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북부대공도 석 달이면 햄스터 말을 알아듣는다 (4)
오후가 되어 ‘불러오기’를 한 나는, 시간 맞춰 침실에 도착한 카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제 무릎을 툭툭 쳤다.
“이렇게 안는 거, 안 지겨우십니까?”
“전혀. 매일 새롭군.”
그래 보인다.
문제는 나도 이 자식 장단에 한 번 두 번 맞춰 주다가 적응해 버렸다는 거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카일이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내게 입맞춤을…….
“잠깐.”
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꾹 막으며 얼굴을 밀어냈다.
“뽀뽀는 좀 그만하세요. 이러다 입술 닳겠습니다.”
“음.”
카일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만이라니. 오늘은 제대로 한 적도 없는데. 처음이지 않나.”
“처음은 무슨.”
내가 입을 비죽 내밀며 말했다.
“아까 ‘불러오기’ 직전에 보고 싶었다고 세 번. 물건 가지러 와서도 하고, 일어나서 다녀오겠다고 다섯 번은 했잖습니까. 은근슬쩍 뒤집어서 배에다가 하려는 거 발차기로 막아 냈더니 없던 일로 만드시네.”
아무리 바빠도 거르는 일 없이 꼬박꼬박해 댄다. 요즘은 그래도 배에다가 뽀뽀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 망정이지. 아니, 이젠 속에 이만한 사내놈이 든 걸 아는데도 아직도 그러고 싶냐고.
“아니지.”
카일이 진지하게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건 모두 캐슈넛에게 한 게 아닌가? 너는 방금 왔으니, 처음부터 세야지.”
“제가 캐슈넛인데요.”
“너는 사람이고, 그 녀석은 반려 마수다.”
“그 반려 마수 안에 든 게 이놈입니다, 전하. 정신 차리세요.”
“…….”
댈 만한 핑계가 사라졌는지 카일이 조용해졌다. 본인이 생각해도 실컷 뽀뽀한 것 같겠지. 뭐라고 말해도 다 변명 같겠지.
말할수록 궁색해지고야 마는 걸 알아차린 듯, 그가 붉은 눈동자로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카일의 표정이 뚱해졌다. 다른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면 필시 단단히 화가 나신 거라며 혼비백산하겠지만, 나는 아니다.
저건 화난 게 아니라…….
‘삐쳤네.’
안 그렇게 생겨서 은근히 잘 토라진다니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대답한 카일은 정말로 키스하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양팔로 내 허리를 감싼 채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불만을 표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 허락을 갈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그렇게까지 쳐다보실 일입니까?”
“…….”
“전하?”
“…….”
어휴, 내 팔자야.
생각해 보면 그렇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키스 한번 해 준다고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니고.
사실, 나도 싫지는 않았다. 다만 매번 그의 장단에 자꾸 휘말리는 것 같아서 빈정이 상했던 것뿐이지.
따지고 보면 완벽한 애인이 내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기뻐하고도 남을 일 아닌가?
능력 좋지, 돈 많지, 다정하지, 요즘에는 뜨개질도 곧잘 한다. 애정 표현이 잦다는 걸 떼고 생각해 보면, 그런 쪽에서의 실력도…….
‘……아, 이게 아닌데.’
나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게 조금 얄밉게 느껴졌다.
“이번만 봐드리는 겁니다.”
“…….”
“일하다가 중간에 와서 뽀뽀하는 건 안 돼요. 배에다 하는 것도 당연히 안 되고. 햄스터 안에 사람 있습니다.”
“…….”
“대답도 안 해 주실 겁니까?”
이내 카일이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래.”
“착하시네.”
나는 불경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후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그의 뺨을 감싸고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술을 붙였다 뗐다.
“자, 그럼 이제 슬슬 내려가서 어제 보고 받았던 광산…… 읍.”
어느새 올라온 큼직한 손이 내 뒷머리를 감싸고, 그대로 당겼다.
입술이 맞물리자마자 뜨거운 호흡이 입안을 파고들어 제멋대로 휘저어 댔다. 고개를 기울이고 달래듯 등을 두드렸다가 상체를 바짝 붙여 오는 행동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어깨를 쥐었다. 그러다가 입맞춤이 더 길게 이어졌을 때는 나도 모르게 넓은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의 품을 파고들듯이 움직였다.
눈앞이 어지럽고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틈 없이 맞물린 입술 때문에 허둥대느라 매번 호흡하는 법을 잊고 만다. 숨이 막혀 버둥거리자, 카일이 작게 웃었던 것도 같았다.
고개가 떨어지자마자 숨을 허덕거리며 몰아쉬었다. 뺨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이런.”
그가 내 등을 쓸며 작게 웃었다. 퍽 즐거워 보였다.
“어제보다는 짧게 한 것 같은데. 아닌가?”
“허억, 흐……. 그게 그거 같은데요.”
“폐활량을 늘리는 훈련을 하는 게 좋겠어.”
“적당히 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겁니까?”
“많이 하지도 못하는데, 오래도 못하면 내게 너무 야속한 처사가 아닌가.”
야속은 무슨. 나는 입을 비죽이다가 그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댔다.
너구리 같은 자식. 어느새 능청이 늘어서는 잘도 사람을 놀려 댄다. 이런 놈을 살리겠다고 종종거리는 내 팔자야…….
그래, 뭐. 당연히 싫다는 건 아니고. 왜 싫겠는가. 이 녀석이 사는 게 곧 내가 사는 일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마음인데.
“어쨌든, 그거 말입니다. 어쩐지 좀 신경 쓰여요.”
“그래. 나도 그래서 자료를 요청해 봤다. 증상이 발현되었다던 인부들도 직접 가서 확인할 참이고.”
“괜찮겠네요. 같이 가도 됩니까?”
“얼마든지. 그럼 서두르는 게 좋겠군.”
“네.”
들떠 있던 분위기가 어느새 평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번엔 무슨 문제가 생기려나. 뭐, 문제를 정확히 파악해야 해결할 방법도 생각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에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그리고 두 발을 땅에 딛고 선 채 습관적으로 그의 예상 사망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을 헤아리며 그의 안위를 살피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자, 가장 중요한 과제기도 했다.
어디 보자.
두 자릿수로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분간은 그렇게 위험한 일이 없다는 거겠지.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0일 남았습니다.]
……어?
뭐라고? 10일?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0일 남았습니다.]
나는 눈을 재빨리 비비고 시스템 창을 띄워 봤다. 하지만 세 번, 네 번을 반복해도 똑같았다.
열흘이라니? 왜 갑자기 이렇게 줄어든 건데?
“슈.”
한참 동안 충격으로 굳어 있자니 카일이 내 어깨를 조심스레 쥐고 흔들었다. 단정한 얼굴에 당혹감이 희미하게 어려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
여전히 나는 그에게 전부 솔직해지지 못했다.
어느 정도 미래를 내다볼 줄 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했고, 절대자의 도움을 받거나 그의 잔심부름 같은 걸 할 수도 있다며 둘러대기도 했지만…… 남은 수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무리 나를 전적으로 믿어 주는 그여도 충분히 꺼림칙하게 느낄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괜찮다고 하자니 별로 괜찮지 않았다.
‘……갑자기 남은 시간이 두 달도 넘게 줄어든 이유가 뭐지?’
유예가 거의 다 끝나 가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급하게 줄어들 줄은 몰랐다.
로렌츠가 움직이기 시작해서? 아니면 역시 북부 광산 쪽에서 문제가 생긴 건가? 혹시 마수들의 습격? 또는 마법사단?
“슈.”
“…….”
“……이봐, 슈.”
“…….”
“슈!”
따뜻한 손이 턱을 쥐었다. 내가 퍼뜩 정신을 차리자, 카일이 내 양 뺨을 쥐고 눈을 맞추었다.
“꿈을 꾸었군. 그렇지?”
그의 눈동자 속에 조금 마른 듯한 청년이 당혹감을 숨기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고스란히 담겼다.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확히는 못 봤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내게?”
“네, 아마도요.”
하필이면 날짜도 열흘이다. 벨리알과 함께 정쟁에 휘말렸던 때가 생각나서 불쾌함이 두 배로 늘어났다.
내 얼굴에 퍼진 불안과 짜증을 알아챈 카일의 표정도 썩 좋지 못했다. 그러더니 한쪽 입꼬리만을 애써 올리며 말했다.
“내가 죽는 내용이었군.”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확히는…… 일종의 소망이었다.”
소망이라고? 죽는 게? 황당하다는 듯 올려다보자, 그가 아, 하고 작게 탄식하더니 나를 놓아주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동요하는 이유가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그래도 그렇지, 좋은 꼴도 아닌데 냅다 죽는 꿈을 꿨으면 좋겠다고 말합니까?”
“…….”
“맞긴 해요. 하지만, 꿈은 꿈이죠.”
울렁거리던 속이 점차 가라앉았다.
시간이 촉박하기는 하나, 해낼 수 있다. 열흘이 아니라 하루가 남았대도 상관없다. 어쨌든 막아 낼 거니까. 죽게 두지 않을 거니까.
카일을 살리는 일이 기적 수치를 가장 많이 올리는 길이니까? 아니. 이젠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그 이유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어느새 그와 함께 지내는 게 좋았다. 그와 함께 바삐 돌아다니며 점점 따스해지는 북부를 살피는 일이 즐거웠다.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 입 맞추는 시간이 행복했다.
그래서 알아 버렸다. 그간 힘겹게 살아왔던 그 모든 시간이, 실은 사무치는 외로움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아서. 그 차가운 시간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할 수 있어요. 그렇게는 못 죽지.”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최대한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자, 그가 따라 웃는 것이 보였다.
“그래. 지레 겁부터 먹기에는 우리가 넘겨 온 위기가 있지 않나.”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우선 위협이 될 만한 일이 뭐가 있는지부터 살펴봐야겠습니다. 보고서 정리하실 거면 같이 가도 됩니까?”
“성을 먼저 둘러봐야겠는데…….”
카일이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에 먼저 가서 확인하고 있도록. 한 바퀴 둘러본 뒤, 병기고를 확인하고 곧장 가마. 안건별로 구분할 수 있으면 해 두고.”
“은근히 부려 먹으시네.”
현대인에게 단순 서류 분류 작업 정도야 껌이지. 나는 말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맡겨 두세요. 그럼, 저 먼저 갑니다.”
“그래.”
나는 그냥 몸을 돌려 나갈까 하다가, 이내 선심 썼다는 태도로 카일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럼 정말 갑니다!”
기분 탓이었을까? 등 뒤로 웃는 소리가 살짝 들렸던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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