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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68화 (68/129)

68화. 햄스터도 두드려 보고 지나가라 (2)

영혼을 깎아 내는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하루가 흘렀다.

우리가 하루 만에 수확해 낸 핵은 다섯 개.

한 마리 한 마리의 흉포함을 따지자면 강행군이었던 셈이다. 그 증거로 카일은 마수의 피에 흠뻑 젖어 있어 검은 머리카락이 일견 붉어 보일 지경이었다.

“일종의 변이종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마수뿐만이 아닙니다, 전하. 이런 걸 발견했어요.”

벨리알이 검에 묻은 찐득한 피를 털어 내며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 푸르스름한 쑥이 대체 뭐길래?”

“이건…… 북부에서 이따금 볼 수 있는 얼음 쑥입니다.”

그러자 벨리알의 측근들이 비아냥댔다.

“북방 촌구석에서 나는 풀이 뭐 대수라고.”

“향수라도 느끼는 모양이지?”

얼굴에 묻은 피를 적당히 문질러 닦던 카일이 앞으로 나서며 낮게 경고했다.

“쓸데없는 분쟁을 삼가도록. 사감 같은 걸 내세울 만한 상황이던가?”

정쟁이 아니었더라면 죽는 날까지 싸우면 싸웠지, 합을 맞추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벨리알의 기사들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그의 곁을 지켜 온 이들일 테니만큼 카일과 사이좋을 수 없고, 카일을 믿고 따르는 블레이크 기사단에게도 달가운 존재는 아니다.

다만, 카일의 말이 옳았다. 여기서 그런 감정을 내비치는 건 빨리 죽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꼴이다.

그 사실을 정확히 꼬집은 후 카일이 몸을 물리자, 갑옷들이 서로 부딪치며 절그럭댔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제법 위협적이었다. 대거리하려던 기사들이 입을 딱 다물었다.

“보통 풀이 아닌 모양이죠?”

센이 조그만 주머니에서 연고를 꺼내 기사들의 상처에 바르며 물었다.

내가 준 연고였다.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효과가 좋으니 한 방울도 아끼지 않고 활용하려는 모양이다.

“마법사의 영토 근처에서 자라는 변이종이다.”

“변이종…….”

세계가 가져야 할 본래의 흐름과 섭리를 무시하고 그 바깥으로 빠져나간 존재. 마법사들이 이번 정쟁에 더욱 깊이 관여했으니 위험한 일인 건 맞지만…….

‘위기가 기회가 된다고 했던가.’

사람이 마냥 죽으란 법은 없는지, 방법은 있었다.

[조율 중…….]

세상의 순리를 위반하는 마법사들의 힘은 시스템이 내게 간섭해서 운명을 뒤틀고 있는 ‘기적’과 비슷하다고 했다.

시스템이 내게 관여하는 바람에 북부에서 늪 염소가 튀어나왔던 것처럼, 마법사들이 이곳의 생태계를 바꾸고 마수들을 강화한 덕에 시스템이 내게 조금 더 수월하게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견과류 상점’의 상품들 가격이 일시적으로 하락합니다!]

[‘러브러브 코너~❤’에 신상품이 추가됩니다.]

[새로운 수치가 적용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을 가져오기 위해서…….]

[NOW LOADING…….]

그나마 조율이 쉬운 견과류 상점이 가장 먼저 떴다. 일시적인 하락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게 가격이 적힌 부분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도토리 쿠키부터 샀다. 목숨이 위험해지지 않는 이상은 인간으로 있는 게 훨씬 나으니까.

기적 수치 1퍼센트에 무려 5개다. 남는 장사지. 망설이지 않고 10세트를 구매했다. 규격 외의 마수를 처치해 준 덕에 올라간 기적 수치가 있었기에 딱 번 만큼 쓴 셈이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러브러브 코너에도 신상품이 들어왔다.

NEW! [진실의 눈 (사람용) | ❤×800 ←추천!]

NEW! [통찰의 눈 (햄스터용) | ❤×800]

문제는 설명만 들어서는 뭔지 모르겠다는 거다.

‘추천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어쨌든 가만히 있어도 쌓이는 게 하트고, 사 둬서 나쁠 게 없어 보인다.

문제는…….

[현재 보유 현황 | ❤×780]

살짝 부족하다는 거다. 정말, 살짝.

숲에 들어온 이후로는 거의 멈춰 있다시피 했다. 하긴, 당연한 거겠지. 여긴 사람이 행복해질 만한 곳이 아니니까.

하지만 20개만 모으면 ‘진실의 눈’을 살 수 있는데, 포기하기도 조금 그렇다.

그렇다면, 하트를 채워야 하니까…….

“저, 전하. 죄송한데 잠시…….”

조그맣게 불렀을 뿐인데 카일이 바로 다가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게, 잠시 귀 좀 이쪽으로 기울여 주시겠습니까.”

카일이 허리를 살짝 숙이고 내 얼굴 근처에 제 옆얼굴을 가져다 댔다.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 제일 먼저 죽는다더니, 어떤 경계심도 없는 행동이었다. 마치 의심하는 방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처럼 부드러운 무표정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 사이에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런 짓은 안 하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그럴 만한 사유가 있어서.”

“……사유?”

카일은 조금 당황한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라도 이건 도저히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최전선에서 싸우는 이다. 평소라면 이런 식으로 긴장을 허무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시스템이 추천한다고 말할 정도면 어지간히도 좋은 물건인 것 같아 욕심이 났다.

그러니까.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카일은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지만, 이유를 따져 묻지 않았다. 시답잖은 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겠지. ……솔직히 그건 좀 고마웠다.

[현재 보유 현황 | ❤×793]

[현재 보유 현황 | ❤×801]

상황이 이런데도 나에 대한 카일의 마음에 흔들림이라고는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하트가 충분히 쌓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진실의 눈’을 구매했다.

툭.

“……응? 안경?”

내 손아귀에 떨어진 건 일할 때 이따금 쓰던 것보다 조금 더 무거운 검은 뿔테 안경이었다.

‘도수는 없어 보이는데.’

의아한 눈길로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안경을 척 써 보았다.

“……어?”

“왜 그러지, 슈?”

“……보여요.”

“보인다고?”

“네, 그러니까…….”

나는 살짝 떨리는 검지를 들어 그를, 정확히는 그의 건너편에서 반짝이는 작고 푸른빛을 가리켰다.

“저 증표가…… 마수의 핵이 보여요. 전하를 통과해서.”

그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안경이 가진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일이 놀란 얼굴로 동료 기사가 가지고 있는 핵을 한 번, 그리고 나를 보았을 때. 그때, 나는 내가 꺼낸 말이 가진 엄청난 가치를 알아차렸다.

“저, 마수의 핵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어요!”

*

“이마, 아뇨! 왼쪽 눈에 더 가깝습니다. 네, 거기요.”

“이놈의 위치도 봐주십시오, 마수학자님!”

“오른팔 팔꿈치 윗부분!”

“메기 자식은 핵이 너무 깊이 있는데요?”

“잠시만요, 그놈 약점은…… 음, 도감에 분명히 적혀 있었는데. 아! 아가미 쪽으로 검을 눕혀서 찌르세요!”

우리는 그야말로 치열하게 싸웠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황제가 되기 위해서.

흙과 피, 먼지, 오물 따위를 뒤집어쓰고도 쉴 새 없이 검을 쥐고, 활시위를 당기고, 서로에게 악을 쓰며 정보를 알려 주었다.

이 싸움에는 승리도 패배도 없다.

오직 죽음과 생존만이 있을 뿐.

“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렸다. 분수처럼 솟아나 바닥에 뿌려진 검붉은 피에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에 시선을 빼앗겼다간 다음에는 피가 아니라 제 목이 바닥을 나뒹굴 거라는 사실을.

벨리알의 측근 기사가 바닥에 쓰러졌다. 사람 몸집보다도 큰 독수리에게 어깨를 꿰뚫린 것이다. 말이 좋아 꿰뚫렸다지, 어깨의 절반이 날아간 듯 너덜거리고 있었다.

벨리알은 그 장면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았으나 제 기사를 감싸지 못했다. 그는 날아드는 다른 한 놈의 부리를 검으로 급히 막았다. 센은 단도를 바투 쥔 채 나와 등을 딱 붙이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저 괴조 떼만 해도 피곤한데, 코볼트까지.’

나는 혀를 차며 견과류 상점을 열었다. 그리고 마들렌을 하나 사서 센에게 내밀었다.

[미니미니 브라질넛 마들렌 | 기적 수치 1% 소모 | 30분간 몸이 작아집니다. 햄스터보다 작은 크기로!]

원래는 2퍼센트인데, 변이종이 나타나면서 이 역시 반값이 되었다.

나는 햄스터로 돌아가서 숨으면 된다지만, 센은 멀거니 있다가 다칠 확률이 크니까. 어중간하게 빨라지는 것보다는 아예 작아져 버리는 게 더 안전할 거다.

어쨌든 싸게 샀으니 고맙다, 이 빌어먹을 마법사 자식들아.

“얼른 먹어!”

센은 내가 건넨 것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입에 재빨리 쑤셔 넣었다. 그게 돌에 진흙을 바른 거라고 해도 삼킬 기세였다.

“센?”

근처에서 그녀를 엄호하던 벨리알이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 센은 웅얼거리는 듯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전 신경 쓰지 마세요!”

내가 재빨리 설명했다.

“안전한 곳으로 피해 있을 겁니다!”

그대로 뒤돌아 뛰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이 햄스터보다 작아지기 시작했고, 나는 얼른 ‘불러오기’를 해제한 뒤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구석으로 이끌었다.

우리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일의 움직임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붉은 검기를 형형하게 두른 대검이 번쩍이며 쏘아져 나가면, 일격에 마수가 반으로 갈라지고 사체가 땅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가 검을 거두는 사이, 뒤에서 표독스러운 눈길을 한 독수리가 갈고리 같은 부리를 쩍 벌린 채 카일에게 쇄도했다.

날개를 접은 채 하강하는 모습에서는 죽을 때 죽더라도 목덜미를 물어뜯겠다는 집념이 엿보였다.

―찍! (안 돼!)

대검은 묵직한 파괴력을 가진 대신에 신속함에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몸을 빠르게 틀어막는다고 해도 부상을 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제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는 거야?’

활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다. 무엇보다 저 망할 독수리와 카일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어쭙잖은 실력으로 쏘았다가는 괴조가 아니라 그가 다친다.

물론, 사람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심지어 햄스터다.

‘어떻게 좀 해 보란 말이야, 뭐 없어?!’

무력하다. 내가 실질적인 전투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거야 당연하다지만, 그가 다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속을 날카로운 것으로 할퀴듯이 긁어내는 기분이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62일 남았습니다.]

[카일 제일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2일 남았습니다.]

여전히 그의 생존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이렇게 손 놓고 구경하기만 할 수는 없어.’

뭐든지 좋으니 그를 보호하고 싶었다. 어떤 힘이어도 좋으니까, 부디…….

그때,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새로운 수치, ‘행운’이 적용되었습니다!]

[‘마수의 핵’을 습득 시 행운 수치가 적용됩니다.]

[현재 보유 현황 | ♣×33]

쨍!

순간, 카일의 어깨 근처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오며 독수리가 튕겨 나갔다. 방패 같은 것이 그대로 중심을 잃어 뒤로 떠밀리는 것을, 벨리알이 어떤 망설임도 없이 베어 냈다.

설마, 지금 이게…….

[현재 보유 현황 | ♣×1]

행운 수치가 줄어들었다.

‘……설마, 저 푸른빛이 내가 일으킨 상황이라는 거야?’

그때, 내 의심을 긍정하듯이 시스템 창 하나가 덩그러니 떠올랐다.

[행운을 빌어요! (ෆ`꒳´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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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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