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햄스터도 두드려 보고 지나가라 (4)
야영지 근처로 돌아가 보니, 부상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시체를 수거하고 검을 뽑은 채 모여 앉았다.
“얕은 수작에 놀아날 줄이야.”
카일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벨리알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제 실책이 맞으니 무어라 말하지는 못하고 짧게 혀를 찰 뿐이었다.
긴장한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움직이게 하고, 내부 분열을 유도한 뒤 남은 사람을 친다. 그것도 전력을 줄이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상자를 죽인 것이다.
“악랄하네요.”
눈조차 감지 못하고 절명한 기사의 차가운 얼굴을 쓸어내려 눈꺼풀을 닫아 준 센이 말했다. 그녀는 조금 우울해 보였다.
“상처가 생각보다 약해요. 분명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었겠죠…….”
“…….”
“이렇게까지 해서 얻어 내는 황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요?”
“글쎄.”
카일이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모르니 우리가 로렌츠처럼 살지 않는 거다.”
“…….”
“비록 방식은 비열하지만, 배워야 할 게 없지는 않아.”
“뭘 배워야 하나요?”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마음가짐.”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태연해서, 마치 어제 아침에 뭘 먹었는지 물어보는 질문과 별로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이건 그저 짐승이나 마수를 사냥하다가 아무 일도 없이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무대를 마련하고 마주 서서 칼을 휘두르는 결투도 아니지. 물론, 예상은 했을 거다. 하지만.”
“…….”
10년도 넘게 혹한의 땅에서 구르고, 버티고, 다시 일어나고, 쓰러지며 수없이 담금질했던 영혼이 말하고 있었다.
“아는 것과 체득하는 건 달라.”
그 말의 무게는 남다르게 다가왔다. 기사들은 침묵한 채로 발치에서 스러져 가는 한 생명을 헤아렸다.
“다음번에는.”
카일이 날카로운 눈길로 벨리알을 보며 말했다.
“로렌츠가 네 목을 치러 올 거다, 벨리알. 그러니 현명하게 구는 게 좋아. 이 숲의 흔한 짐승처럼 사냥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벨리알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구름 뒤로 달이 숨어 사방이 어두웠다. 발치에 쓰러진 제 기사를 바라보던 그는 한숨을 삼켰다.
죽음은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더는 물러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을 만큼.
*
칼날처럼 벼려진 긴장감 속에서 하루가 더 지났다.
우리는 <마수학 도감>에서도 보았던 코볼트 무리를 만났다. 강화된 놈들은 대개 공격적이고 덩치도 커서 웬만한 마수보다 상대하기 어려웠지만, 다행히도 큰 상처 없이 제압할 수 있었다.
나는 ‘진실의 눈’과 ‘행운’ 수치를 소모해서 발동하는 일회성 방어막을 십분 활용해서 카일을 보조했다. 견과류 상점의 할인율이 괜찮을 때 산 연고를 상처에 발라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해 질 무렵, 블레이크 기사단 소속 기사가 한 명 죽었다. 전열을 이탈하고 다가온 마법사의 공격에 당한 것이다.
그간 전장에서의 카일이 어떤 모습인지 보았지만, 단언컨대 그때만큼 무시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혹함으로 우그러진 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지의 원수이자 기사들의 원수. 무법 지대의 마법사들. 카일은 한쪽 팔을 잃고 도망가는 마법사를 쫓아가 죽이려 했지만, 나는 얼른 그를 만류했다.
“인원이 부족합니다, 전하. 진정하세요.”
시작은 열 명, 그러나 지금은 여덟 명이다. 그마저도 기사들끼리는 일시적인 동맹일 뿐이다. 나는 씨근거리는 카일의 허리에 반쯤 매달리다시피 하며 간절하게 말했다.
“이대로 갈라진다면 더 위험하다고요. ……제발. 어차피 로렌츠는 다시 사람을 보내거나 본인이 직접 올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요.”
“내 기사가 죽었다. 그런데 얌전히 서서, 그 죽음을 관망하기라도 하라는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 전하가 가장 잘 아시잖습니까!”
훅, 하고 카일이 숨을 내뱉었다. 거의 다 내뱉은 호흡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분노를 재빨리 가라앉혔다. 죽은 이의 원한을 갚아 주겠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까지 위험에 몰아넣을 수는 없었던 탓이었다.
“보상은 적지 않게 하겠다.”
벨리알의 말에 카일이 차갑게 코웃음쳤다.
“……보상? 지금 보상이라 했나?”
그의 붉은 눈동자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럼 살려 내.”
“…….”
“목숨은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어. 갚을 수 없는 것을 갚겠다고 나서 봤자, 떠난 이를 모욕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를 빠드득 갈며 이야기하는 그는 방금까지 이어졌던 마수와의 전투 때문에 피투성이였다. 그래서인지 쓸쓸하면서도 처절해 보였다.
그렇게 갚을 수 없는 목숨을 수백 개, 수천 개씩 등에 짊어지고 살아왔겠지. 나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더 섧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렇지. 목숨에 필요한 건 보상이 아니야.”
때마침 들려온 말에 카일의 눈이 번뜩 빛났다. 그의 팔이 제 허리를 끌어안은 내 팔을 꽉 쥐었다. 제발 놓아달라고 애걸하는 것 같았다.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아니, 붙잡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놓아주며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카일은 순식간에 검을 빼 들었다.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이 향한 곳은…….
로렌츠였다.
“목숨에 필요한 건 앙갚음이다.”
“비열한 놈과 말이 통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 그럼, 계산을 받아 가지.”
“아니지, 아니야.”
로렌츠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철컥.
카일과 벨리알의 옆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었다. 로렌츠가 데려온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드를 깊이 눌러쓴 마법사들도 손을 살짝 앞으로 내밀며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체스 말을 움직이는 건 이제 됐고.”
로렌츠의 눈이 가늘어졌다.
“벨리알.”
“…….”
“어떤가? 무가치한 피는 이제 그만 흘리고, 우리끼리 승부를 보는 건. 사실 이 과정조차 귀찮아서 적당히 마수들을 써 죽이려고 했던 건데, 생각보다 잘 버티더군.”
무가치한 피라는 말에 카일이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저 하나만을 위해 이곳까지 온 이의 죽음이 그렇게 격하 당하는 꼴을 보고도 나설 수 없다는 사실이 잔인하게만 느껴졌겠지.
벨리알 역시 지난밤 자신의 기사를 잃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맹렬한 증오를 품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좋다. 결투를 받아들이지.”
이 숲은 작은 무법 지대와 같다. 이곳에서는 신분도, 관계도 아무 의미 없었다. 그저 두 가지로 사람을 구분할 따름이다.
지켜야 할 사람.
그리고 죽여야 할 사람.
“공터로 안내하지. 앞서갈 테니 따라오게.”
로렌츠가 활짝 웃었다.
나는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하면 도울 수 있을까? 견과류 상점을 살펴서 도움이 될 만한 걸…….
시스템 창을 띄우고 남은 기적 수치와 ‘불러오기’ 시간, 견과류 상점의 물건들을 살피던 차였다.
“하지 마라.”
어느새 숨을 고른 카일이 내 손목을 쥐고 조용히 말렸다.
“두 사람의 일이다.”
“…….”
“삶의 모든 흐름을 네 의지대로 바꿀 수는 없어. 그건 신도 해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 않나?”
“……하지만, 무력하게 죽을 수도 있어요.”
벨리알에게 어떤 애정이나 우정, 의리 따위를 느껴서가 아니다. 카일에게 했던 태도를 생각하면 내 감정은 불호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센이 사랑한다니까. 이 세계에 와서 나를 가장 서슴없이 대했던, 내 터무니없는 말도 믿어 줬던 <겨울의 심장> 여주인공 세레나가 아닌, 내 친구 센이 사랑하게 된 사람이라서.
“왜 무력한 죽음이지? 슈.”
카일이 내 팔을 잡아끌며 낮게 말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검을 쥐고 투쟁했다면, 그건 무력한 죽음이 아니야. 자신의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
“네가 끼어들어서 저 상황을 망친다고 해도, 두 사람은 언제든 반드시 충돌한다. 더 많은 피를 흘리는 것보다 이게 깔끔해.”
“압니다. 하지만…….”
“아니면, 네가 벨리알 대신 로렌츠를 죽일 텐가?”
그가 우뚝 멈춰 섰다. 붉은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는 것과 지키기 위해 죽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카일의 말이 옳았다. 벨리알과 로렌츠가 부딪친다면, 차라리 벨리알이 이겼으면 했다. 도와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칼을 쥐고 로렌츠를 죽이러 달려들 수 있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었다. 이건 게임이나 영화처럼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평범하게 살았던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네가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어. 그리고,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벨리알에게 굴욕적인 일이다.”
나는 변명하듯이 대답했다.
“……상대가 벨리알 전하가 아니라 카일 전하였다면 칼을 들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르죠. 누굴 죽였다는 사실에 평생 괴로워하며 살더라도.”
“그럴 수도 있겠지. 너는 나를 좋아하니까.”
카일이 눈을 내리깔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표현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는 듯 나를 부드럽게 달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벨리알은 내가 아니야, 슈. 그 사실을 기억해라.”
“…….”
“나는 네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 한번 묻은 핏자국은 절대 지워지지 않아.”
그건 그의 경험에서부터 비롯된 소망이었을까.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는 내 어깨를 감싸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에게서는 아직 마르지 않은 피 냄새가 훅 끼쳤다.
“가자. 주변을 엄호할 필요가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네.”
피처럼 붉은 석양이 기울고 있었다.
동부 숲에서의 마지막 밤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은, 누군가의 삶에는 마지막 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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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