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북부대공도 석 달이면 햄스터 말을 알아듣는다 (2)
지옥 같은 대한민국의 여름과 비교했을 때, 블레이크의 여름은 확실히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겨우내 쌓여 있던 눈이 완전히 녹으면서 마치 늦봄처럼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카일의 주머니 안에서 고개를 내민 나는, 창으로 들어오는 여름 볕을 구경하며 한가롭게 흥얼거렸다.
발걸음에 맞춰 찌익 소리가 나자 카일이 검지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어 코로 툭 쳐 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봐준다.
[♪(´▽`)]
나는 덩달아 신이 난 시스템을 뒤로하고 눈앞의 기적 수치를 살폈다.
무려 60퍼센트. 정쟁 때 물 쓰듯이 썼던 걸 생각하면 정말 대견할 정도의 발전이었다.
손해가 막심했던 내 기적 수치의 상황을 도와준 건, 다름 아닌 벨리알이었다.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일 남았습니다.]
벨리알은 죽지 않았다.
센이 편지를 통해 전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몇 번이고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상처도 아물고 호흡도 많이 안정됐다고 한다. 다만, 의식은 여전히 찾지 못했기 때문에 마치 깊은 잠이 든 것처럼 침상에 누워 있는 상태라고.
어쨌건 벨리알의 생존 자체가 일종의 ‘기적’으로 인정된 건지, 그의 생존에 어느 정도 기여했던 내 기적 수치 역시 조금씩 오르는 상황이었다.
물론 벨리알의 상태는 나와 센, 그리고 카일과 더불어 그녀의 집에서 지내는 극히 일부만 아는 비밀로, 마인하르트 제국에는 그가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덕분에 로렌츠의 시선을 피할 수 있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그것을 위해 센이 비밀리에 벨리알을 돌봐야 한다는 점이었다. 카일이 사람을 보내 도와주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무엇보다 뿌리 잘린 식물처럼 말라 가는 그를 붙드는 센의 마음은 지옥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 그녀는 여전히 벨리알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센에게서 때때로 사랑의 위대함을 배운다.
“자, 다 왔다.”
서재에 도착한 후, 카일이 나를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화려한 햄스터 전용 소파가 한쪽 구석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사파이어와 은으로 장식한 데다가 장인의 솜씨로 한 땀 한 땀 세공까지 했다.
‘언제 봐도 더럽게 화려하네.’
처음 봤을 때는 무슨 옥좌인 줄 알았지.
물론, 호강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나는 소파에 벌렁 드러누우며 카일과 시선을 마주한 채로 음식을 향해 눈짓했다.
―찍. (먹어.)
카일이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조금 식은 해산물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하루에 여섯 시간. 그게 내가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 여섯 시간이 나를 대단한 인재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연인을 굶기지 않을 정도의 여유는 주었다.
지금도 한술 뜨고, 옆에 놓인 보고서를 보고, 또 한술 뜨고, 보고서를 보는 일을 반복하는 저놈의 입에 뭐라도 좀 욱여넣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직도 손은 말랑한데…….’
석 달 사이에 마수의 침입이 한 차례 더 있었다. 나는 여전히 어떤 활약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저 부상자를 옮기고, 보급품을 나르는 데 급급했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활 쏘는 연습을 했지만, 아직 내 성에는 차지 않는 수준이었다.
왜냐면, 내가 나란히 서고 싶은 사람은 바로 카일 블레이크이니까. 북방의 패자, 그리고 이 영지의 주인. 북부를 지키는 가장 든든한 기둥이자…… 내 운명 공동체.
‘불러오기’ 할 때 내가 쓸 만한 셔츠와 바지, 그리고 속옷까지 알뜰살뜰 바느질할 때를 보면 여전히 영락없는 햄스터 오타쿠지만.
“음.”
낮은 신음이 울렸다.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한쪽 눈만 슬쩍 떠, 그를 바라보았다. 카일은 또 음식을 먹는 것조차 잊고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행정이면 행정, 치안이면 치안. 웬만한 것일지라도 하나라도 더 직접 살피려는 그의 성격 탓에 저 서류의 산은 늘면 늘었지, 줄어들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뭐, 하나같이 어려운 문제들이겠지.’
블레이크 영지는 인재와 보석, 그리고 광물이 많긴 하나 농사를 짓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니기에 교역에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지금까지는 소규모 거래로 어떻게든 버텨 왔지만, 이제부터는 영지 단위로 움직여야 한다. 그 로렌츠의 공포 정치를 뚫고.
말이야 쉽지. 아마 지금 카일의 머릿속은 뒤죽박죽 엉망진창일 것이다. 먹는 것도 잊고 서류를 뚫어지게 바라볼 만큼.
물론, 나는 그 꼴을 그냥 보고 넘기지 않았다.
―찍. (밥 먹을 땐 밥 먹어라, 인마.)
어디 음식 앞에 두고 생각이 삼천포로 빠져? 어?
나는 스르륵 소파에서 내려와 접시 끄트머리를 발로 차며 불만을 표현했다. 카일은 서류에 거의 코를 박을 기세였다.
“그래, 알았다. 이것만 하고.”
―찌찍. (내가 그 말을 믿겠냐?)
“정말이다. 믿어다오.”
어라? 알아듣네? 뭐지?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북부대공도 삼 개월이면 햄스터 말을…….
―찍. (제법인데.)
“그래, 나도 좋아한다.”
못 알아듣네. 못 알아들어.
―찌이이. 찍. (개소리 말고 먹어라.)
내가 아주 흉포한 기세로 접시를 향해 발길질하자, 카일이 웃음을 터뜨리며 스튜를 조금 떠먹기 시작했다. 따뜻할 때보다 맛이 덜할 텐데 잘도 먹는다.
비로소 그는 내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음식부터 전부 먹어 치워야겠다는 기특한 결론에 다다랐다.
간혹 식기가 그릇에 작게 부딪히는 소리나 그의 손끝이 탁자에 스치는 소리, 정적 속에서 음식물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났지만 급하게 먹은 것치곤 정말 군더더기 없는 식사 예절이었다.
“잘 먹었다, 슈. 오늘도 고맙다.”
나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비운 그릇을 보곤 작은 손으로 박수를 쳐 주었다.
요즘 말로 뭐라더라, 완식. 그래. 완식 했네. 내가 주는 음식은 웬만하면 남기지 않으니까. 먹이는 보람이 난다.
카일은 사람을 불러 식기를 치우게 한 뒤, 본격적으로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함께 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소파에 조금 더 드러누워 있기로 했다.
내내 종종거리고 다녔더니 좀 피곤하기도 하고, 어차피 중요한 일이 있으면 어련히 알려 줄 테니까.
[( ︾▽︾)]
그렇게 얼마간 노곤한 기분을 즐기고 있었을까.
‘응? 왜 조용하지?’
조용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도, 펜촉에 잉크를 적셔 무언가를 쓰는 소리도, 의자를 끌거나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도 없이 그저 적막했다.
그 침묵에서 느껴지는 싸늘함에 나는 결국 못 이긴 척 눈을 떴다.
‘뭔데, 대체.’
카일은 마치 그림이라도 된 것처럼 우뚝 멈춰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한 장의 서류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마치 빼곡한 글자를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다 외워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려 서류를 보았다. 아니, 보려고 했다. 내 몸집에 비해 서류가 너무 큰 나머지 제대로 내용이 들어오지 않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찌. (에휴.)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카일에게 폴짝 뛰어 달라붙었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그의 몸뚱이를 타고 올라가 어깨에 앉은 뒤에야 서류의 내용이 제대로 보였다.
「며칠 전, 북부 신광산 탐사에 나섰던 인부들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열 명 중 여덟 명에게 증상이 발현되었으며, 그중 셋은 위중한 상태입니다. 아홉 명은 남쪽 막사에 모여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있으며, 한 명은 치료를 거부하고 칩거 중입니다. 대공 전하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문을 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가장 큰 광산에 새로운 길을 뚫었다가 푸른빛의 폭발에 휘말렸다는 말을 들었다. 며칠 전에 복귀했을 당시, 호위로 나섰던 블레이크 기사단 쪽에서도 부상자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진지한 눈길로 서류 아래에 적힌 의학적인 부분을 빠르게 훑은 뒤, 아래로 이어지는 내용을 읽어 내렸다.
「이는 금지된 마법 중 ‘서리의 중독’과 비슷한 증상으로 추정됩니다. 마법 중독의 가능성이 있으니 영주님께서 이 점을 고려해 주시고, 부상자들을 위한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일반 의사가 아닌, 블레이크 소속 마법사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마법 중독.
지금 내가 그 단어에 깃든 밀도를 모두 이해하기에는 일렀다. 이곳에서 지낸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게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적어도 ‘서리의 중독’이라는 단어에는 카일의 살의를 불러일으킬 만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후.”
짧게 한숨을 내쉰 카일이 다른 보고서를 꺼냈다.
북부 광산 탐사에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호위로 나섰던 기사들의 정보 및 증상은 물론이고, 그 탐사의 선행 정찰에 관련된 서류도 꼼꼼히 챙겨 보기 시작했다.
“그때 보았다던 그림자는 마수가 아니라…… 놈들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상상만으로도 골치가 아픈지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크고 작은 흉터로 가득한 손이 빼곡한 글자를 헤아리다가…….
서리.
그 단어 위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치 그 단어를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민다는 듯.
‘마법사에 대한 적개심이 강할 수밖에 없지.’
무법 지대의 마법사들이 보낸 변이종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블레이크 영지의 외곽에는 공동묘지를 만들었고, 그 주변은 사시사철 우울하고 슬픈 분위기가 가득했다.
나도 그곳에 가 본 적이 있으니까 안다. 블레이크의 사람들은 원한을 잊지 않는다. 카일은 이 일이, 봄 내내 조용했던 북부 극단의 마법사들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타당한 추론이긴 하지만…….’
지금 이렇게 열을 내고 있어 봤자 바뀌는 건 없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겠지. 적어도 중독 증상을 일으켰다는 환자들부터 직접 만나 봐야 한다.
그러니까.
―찌익. (진정 좀 해라.)
나는 그의 어깨에 엉덩이를 대고 팔을 따라 쭉 미끄러졌다. 매끈한 셔츠를 따라 내 몸이 마치 미끄럼틀을 타는 것처럼 주르륵 내려갔다.
그대로 카일의 손등 위에 서서 가볍게 발을 움직였다. 그를 자근자근 밟아 주려는 의도였지만…… 덩치가 덩치이니만큼 시시한 꾹꾹이 정도로 보일 거다.
하지만 위력 같은 건 상관없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내 존재를 인식하기만 하면 되니까.
“슈.”
그래, 인마. 나 여기 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도 않으니 부산스럽게 굴 필요도 없었다. 그저 올려다보며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거다.
곧, 싸늘하게 굳어 있었던 그의 표정이 조금 허물어지며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진정했다.”
석 달.
완벽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어쩌다가 한 번은 햄스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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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