를 겪는 것을 보는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있나?”
“과보호예요. 다른 기사들은 저보다 더 혹독하게 훈련하던데요. 그러니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있는 대로 고집 부려 놓고, 발목 잡으면 안 되니까.”
나는 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나름대로 위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가 내 손에 얼굴을 가볍게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널 걱정하는 마음까지 억누를 수는 없어.”
“네, 그래도…….”
짧은 침묵 후에 카일이 말했다.
“하지만, 네 뜻을 그렇게 관철하는 일 자체는 싫지 않다. 그게 너다운 행동이니까. 널 좋아한다는 건, 통제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야.”
“알아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요.”
“네 실력은 부족해.”
그의 붉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오롯이 비쳤다.
“하지만, 점점 나아지겠지.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졸음 때문에 조금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가 정말로 더 잘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카일이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긍정이었다.
그의 확신에서 나는 어떤 안정감을 얻고 만다. 그가 그렇게 말하며 웃을 때면, 정말로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카일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나를 진심으로 지지할 것이다. 그게 설령 그가 바라지 않는 방향이라고 해도, 내 선택을 존중하겠지.
“이제 좀 잘게요.”
“그래.”
나는 그의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자 카일이 화답하듯 고개를 숙여 내 이마와 두 눈가, 코끝, 그리고 입술에 키스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웃음이 절로 났다.
어느새 자그마한 햄스터로 돌아온 나는, 그의 머리맡에 웅크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적막이 우리를 감싸 꿈의 세계로 데려갔다.
*
신광산 탐사 당일이 되었다. 나는 긴장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일 남았습니다.]
‘괜찮을 거야.’
아니, 괜찮아야지. 이런 위기를 처음 겪는 것도 아니니까.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애써 무시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잘 지켜 낼 수 있을 거다. 지금껏 잘 넘겨 왔으니까.
카일이 내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다정함이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아마 내가 긴장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중간에 슈가 사라져도 너무 놀라지 마라. 안전을 위해 소형화 마법 물품을 사용할 예정이다.”
카일은 기사들에게 내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냈다. 지난봄, 벨리알을 도와 정쟁에 참여한 값으로 마법 물품을 받아 냈다고도 설명을 덧붙였다.
“부족한 전력으로도 안전하게 동행하기 위함이다. 이번 탐사에 무법 지대의 마법사들이 연루되었을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변이종과 맞서 싸워야 할 수도 있다. 그때 슈의 지식이 도움이 될 거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소형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나는 견과류 상점에서 미리 산 ‘미니미니 브라질넛 마들렌’을 먹은 뒤, 카일의 손바닥 위에서 위풍당당한 자세를 취했다.
“아, 들은 것도 같아. 마수학자님이 정쟁에서 마법 같은 것을 사용하셨다고.”
“그게 벨리알 전하의 지원품이었군.”
“엄청 비쌀 텐데…….”
“우리 같은 놈들한테나 비싼 거지. 무려 황자셨잖아, 황자.”
기사들은 웅성거리면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호기심이나 의심이 섞인 시선도 있었지만, 어쨌든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듯했다. 특히나 체력이 약한 나를 효과적으로 데리고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한 듯했다.
[현재 기적 수치 58.0%]
애석하게도 기적 수치의 앞자리가 바뀌었다.
‘‘불러오기’ 시간도 한 시간 줄어들겠네.’
그래도 의심 사지 않으려고 도토리 쿠키를 꾸역꾸역 먹어 대는 것보다는 훨씬 효율적이니까.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카일의 주머니 속으로 스르르 기어들어 간 뒤 ‘불러오기’를 해제했다. 주머니를 들추지 않는 이상, 안에 든 것이 조그만 사람인지 햄스터인지는 알지 못할 거다.
“출발한다!”
탐사대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카일은 선두에서 말을 몰아 평야를 달려 나갔다. 덕분에 내 몸은 고열에 뻥뻥 터지는 팝콘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승차감 진짜 나쁘네.
아침 조금만 먹길 잘했다. 카일이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다가는 분명히 주머니에 토했을 거다.
―찌……. (우욱…….)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잠재우며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하나 꺼내 들었다. 러브러브 코너에서 산 아이템, ‘통찰의 눈’이었다.
[(o―o)++]
‘통찰의 눈’은 사람 전용 안경인 ‘진실의 눈’과 달리 햄스터 전용 안경인데, 이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쓰면 근처에 있는 마수의 기척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정확한 모양새까지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게임 미니 맵에 보이는 것처럼 붉은 점으로만 나타나서, 수 정도만 겨우 헤아릴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긴 하지.’
나는 재빨리 왼발을 들어 카일을 퍽퍽 찼다. 왼쪽 옆구리를 향해 힘차게 발길질을 이어 가자, 그가 기척을 느끼고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좌측을 조심해라! 오른쪽으로 붙어서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통과한다.”
“알겠습니다!”
산에 도착해서 갈림길을 앞두었을 때, 나는 안경을 고쳐 쓴 뒤 고개를 살짝 내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 보자…….
―찍! (여기다!)
나는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경사가 심하고 길이 울퉁불퉁하기는 하지만, 붉은 점이 열댓 개씩 모여 있는 왼쪽 길보다는 훨씬 안전할 거다.
카일은 내 조그마한 손가락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북동쪽 길로 간다.”
우리의 뒤편에서 따라오고 있던 기사 단장, 제임스 러셀이 말했다. 조금 불안한 듯 목소리가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전하. 이쪽은 와이번 둥지가 있는 지역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알고 있다. 그래도 괜찮으니 북동쪽으로 진입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길을 따라 올라갔을까. 걱정과 달리 주변이 조용하자, 기사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와이번들이 한참 활동할 시기인데…….”
“아무래도 먹이를 찾으러 떠난 모양이군.”
“정말 이쪽이 더 안전했잖아? 협곡으로 따라 돌아갈 필요도 없고. 체력을 아낄 수 있겠어.”
나는 의기양양하게 주머니 안에서 엄지를 척 들었다. 시스템 또한 기분이 좋은지 거들었다.
[(*^▽^*)b]
광산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과 체력을 최대한 아낄 수 있다는 건 큰 이점으로 다가왔다. 기사들이 밝은 목소리로 카일과 제임스에게 물었다.
“전하, 단장님. 대체 어떻게 길을 이렇게 정확히 아시는 겁니까?”
“저도 궁금합니다, 전하.”
카일이 낮게 웃더니 주머니를 톡톡 쳤다.
“슈가 알려 주고 있다.”
“와, 진짜 대단한데요.”
“어떻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살았습니다!”
“마수학자님, 이쪽 한 번만 봐 주시면 안 됩니까? 작아진 모습도 좀 귀엽던데!”
“맞아요. 인사 좀 해 주십시오!”
되겠냐. 뿔테 안경 쓴 햄스터랑 인사하고 싶은 거 아니면, 자꾸 부르지 마라.
‘그나저나, 꽤 춥네.’
아무리 여름이라도 북쪽으로 한나절 넘게 달려오니 눈발이 날리는 게, 확실히 북부의 악명 높은 추위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부르르 떨자, 카일이 주머니 너머로 나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이 산을 넘어가서 야영을 준비하도록 하지. 예정보다 이르게 도착하게 되었으니, 내일 아침 광산 안쪽으로 진입한다!”
“알겠습니다, 전하!”
달그락거리는 말발굽 소리 너머로 그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따뜻해질 거다. 너무 걱정 말도록.”
―찍. (좋아.)
“그나저나, 얼굴을 거의 못 봐서 아쉽구나.”
―찌직. 찍. (어차피 내일 많이 볼 텐데, 뭘.)
“그래, 너도 보고 싶으냐?”
―찌이익. (아닌데…….)
이어지는 듯 아닌 듯한 대화를 이어 가고 있는데, 근처에서 걷던 제임스가 카일에게 말했다.
“근데, 어디서 쥐 우는 소리 같은 게 나지 않습니까, 전하? 새가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북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들 귀가 밝아?
그 이후로 나는 야영 준비를 할 때까지 찍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의 주머니에 얌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에휴.’
기구한 햄스터 팔자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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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