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북부대공도 석 달이면 햄스터 말을 알아듣는다 (3)
파란 눈의 반려 마수가 제 주인을 말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불쾌하게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았다. 카일은 그 익숙하고 달가운 변화에 저도 모르게 웃었다.
‘언제부터 이 조그만 녀석을 의지하게 되었더라.’
적어도 한 계절은 넘은 일이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이 작은 몸에 갇혀 지내는 그의 운명 공동체는, 정말이지 저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는 일이 없었다.
제 손등을 꾹꾹 밟아 대는 애교스러운 몸짓을 보고 있자니 긴장이나 분노 따위로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조금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괜찮아.”
카일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러곤 반대편 손으로 캐슈넛의 몸을 부드럽게 쥐어 들고는, 그대로 보들보들한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웃었다.
“착하구나.”
조그만 발이 그의 손을 팍 차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으로 모자라 앞발로 뺨을 탁탁대며 때리기까지 한다. 아마, 떨떠름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찍.
분명 고운 말은 아니겠지. 알면서도 카일은 손끝으로 그를 연신 쓰다듬으며 애정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나도 많이 좋아한다.”
그의 반려 마수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이따금 제 주인이, 모른 척 오답을 내놓고 그 핑계로 저를 마구 귀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놔, 이놈아. 그만 놓으라고!’
정말 이상한 일이다. 어떤 때는 내 말을 귀신같이 알아듣는 것 같은데, 어떨 때는 정말 눈치를 약에 쓰려도 찾을 수가 없다. 아둔한 건지, 예민한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얼굴을 한 세 번쯤 때렸더니 카일은 그제야 내가 귀찮아하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는 나를 탁자 위에 내려 주고는,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을 보냈다.
‘……좋아하니까 봐주는 줄 알아.’
뭐, 좀 귀찮게 굴기는 해도 난폭한 녀석은 아니니까.
나는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서류 더미의 반대편, 편지 더미가 쌓인 곳으로 다가갔다. 편지들을 뒤적여 그 사이에 있던 익숙한 편지를 양손으로 쥐고 끙끙거리며 당겼다.
「블레이크 대공작께, 센 랑드.」
반가운 이름을 발견하자 카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햄스터용 소파를 가까이 끌어와 나를 앉히고는 편지를 펼쳐 함께 읽었다.
센이 보낸 편지는 총 두 장이었다.
「최근 신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외지인이 마을을 드나들고 있다고 해요. 수도 말씨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로렌츠가 보낸 사람임에 틀림없어요.」
첫머리를 장식한 내용은 조금 무거웠다. 나와 카일은 시선을 짧게 교환하고, 다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또한, 도굴꾼이 들었어요. 감자를 팔러 옆 마을에 다녀온 날 밤, 벨리알 전하의 무덤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고 해요. 전하께서 보내 주신 기사가 주변을 지키고 있어서 무덤을 훼손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시간문제일 거예요.」
이 또한 로렌츠가 벌인 일일 것이다. 이는 길지 않은 유예가 거의 끝나 간다는 말과 같았다.
카일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센이 적어 내린 글을 읽던 그가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사람을 좀 더 보내야겠군.”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이야기는 그 뒤로도 조금 더 이어졌다. 그러나 센이 보낸 이야기 중 불운하거나 힘겨운 주제만 있는 건 아니었다.
두 번째 편지에는 센의 근황이 적혀 있었다. 편지에 말린 꽃 한 송이를 넣은 센은 벨리알을 돌보며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이웃 사람들은 따뜻하고, 요즘은 자수를 연습하는 일에 푹 빠졌다고 했다.
카일은 센이 남긴 이야기를 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벨리알이 그렇게 쓰러진 이후로 센은 기약도 없는 기다림에 놓였지만, 마냥 불행하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가장 비천한 밑바닥에서도 삶을 향한 투지를 태우고, 한 자락의 기쁨과 희망을 절대로 잃지 않고 살아가는.
블레이크의 사람들은 으레 그랬다. 카일이 이 땅을,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수백 가지의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냥 이후 원작의 흐름이 상당히 바뀌었지…….’
내 생각에 응답하듯 시스템 창이 여러 개 떠올랐다.
[북부의 블레이크 대공작,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가 죽었다.]
내가 가장 지워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굴었던 그 문장이 일그러지더니 원작과는 다른, 지금의 상황이 반영된 새로운 이야기가 쓰였다.
[3황자,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로렌츠 세레나 마인하르트는 황제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심약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로렌츠는 세력을 완전히 규합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권력 앞에는 복종할지언정 진심을 내주진 않았기 때문이다.]
[센 랑드는 죽어 가는 벨리알을 끌어안고 ??로 향했다.]
살짝 들춰 본 <겨울의 심장>은 대부분 이전에 보았던 내용에서 변한 것이 없었다.
한 부분을 제외하고.
[결국, 로렌츠는 죽음을 번복하고 영생을 선사하는 ‘겨울의 심장’을 손에 넣기로 했다. 신의 영역을 능가하는 절대적인 힘. 모든 마법사의 열망 끝에 있는 것.]
그리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다.
원작에서 세레나가 벨리알을 살리기 위해 ‘겨울의 심장’을 손에 넣으려 했다면, 이번에는 로렌츠가 모종의 이유로 그것을 노리려는 것이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마음 깊이 믿지도 않는 로렌츠는 그것을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쓰겠지. 그런 이에게 힘이 주어지는 건 위험하다.
“유예가 끝나 가는구나.”
카일이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던 듯,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부터 바빠지겠어.”
―찍. (그러게.)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편지를 접어 작은 상자에 보관했다. 그러고는 서류와 편지를 조금 더 살필까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내젓더니 나를 들어 올렸다.
“오늘은 이만 쉬자꾸나. 침실로 갈까.”
―찌찍. (그래, 뭐.)
“내일은 몇 시에 올 수 있지?”
그와 나는 불편한 부분을 최소화하기 위해 몇 가지 신호를 정했다.
현재 내가 ‘불러오기’ 할 수 있는 시간은 여섯 시간으로, 하루의 4분의 1에 해당했다.
카일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내게 할애하고 싶어 해서, 나는 보통 잠들기 전 내일의 ‘불러오기’ 시간을 알려 주는 편이었다.
―찍찍.
참고로 ‘찍’은 오전 여섯 시부터 정오, ‘찍찍’은 정오부터 오후 여섯 시, ‘찍찍찍’은 저녁부터 자정까지, ‘찍찍찍찍’은 자정부터 아침까지다.
“그래. 그럼 정오에 깨우러 오마. 함께 점심이라도 들지.”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짓도 불편해서 못 해 먹겠다. 햄스터일 때도 말이 좀 통했으면 좋겠는데. 말하는 게 어려우면, 필담이라도 하면 안 되나?
‘대충 러브러브 코너에 뭐라도 추가해 주지?’
[( ̄▽ ̄)7]
한동안 신상품이고 뭐고 없었잖아. 이참에 일 좀 해라.
내가 시스템과 티격태격하는 사이, 카일은 나를 침실에 데려갔다. 어느새 그의 머리맡에는 햄스터 전용 침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이불까지 덮어 준 그는 다정한 시선으로 내가 눈을 감기만을 기다렸다.
잠깐만 기다려 봐라. 혹시 알아? 시스템이 생각보다 부지런히 일해서…….
[러브러브 코너~❤]
이거 봐. 다 준비해 놨으면서, 여태 조용히 있던 거. 꼭 구박해야 움직인다니까.
나는 이불을 발로 쓱 걷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기자기 문구 세트! (햄스터용) | ❤×500]
상당히 사악한 가격이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현재 보유 현황 | ❤×999]
보유 한계량을 네 자리로 올려 달라고 열 번은 말한 것 같은데, 아직도 반영이 안 됐다. 물론 요즈음의 카일은 나를 보기만 해도 행복한 모양이라, 모으는 건 금방이겠지만.
‘그래, 살 수 있으면 됐지.’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아기자기 문구 세트’를 구입했다. 그러자 조그만 볼펜과 수첩, 형광펜까지 야무지게 들어 있는 가방 하나가 내 앞에 툭 떨어졌다.
그러니까, 햄스터용이다.
―찍……. (작잖아…….)
작다! 작아도 너무 작아! 미니어처라고 해도 믿겠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퍽 찼다. 물론, 가방보다 내 발가락이 약했다. 나는 발끝에서 전해지는 얼얼한 감각을 없애기 위해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이게 뭐지?”
비스듬히 누운 채 내 모습을 보고 있던 카일이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이어 엄지와 검지로 내 가방을 들어 올리자, 닫혀 있지 않은 가방에서 수첩과 펜이 툭 떨어졌다.
나는 혀를 차고는 그의 손바닥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펜을 들었다.
이곳에 빙의하고 나서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면, 어쨌든 말이 통한다는 거다. 내가 적당히 평소대로 적으면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번역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카일의 시선을 느끼며 삐뚤빼뚤하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카일은」
마지막 글자를 쓰다가 펜을 놓쳐서 그만 찍 긋고 말았다.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은근히 오기가 생겨서 거의 수첩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을 만큼 얼굴을 박고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수첩에 적히기 시작했다.
「미련퉁이 바보.」
나는 의기양양하게 수첩을 내밀었다.
―찍! (읽어 보시지!)
내 눈에도 작게 보일 정도라서, 아마 그에게는 거의 안 보일 거다.
예상대로 카일은 한참 동안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그가 수첩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돋보기 하나 놔 드려야겠네.
“…….”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그가 갑자기 나를 돌아보았다.
뭐. 왜.
아무렴 대단한 사랑 고백이라도 적혀 있었을 것 같냐? 꿈도 야무지시다.
“슈.”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더니 나를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나는 바짝 긴장한 채 양손을 교차해서 엑스 자를 만들어 보였다. 폭력 금지. 반려 마수를 사랑으로 돌봐주세요.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쪽.
[(―3―)!]
“…….”
카일이 내게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도 좋아한다.”
……제대로 알아들은 거 맞아?
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번역된 거…… 맞지?
―찍! (야! 뽀뽀 그만해!)
“그래, 그래. 네 마음 다 안다.”
―찌찌찍! (하나도 모르고 있거든요? 말도 못 알아듣더니, 이젠 글자도 못 읽냐?)
“나도 언제나 네가 가장 좋다니까.”
―찌익! (아오!)
미련퉁이! 바보! 말도 못 알아듣는 놈!
나는 쏟아지는 키스 세례를 받으며 생각했다.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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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