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햄스터도 밟으면 꿈틀한다 (1)
땅거미 지는 시각. 두 사람이 서로의 목숨을 걸고 격돌했다.
“기뻐 보이는군.”
자세를 낮춘 로렌츠가 입을 열자, 벨리알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기뻤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사냥이니 무엇이니 하는 허황한 과정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던 차였다.
썩 선하고 자비로운 성격을 타고나지는 않았으나, 벨리알은 어렸을 때부터 저와 함께 훈련하고 자라 온 기사들을 아꼈다. 그런 그들이 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현실이 달가울 리 없었다.
게다가 그게 기사로서 명예로운 죽음조차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자갈이라도 한 움큼 삼킨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그런 편이지. 이제 얕은 수작은 슬슬 지겹던 차였거든.”
“나는 널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야, 벨리알.”
“알아. 나 또한 그렇고.”
“…….”
“대신, 서로 한 가지는 약속하지.”
벨리알이 검을 곧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다른 사람은 건드리지 않기로.”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벨리알은 센의 시선을 느끼며 답했다.
센 랑드.
처음에는 그저 북부에서 만난, 머리 깨나 쓸 것 같은 하녀일 뿐이었다. 카일이 제법 신임하는 듯하기에 빼앗아서 우위를 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다 센이 랑드 남작의 친딸이라는 것을 알고, 제 친모가 그녀를 볼 때마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기에 그 상황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로렌츠와 어머니가 저를 밀어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던 차였고, 순순히 떠밀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센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뿐이었다. 그 이상으로 그녀를 신경 쓸 만한 이유도, 의향도 없었다.
그런 센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가엾었다. 복수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이 진흙탕 같은 싸움에 발을 들인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센이 랑드 남작 부부와는 달리, 끝내 살아남아 원하는 것을 거머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녀의 미래에 제 자리가 없을지라도. 센의 완벽한 복수에 저 자신의 목숨 역시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아, 어쩌면 자신은 지쳤는지도 모른다. 끝도 없이 투쟁하고, 주변 사람조차 적대해야만 하는 이 황성에서의 삶이 지긋지긋해서.
그럼에도 제 손으로 낙오되고 포기하는 건 죽기보다 싫어서, 내심 누군가 저를 적당히 끌어내리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상념이 길구나!”
로렌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그의 검이 제 오른쪽 눈을 노리고 쇄도하는 것이 보였다.
벨리알은 생각을 멈추고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단단한 금속이 맞닿으며 일어난 거센 힘이 손목을 따라 팔꿈치, 그리고 어깨를 울렸다.
형제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대련했다.
물론 진검을 휘두른 적은 없었으나, 잊을 만하면 연무장에서 지칠 때까지 맞서 싸우고는 했다. 처음에는 그게 단순한 대련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자라날수록 그건 대적의 한 형태였음을 벨리알도 알 수 있었다.
검술 실력은 말할 것도 없이 벨리알이 더 뛰어났다. 그러나 로렌츠는 끈질겼고, 상대가 방심한 틈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다섯 번을 싸우면 네 번쯤 벨리알이 이겼고, 로렌츠는 겨우 한두 번 승리를 거둘 뿐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대련만큼은 언제나 로렌츠가 이겼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서 네게 져 준 거라고 주장하듯이. 앞선 승리마저 어쩐지 그의 장단에 놀아난 결과인 양 느껴져, 벨리알은 종종 불쾌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벨리알의 녹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목검으로 상대의 의중이나 떠보던 풋내기 황자들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살기 위해서 상대의 심장에 칼을 쑤셔 넣고, 피 웅덩이 위에서 남은 삶을 헤아리는 차기 황제만이 있을 뿐이다.
“하압!”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합을 외치며 달려들었다. 횡으로 검을 긋고, 걸음을 옮기고, 어깨를 틀어 상대의 급소를 향해 칼을 내찔렀다.
챙!
날붙이 소리가 주변으로 퍼지기도 전에 살의를 품은 검이 다시 맞부딪쳤다. 목을 벨 수 없다면 심장, 배, 어깨, 하다못해 허벅지라도 찔러 내겠다는 집요한 공격이 이어졌다.
로렌츠의 검이 벨리알의 귀 끝을 베었고, 이에 반격하는 검이 로렌츠의 옆구리를 스쳤다.
투둑, 툭.
싸늘한 정적 속에서, 피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만이 유독 크고 선명하게 울렸다.
“제법이구나.”
벨리알이 비죽 웃으며 비아냥댔다.
“기억하지 못하시는 모양입니다만, 형님과의 대련에서는 언제나 제가 이겼거든요. 승률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마지막에는 늘 내가 이겼지. 왜인 줄 아느냐?”
알량한 형님 취급 같은 건 때려치운 벨리알의 눈이 다시 싸늘하게 식었다.
“알아야 하나? 아니면, 그걸로 유언을 대신하려고?”
로렌츠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몇 수가 더 오간 뒤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너를 과신하지. 네가 다른 이들과 다를 거라고 생각해.”
벨리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아닌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그건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의 지난날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치열하게 살았다. 고귀한 핏줄을 타고났고, 그게 빛바래지 않을 만큼 훌륭해지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벨리알은 한평생 당연한 것처럼 경쟁했다. 로렌츠보다 똑똑하기 위해서, 귀족들의 야심에 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카일보다 강해지기 위해서.
“내 어머니께서는 꽤 매정한 편이시지. 내가 너보다 뒤처질 때마다 나를 얼마나 닦달하셨는지, 너는 절대 모를 거다.”
로렌츠가 그렇게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매서운 검날에 벨리알의 뺨과 목덜미가 길게 베였다. 붉은 피가 땀에 젖은 피부를 타고 흘러 옷깃을 적셨다가, 천에 스며들어 검은 얼룩을 남겼다.
그 순간, 벨리알은 자신의 시야가 미묘하게 번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를 악물었다.
“더러운 수법을…….”
독이었다.
로렌츠가 제 검 끝에 발라 둔 독이 상처를 타고 벨리알의 몸 안에 들어와 퍼지고 있었다. 아마도 마비 독과 비슷한 종류인 듯, 상처 입은 부위부터 둔중한 통증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마 극독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기사들이 가지고 다니는 해독제 한 병이면 손쉽게 몰아낼 수 있을 정도의, 시시한 방해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합에 목숨이 오가는 전투에서는 고작 그 정도 수작만으로도 승패가 갈린다.
벨리알이 이를 까득 갈았다.
“명예 같은 건 내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지!”
쐐액, 날카로운 검이 쇄도했다.
그러나 위력은 아까보다 약해진 채였다. 로렌츠는 가볍게 고개를 틀어 그 공격을 피해 냈다. 옆머리 몇 가닥이 잘려 허공에 날렸다.
그의 얼굴에 음울하면서도 비열한 미소가 걸렸다.
“생존보다 대단한 명예 같은 건 없어, 벨리알. 너는 그저 사냥감처럼 죽지 않기를 바랐겠지만…… 애석하게도, 넌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죽고 말 거다.”
로렌츠가 경멸 어린 음성으로 덧붙였다.
“너는 오만하면서도 이중적이야. 카일더러 하녀의 자식이라며 비난해 놓고, 정작 너 역시 카일의 하녀와 눈이 맞지 않았나? 하하! 가관이군. 그 벨리알이 사랑에 빠질 줄이야!”
“사랑하기는 누가!”
벨리알이 노성을 내질렀다.
그에게서 제 몸을 지키겠다는 뜻 자체가 사라졌다. 팔 한 짝을 내어주더라도 기어이 상대의 심장을 꿰뚫고야 말겠다는, 집념과도 같은 의지만이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벨리알은 로렌츠를 죽이지 못했다.
아니, 죽일 수 없었다. 벨리알의 검은 로렌츠에게 닿지 못했다.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보렴, 벨리알.”
로렌츠의 부드러운 경멸은 흡사 동정과도 비슷했다.
“사랑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약점이 될 수 있는지. 아, 괜찮아. 오래 후회하지는 않을 테니까.”
“…….”
“넌 금방 죽을 거란다, 내 어리석은 동생.”
*
굳이 따져 보자면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나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오갔다.
“안 돼.”
금방이라도 나서려는 나를, 카일이 잡아 만류했다.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란 소리를 하려면 그만둬요. 지금 그런 걸 따질 땝니까?”
그러자 카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면, 넌 벌써 나를 뿌리치고 나섰겠지. 내가 뭐라고 하든지.”
“…….”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나는 당장이라도 끼어들고 싶어 애가 닳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끼어드는 것이 두려웠다.
벨리알이 이기면 로렌츠가 죽고, 로렌츠가 이기면 벨리알이 죽는다.
나는 이 두 사람 중 한 명의 죽음을 감당할 자신이 있나? 아니,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선택할 자격이 있는 걸까? 카일의 말대로 한 번 묻은 핏자국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 법인데.
“아까도 말했듯이, 이건 두 사람의 일이다.”
“……죽으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죽어도 어쩔 수 없다며 후련하게 말할 수 있냐고요.”
“그럼 선택해 봐, 슈.”
카일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가서 벨리알을 살리기 위해 로렌츠를 죽여 봐라. 그럼 알게 되겠지. 내가 왜 너를 막았는지를.”
“…….”
“나는 널 이 정쟁에 데려온 일을 후회할 것이고, 넌 누군가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사납게마저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명확히 와닿는 말이었다.
우리의 침묵 속에서, 벨리알과 로렌츠는 서로를 죽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결투 따위를 본 적 없는 나조차 그 두 사람이 얼마나 처절하게 싸우는지 알 수 있었다.
벨리알은 제 어깨를 찔려 가면서 로렌츠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그러면 로렌츠는 검을 회수해 그의 가슴팍을 베어 냈고, 벨리알은 물러나는 대신 더 바짝 다가가 로렌츠의 심장께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벨리알의 움직임은 둔해졌다. 새파랗게 질려 가는 낯빛이 그가 독에 중독되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사이, 망설이던 그 찰나의 순간. 그때, 모든 일이 일어났다.
“센!”
로렌츠의 뒤에서 내내 대기하던 기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격돌하고 있는 벨리알과 로렌츠를 지나쳐 우리에게 왔다. 정확히는 센을 향해 오고 있었다.
아는 거다.
센이 벨리알을 사랑하고, 벨리알의 마음 역시 그렇다는 것을. 벨리알의 주의를 흩트리려면 센부터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역시나, 벨리알의 신경이 로렌츠에게서 센으로 옮겨 갔다.
그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재빨리 나선 카일이 검을 뽑아 기사들과 대치했지만, 뒤에 있는 궁수까지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화살 한 자루가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이니만큼 손이 남은 이가 없었고, 내가 센을 구하러 가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젠장!”
나는 결국, 이 사건에 개입하기로 결심했다.
[얼음, 땡! 해바라기씨 초콜릿 | 기적 수치 5% 소모 | 시간을 1분간 멈출 수 있습니다.]
5퍼센트든 10퍼센트든,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허공에 나타난 초콜릿을 얼른 씹었다. 어찌나 마음이 급했는지 입안의 살도 함께 씹은 모양이라, 얼얼한 통증이 퍼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모든 세계가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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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