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햄스터도 석 달이면 활을 쏜다 (1)
나는 어제 보았던 보고서를 펼쳐 둔 채 생각에 잠겼다.
‘북부 신광산 탐사……. 거기서 ‘서리의 중독’으로 추정되는 마법 중독 현상이 일어났다고 했지.’
어제는 미처 몰랐는데, 카일이 그 보고서에 파란 클립을 끼워 둔 것이 보였다. 직접 움직여 상황을 확인하겠다는 뜻이 담긴 표식이었다.
‘그럼, 신광산까지 가겠지? 정확히 어디쯤이더라.’
나는 책장으로 다가가 익숙한 책 사이에서 제목 없는 얇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이어 그 책장 사이에서 납작한 열쇠를 빼냈다.
이건 카일의 책상 서랍을 열 수 있는 열쇠였다.
카일은 성에 한차례 도둑이 든 이후로 중요한 물건이 든 서랍을 잠그는 버릇이 생겼는데, 당연하게도 열쇠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그의 측근 중에서도 손에 꼽혔다.
‘나한테는 생각보다 금방 알려 줬지만.’
단순히 연인이기 때문에, 혹은 그가 귀여워하는 반려 마수이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북부에서 지내는 동안, 단순히 카일의 보호 아래서만 살아가는 백성이기를 거부했다. 사람으로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나 최선을 다해 카일의 일을 돕고, 의견을 냈으며, 여러 고민을 맞들었다.
그러다 보니 카일은 계산이 빠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나를 신뢰했다. 특히 돈 계산 같은 거.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훨씬 빨랐지. 대한민국 공교육의 승리다.
나는 서랍 맨 위 칸을 당겨서 지도를 꺼냈다. 카일이 직접 그린 것으로, 북부에 대해 가장 자세히 적힌 물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촤르륵. 책상에 지도를 펼치자, 황량한 북부의 지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블레이크 성으로부터 북쪽으로 이어진 너른 평야. 한 해의 절반쯤 얼어 있는 그 땅을 지나면 가시처럼 삐죽삐죽 솟은 전나무들이 가득 들어찬 삼림 지대가 나온다.
험준한 산 아래 깊은 곳에는 동굴이 있고, 그곳에서는 제법 쓸 만한 광물이 나온다. 이 황량한 땅의 사람들이 지금껏 굶어 죽지 않고 버티는 이유 중 하나다.
다만 얕은 곳의 광물은 이미 사람들이 다 채굴한 상황이라, 캐스터네츠 상단과 정식으로 교역하기 시작한 이후로부터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새로 탐사에 나선 곳이…….
‘이쪽, 그리고 이쪽. 두 군데였지.’
지리를 따져 보면 삼림 지대 중에서도 최북단이다. 지대가 고르지 않은 탓에 왼쪽 탐사 지역은 기실 설산 지대라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마법사단 놈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아니, 아니어야 했다. 이곳이 뚫린다는 건 그들이 설산 지대를 정복했다는 뜻과 같으니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누가 먼저 설산 지대를 손에 넣느냐인데…….”
이건 북부의 영원한 숙제였을 것이다.
남쪽으로 내려오려는 마법사단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블레이크의 기사들은 북부를 지켜 내야 했고, 이 땅을 자신들의 통제권 안에 넣어야 했다.
이건 카일이 죽어도, 죽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 부분이겠지.
“그럼, 문제가 생긴다면 반드시 여기일 것이고…….”
그렇다면 없던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 본래 일어날 일의 대상이 카일로 바뀌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속이 차갑게 식어 가는 기분이었다.
‘일어나야 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난다.’
그건 이 세계에 제법 오래도록 머물며 알아낸 법칙이었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원작의 굵직한 사건은 반드시 일어난다. 누군가의 죽음이나 정치적인 싸움이 바로 그 예였다.
이런 상황에 내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은, 그 운명의 대상을 바꾸거나 대상이 입을 사건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원작의 내용을 알고,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이 세계의 모든 일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시스템. 거기 있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 파란 창이 떠올랐다.
[저는 언제나 여기 있어요! (≧∇≦)ノ]
‘그럼…….’
나는 손끝으로 엑스 표시가 되어 있는 신광산 지역을 짚으며 속으로 말했다.
‘<겨울의 심장>에서 여기에 관련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겠지? 내용을 좀 보자. 북부 광물과 신광산 탐사, 그리고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의 정보가 필요해.’
잠깐의 침묵 후에 시스템이 대답했다.
[자세히 기술되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나도 물러나지 않았다. 카일의 안위가 걸린 이상 적당히 한다는 선택지는 없다.
‘하지만 ‘설정’되어 있잖아?’
소설은 대개 그런 식이다. 본문에 자세히는 서술되지 않아도 설정된 값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뜻이다. 주인공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때문에 낱낱이 기술하지 않을 뿐이지.
‘그 틈을 좀 파고들어 보자고. 단순하게 설정된 값이라도 좋아.’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썩 긍정적이지 않았다.
[이 세계에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반발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열람하시겠습니까?]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반발’이라는 건…… 내가 이 세계의 질서와 섭리를 어그러뜨린 것에 대한 대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아마도 저번의 늪 염소 사태 같은 일이 일어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마법사 놈들에게 힘을 더해 주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무슨 일이 생기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죽음의 원인을 알아야 대처할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막연히 북부는 위험하니까 가지 말자,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 큰 혼란을 가져오지 않는 선에서 얘기해 줘.’
나는 시스템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아니면 마수학 도감처럼, 간접적으로 전달할 수도 있잖아. 응?’
어지간히 곤란한 모양인지, 시스템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초조함과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재를 나섰다. 어쨌든, 신광산 탐사에 관련된 일이니만큼 카일과 상의하는 게 옳으니까.
카일은 아마 마지막으로 연무장을 둘러보고 서재로 올 것이다. 서쪽 복도로 가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엇갈릴 일 없겠지.
그때,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내 앞으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의 사망 이후, 북부 블레이크 영지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영지민들은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블레이크 기사단의 단장, 제임스 러셀을 중심으로 뭉쳐 재건을 꾀했다.]
제임스 러셀.
나도 아는 인물이다. 지금도 블레이크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북부의 안전을 위해 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있으니까.
카일만큼 대단한 실력을 지닌 인물은 아니지만, 그 또한 성실하고 올곧은 성격을 타고난 사람이다. 나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지만……. 어느새 보좌관 자리를 빼앗겨 버린 것에 대한 사소한 질투 같기는 했다.
공적으로는 친절하고 깍듯한 편이니까, 뭐.
[제임스는 북부의 광물을 어떻게든 팔아, 배곯는 이들이 없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러셀 가문과 캐스터네츠 가문은 혼약으로 맺어진 사이였고, 제임스는 이를 이용해 경제적인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마법사들은 구심점이 사라진 블레이크 영지를 가지기 위해 남하하고 있었다.]
[마물과 함께.]
원작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카일을 잃은 뒤 블레이크 영지가 쇠락해 가는 과정에서 마물들이 남하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영지를 벗어났다고.
그 짧은 몇 줄에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을 줄은 몰랐다. 마수들의 습격조차도 마법사들의 계략이었단 거지.
‘말종 새끼들.’
나는 이를 으득 갈아붙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서리 귀신이 나오는 폐성? 절대 안 되지. 내가 그 운명만큼은 바꿔 주고 말 거다.
깜빡.
시스템 창이 다시 떠올랐다.
[결국, 제임스는 변종 고블린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고블린?
그것도, 변종이라고?
중요한 정보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카일의 생명을 위협하는 원인 중 하나가 고블린이라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이건 치명상일 뿐이다.
‘그럼, 다친 제임스를 죽인 건 뭐지? 마수인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
이름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앞서 부탁한 것처럼 간섭을 줄이기 위해 가려진 듯했다.
시스템은 어떻게든 그 이름을 내게 전해 주려 노력했다.
[□□]
[╯︿╰;;;;]
[□□]
[□□]
이내 간접적으로 그를 표현할 만한 단어들이 내 시야를 어지럽게 채우기 시작했다.
[무법 지대의 주인]
[하얀 망령]
[서리의 마탑을 정복한]
[세계의 끝에서 태어난 것]
[규율을 어기는 자들]
그러니까, 북서부 마법사단. ‘서리의 마탑’ 소속의 이들이라는 거겠지. 로렌츠와 결탁한 그놈들 중에서도…… 어쩌면 가장 강한 놈일지도 모르겠다.
마탑주인가?
그때,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 그 위에 덧씌워지듯이 떠올랐다.
[당신은 이미 □□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파르라니 빛나는 시스템 창을 읽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한 감각이 끼쳤다.
……뭐라고?
내가 만난 적이 있다고? 그게 말이 되나? 언제? 앞서 예상한 대로 대상이 마탑주라면 더더욱 만나 본 적 없다.
나는 이곳에 와서 대부분의 시간을 블레이크 영지에서 보냈다. 그 말인즉, 마법사 놈이 영지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이 땅을 집어삼키려 눈독 들이고 있는 승냥이 같은 놈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다소 섬뜩하게마저 다가왔다.
대체 언제?
그것만이라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더 이상의 열람은 위험합니다.]
시스템이 경고했던 정보를 억지로 열람했기 때문일까? 약간의 두통과 함께 속이 울렁거리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앞으로 고꾸라지기 전에 단단한 팔뚝이 나를 받쳤다.
“슈!”
나를 보고 급하게 달려온 모양인지, 카일의 호흡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내 허리를 받쳐 안은 채로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지? 어디 아픈가?”
“……전하.”
“그래.”
“북부…… 신광산에, 직접 가실 생각이시죠?”
“그래. 아까 기사들과 이야기를 끝냈다.”
“언제 가실 거죠?”
“약 열흘 뒤다.”
“…….”
“슈, 안색이 창백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침실로…….”
“전하.”
내가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열흘 뒤, 저를 광산 탐사에 데려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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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