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햄스터도 밟으면 꿈틀한다 (2)
주어진 시간은 단 1분.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멈춰 버린 세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했다.
나는 재빨리 센을 향해 달려가, 그녀를 향해 날아들던 화살을 쳐 날렸다. 심장을 꿰뚫을 기세로 날아오던 것은 허무하리만큼 간단하게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아마도 로렌츠는 벨리알과 적당히 결투한 뒤, 센을 공격하기로 제 기사들과 말을 맞춘 모양이었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마법사들까지 전부 센을 향해 공격을 퍼부을 준비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비열한 자식들.’
화를 내고 있을 시간 따위 없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로렌츠를 찾았다. 승리를 예견한 듯 삐딱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의 벨리알은…….
‘……이쪽을 보고 있다고?’
그는 센을 보고 있었다. 상체가 거의 센을 향해 있어서, 로렌츠에게 급소를 고스란히 드러낸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센을 구하고 싶었다는 것을. 실제로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그는 몸을 날려 센을 감쌌을 것이다. 설령 그 대신 자신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런 벨리알을 보면서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굳어 있는 센을 뒤로 더 당겨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빼냈다. 화살은 쳐 냈지만, 그대로 있으면 저 뒤편에서 마법사가 내던지는 불덩어리에 맞고 말 테니까.
이어, 벨리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려던 때였다.
“안 돼!”
내게 허락된 건 고작 1분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바꾸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
“슈!”
등 뒤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카일이었다. 내가 보호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했으니 놀랄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카일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저 돌이 된 듯 또는 뒤늦게 내 시간만 멈춘 듯 우뚝 굳을 수밖에 없었다.
벨리알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센을 구한 것을 확인하고 안도한 듯 웃고 있었다.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고맙다는 듯.
그리고, 내가 그를 구할 시간은…….
“벨리알!”
이상한 일이다. 분명 아이템 효과는 끝났는데 시간이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아니, 아주 느리게 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벨리알이 로렌츠의 칼에 꿰뚫렸다. 가슴을 정확히 찌르고 나온 검에는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마법사가 내가 있는 쪽으로 불덩어리를 날려 보냈기 때문이었다. 피해야 했지만, 마법이 날아오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시간을, 한 번만 더…….’
비록 기적 수치가 많이 필요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카일이 달려들어 나를 꽉 끌어안아 버린 것이다.
퍽!
무언가 거세게 들이받히는 소리가 났다. 카일의 몸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앞으로 기울어졌다. 덩달아 내 몸도 뒤로 살짝 꺾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카일은 내 허리를 꽉 안은 채로 견뎠다.
“카…….”
“벨리알 전하!”
센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카일은 여전히 나를 안은 채로 한쪽 팔만 휘둘러, 벨리알이 있는 쪽으로 검기를 날려 보냈다.
하지만…….
“보지 마.”
카일이 제 품에 내 몸을 가두며 말했다. 낮은 목소리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황급히 그의 상처를 살피다가, 등줄기를 훑는 싸한 예감을 느끼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봐야 해요.”
“…….”
“현실을 부정하고 보호받을 나이는 지났잖아요.”
그러자 카일이 나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센에게 다가갔다.
센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제 품에 무너져, 가쁜 숨을 몰아쉬는 벨리알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눌러 지혈하면서.
하나, 한낱 인간의 손으론 쏟아지는 생명을 감히 주워 담을 수 없음을 증명하듯 피는 자꾸만 흘러나왔다.
카일의 검기는 목표물에 명중했다. 마법사 한 명이 나서서 방어 마법을 펼쳤지만, 처참하게 깨진 것은 물론이고 마법사조차도 피를 토하며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피 묻은 검을 들고 있던 로렌츠의 얼굴에 검기가 사선으로 날아들었다. 마법사의 희생 덕에 위력은 약해졌으나, 깊은 상처를 남기기에는 충분했다.
“우리는 싸울 이유가 없건만. 적당히 넘어오지 않고서.”
로렌츠가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 같은데. 더 하겠나?”
나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우리 쪽의 남은 기사는 고작 두 명이다. 저쪽도 피해가 적지는 않으나, 우리보다는 살아 있는 이의 수가 많았다. 심지어 마법사까지 있었다.
카일은 마지막 결전조차 비열하게 응한 로렌츠가 역겨운 듯했다.
어차피 정쟁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언젠가 대적하게 될 거라면, 차라리 지금 좀 무리해서라도 숨통을 끊어 두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벨리알이 죽는다. 카일 역시 상처가 심하다.
어깨의 부상만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어정쩡한 검기를 날리지는 않았을 거다. 나를 감싸느라 불에 당한 어깨 쪽 갑옷이 거의 다 녹았고, 살갗 역시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으니까.
‘우선, 세 사람을 떨어뜨려 놔야 해.’
벨리알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카일을 진정시켜야 했다.
“여기까지만 하죠.”
내가 큰 소리로 말하며 카일의 앞을 막아섰다.
“어차피 결투도 끝난 것 같은데요. 아닙니까?”
카일이 내 어깨를 잡아 돌렸다.
“……그래서, 도망가자고?”
“남은 사람들마저 죽일 셈입니까?”
로렌츠가 가진 삶의 방식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단 한 마디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말은 있었다.
생존보다 대단한 명예 같은 건 없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삶은 하나뿐이고, 잃어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니까. 한차례 잃어버린 적 있는 내가, 어떻게 내버리라고 할 수 있을까.
“…….”
카일은 먼발치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겨우 정신만 차리고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유일하게 남은 블레이크 기사단 소속 기사. 오로지 카일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온 이였다. 얻을 것 하나 없는 싸움 때문에 죽게 둘 수는 없겠지.
카일은 입술을 짓씹었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서 빠져나간다!”
살아남은 두 명의 기사가 숲을 먼저 빠져나갔다.
로렌츠는 그들을 막지 않았다. 그러나 센이 몸을 일으키려 하는 순간,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한 걸음 성큼 다가오며 다시 싸울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벨리알은 두고 가야지.”
“…….”
카일이 이를 악물며 검을 바로잡았다.
아니, 아니라니까! 일단 도망부터 가야지!
요컨대, 눈앞에서 등을 돌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긴급 탈출 호박씨 스틱 | 기적 수치 8% 소모 | 반경 10m 안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습니다.]
나는 두 개를 사서 망설임 없이 센에게 던졌다. 피눈물 나는 가격이었지만, 지금은 이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이거 먹어, 센! 벨리알 전하께도 먹이고!”
나는 호박씨 스틱을 하나 더 사서,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카일에게 건넸다.
“전하도 드십쇼.”
“마법 물품인 모양이군. 넌 어떻게 할 셈이지?”
“저는 그거, 아시잖습니까. 그거.”
로렌츠가 들을 수도 있으니, 나는 눈짓으로 설명을 대신했다.
“금방 따라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숲 바깥으로 미리 이동해 두세요. 우리가 야영했던 쪽으로요.”
“같이 가지. 나눠 먹을 수는 없나?”
어라?
그러게. 그것도 되나?
[‘긴급 탈출 호박씨 스틱’은 한 사람에게만 적용됩니다!]
나는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성비 다 죽었다.
“1인용입니다. 전하 먼저 가세요.”
“하나 더 없나?”
“이래 봬도 비싼 과자라서요. 안 그래도 많이 사서 지갑이 홀쭉합니다.”
여전히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나를 두고 가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이해는 하지만, 그럴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야, 빨리 가라고! 이게 얼마짜리 과자인 줄 아냐!
나는 카일의 손에서 호박씨 스틱을 낚아챈 뒤, 손수 그의 입에 물려 주었다.
“저, 잘 찾아 주셔야 합니다. 발에 차이면 엄청 아파요.”
나는 부러 가볍게 말하며 웃었다. 동시에 새하얀 빛이 카일을 감싸더니, 무어라 입을 뻐끔거리는 그를 순식간에 집어삼키고 사라졌다.
센과 벨리알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경계하던 로렌츠의 측근들은 곧 카일마저 사라지자 그야말로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너도 이런 건 처음 보지?’
북서부 마법사단은 제 마법에 대한 자긍심이 높다고 했던가. 별거 아니지만, 저렇게 당황한 모습을 보니 속이 좀 시원했다.
“뭐. 더 할 말 있으십니까?”
나는 태연한 얼굴로 로렌츠를 돌아보았다.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게 ‘불러오기’를 해제할 준비를 해 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겸사겸사 위치도 카일이 이동한 장소로 저장해 두고.
“신기하군.”
얼굴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로렌츠는 조금…… 괴물 같았다.
“마법사였나? 순식간에 잘도 옮기는군. 주문을 외우는 모습은 보지도 못했는데.”
“그건 그쪽이 알 바 아니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만족하세요? 당신의 뜻대로 되어서. 대련은 당신이 이겼잖아요.”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만족하기는 해.”
로렌츠가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웃었다.
“값진 정보를 얻었군. 카일 블레이크가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를 끌어들였을 줄이야. 제대로 한 방 먹었어.”
“마법사를 끌어들인 건 당신이지.”
내가 차갑게 일갈했다.
“됐고. 서로의 영역만 존중한다면, 그쪽 말대로 더 싸울 이유가 없잖습니까?”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다음 황제는 로렌츠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말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벨리알의 세력을 정리해야 하고, 정쟁을 통해 얻어 낸 지위인 만큼 신경 써야 할 것이 많겠지.
한동안은 북부에 시선을 돌리지 못할 것이다. 우린 그사이에 마법사에 관련된 것들을 조사하고, 북부를 조금 더 안정적으로 꾸려 내면 될 거다.
“한 가지만 대답해 주면 보내 주지.”
로렌츠의 오만한 말에 나는 삐딱하게 웃어 보였다.
‘뭐래, 선심 쓰듯이. 네가 안 보내 줘도 난 갈 거다.’
“네가 쓰는 힘은 뭐지? 마법보다 더욱 위력이 강해 보이는데.”
내가 짝다리를 짚은 채 말했다.
“글쎄요, 기적?”
“기적?”
“네. 그러니까 조심하세요. 그 기적에 당신 목이…….”
나는 손으로 목을 쓱 긋는 시늉을 했다.
목 간수 잘해라, 로렌츠. 한 번만 더 카일에게 개수작 부렸다가는 가만 안 둔다. 햄스터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거든.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가 손을 흔들어 보이자, 로렌츠의 뒤에 있던 기사들이 검을 들었다. 마법사들도 주문을 외울 참인지 손을 들어 올린 채였다.
그러나, 로렌츠가 한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보내 줘. 어차피 살아 돌아간다고 해도 뭘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
감사 인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불러오기’를 해제해서, 카일의 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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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