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햄스터도 두드려 보고 지나가라 (1)
이튿날. 여명이 밝아 오는 무렵, 우리는 숲의 입구에 모여 섰다.
앞서 설명 들은 것처럼 규칙은 간단하다.
사흘 동안 숲에서 마수를 사냥할 것. 더 많은 마수를 쓰러뜨리고 살아 돌아온 쪽의 승리. 그리고, 승리한 쪽이 황위를 원한다면 패배한 쪽은 불복할 수 없다.
“올해의 마수는 조금 특별한 것들로 준비해 봤네.”
로렌츠가 느긋한 태도로 나섰다.
“알다시피 이번 대의 황자들은 모두 상당한 실력의 검사들이지. 보통 마수들로는 어디 상대나 되겠나? 사체를 다 가져오는 것도 고생일 테니…….”
그가 손짓하자, 옆에서 그림자처럼 잠자코 붙어 서 있던 사내가 검은 천으로 감싸 두었던 작은 돌을 내밀었다.
“더 강한 마수라는 증거다. 마수의 사체에서 이 광석을 뽑아내어 가져오게. 더 많이 가져오는 쪽이 더 많은 마수를 죽였다는 뜻일 테니까.”
새파란 빛을 뿜어내는 그것은, 마치 절대로 녹지 않은 얼음을 깎아서 만든 것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또한, 그 안에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흰 실타래가 유령처럼 어른거리고 있었다.
시스템이 조용히 떠올랐다.
[마수의 핵.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원인으로, ‘겨울의 심장’의 원천이다. 개체마다 핵의 위치는 다 다르며 핵이 파괴되어야만 죽는다.]
으드득. 옆에서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났다.
카일이었다.
그는 이미 북부에서 저것을 숱하게 보았다. 무법 지대의 마법사들이 ‘선물’로 보냈던 것들과 비슷한 원리일 테니까.
“빌어먹을 마법사들을 데리고 장난질을…….”
노기를 드러내는 건 카일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돕기 위해 자원했던 블레이크 기사단 소속 기사들도 살벌한 표정이었다.
‘좋게 생각할 수가 없겠지.’
강화된 마수들에게 터전을 짓밟히고,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 그러니 정적을 확실히 죽이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마법사와 손을 잡은 로렌츠의 잔인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불공평해요.”
그때, 센이 차분한 얼굴로 나섰다.
“저희는 사냥 규모에 맞게 일행을 꾸려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강화된 마수로 변경되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로렌츠 전하께서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계셨을 거고, 대비 역시 하셨을 테니까요.”
그러자, 로렌츠가 부드러우면서도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은 이해하네만, 불공평하지는 않네.”
“그 이유가 듣고 싶군요.”
“첫째. 마수의 핵은 무작위적으로 생겨난다. 나로서도 지식적인 우위를 점할 수 없다는 뜻일세. 마수를 길들일 수도 없으니 위험한 것 역시 매한가지지.”
“…….”
“둘째. 지식만을 따진다면 그대들이 불리한 건 맞지만, 상황은 오히려 유리할 테지. 그쪽에는 카일 블레이크 대공작이 있지 않나? 블레이크 영지의 사람들에게는 제법 익숙할 테니까.”
카일은 주먹을 꽉 쥐더니 숨을 천천히 골랐다.
“……황자께서 그렇게 봐주시니 영광입니다.”
억눌린 음성이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날뛸 법한 맹수의 입에 억지로 재갈을 물려 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지금 제 감정을 고스란히 표출하는 건,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테지.
“그리고 셋째. 마수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목숨을 건 사냥이 아닌가. 당연히 최정예를 모아 일행을 꾸렸겠지. 그렇지 않나?”
마지막 말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심지어 로렌츠의 시선은 센이 아닌, 벨리알에게 향해 있었다.
“좋습니다.”
벨리알이 윗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형님께서 이렇게 추진력 있는 분이신 줄은 미처 몰랐군요.”
로렌츠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
“뒤에 앉아 시답잖은 말을 움직이는 건 이제 지겨워져서 말이지.”
“…….”
싸늘한 분위기가 흘렀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죽기 살기로 싸울 텐데, 왜 벌써 피곤하게 날을 세우는지 모르겠다니까. 나는 혀를 쯧쯧 차며 기사들의 뒤에 가서 섰다.
한 팀당 총 열 명. 로렌츠는 클라인 공작가의 기사 여섯 명과 마법사로 추정되는 이 세 명을 골랐다.
그리고 벨리알은 센, 카일과 나, 그리고 자신의 측근 기사 두 명과 블레이크 기사단 쪽의 지원자 두 명으로 인원을 채웠다.
엄밀히 말하면 나와 센은 전투에 도움이 안 되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센 대신 다른 기사를 데려가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벨리알은 센을 데려가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약혼한 그녀를 황성에 따로 떨어뜨려 놔 봤자, 언제 어떻게 암살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너희가 꼭 나설 필요는 없는 일이다.”
카일은 여전히 블레이크 기사단의 이들과 숲에 들어가는 것이 미안한 듯했다. 자신이 책임질 이들이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니 마음이 놓이지 않을 법도 했다.
그러나, 블레이크 기사단의 이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는 대공 전하의 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저희 북부 블레이크 영지의 존속과 안녕이 달린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북부의 원한과도 맞닿아 있기도 하죠. 저 마법사 놈들이 개수작을 부릴 게 뻔한데 돌아 나가면, 그게 블레이크의 기사입니까?”
“전하. 계획대로 저희가 출정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눈에서 광망을 내뿜으며 말했다.
“블레이크의 원수입니다. 저 마법사들을 까마귀밥으로 주어도 모자랍니다.”
“들어가서 실컷 찢어발겨도 따져 묻지 않으마.”
카일이 한숨을 푹 내쉬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죽는다면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내 말을 이해했나?”
“예, 전하!”
“명심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나 안내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 숲에 들어간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죽인다. 그리고 사흘간, 살아남는다. 그 단순한 규율 앞에서 모두가 더없이 진지해졌다.
*
푹!
빛살처럼 내찔렀던 검이 돌아오는 것은 더 빨랐다. 칼에 쏟아졌던 피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허공에 점점이 뿌려질 정도였다.
마수의 핵.
그 조그만 돌덩이가 어디에 있는지는 상관없다. 팔이든 다리든 몸통이든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공격을 막아 내고 숨통을 끊는다. 되살아나면 베어 낸다. 등 뒤의 이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내고, 기어이 살아남아 원하는 것을 손에 쥔다.
불굴의 의지와 무한한 투쟁. 그건 카일 블레이크의 삶을 설명하기에 더없이 좋은 단어였다.
“……음.”
나는 활시위를 당기려던 것을 놓고, 그저 날아가는 새를 보듯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쏘아 보았자 견제는커녕 방해만 될 뿐이다.
새파랗게 밝아진 하늘 위로 카일이 뛰어올랐다.
발끝에 제 마력을 담아, 보통 사람보다 세 배는 높이 몸을 솟구친 그는 공중에서 가뿐하게 몸을 뒤집더니 검을 쥔 팔을 앞으로 곧게 뻗었다. 어깨부터 손끝까지, 그리고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검 끝까지 완벽한 일자를 그렸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몸을 틀어 찔러 내자, 거대한 곰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앞발로 그를 후려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단숨에 어깻죽지가 꿰뚫린 마수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살의를 내보였지만, 카일 역시 붉은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내며 달려들 뿐이었다.
캉!
날카롭고 단단한 것이 서로 맞부딪쳤다가, 떨어졌다가, 다시 부딪치는 일을 수차례 반복했다. 전력으로 충돌한 부분에서 창백한 빛이 타닥타닥 튀었다.
그러다가 결국, 집채만 한 마수의 몸통을 반으로 갈라 버린 카일이 그 안으로 손을 뻗어 핵을 잡아챘다.
“첫 번째 증표를 뽑아냈다!”
“좋아! 침착하고 제자리를 찾자!”
“예!”
환호하는 것도 잠시, 기사들은 대열을 갖추어 카일의 주변을 엄호했다.
더없이 진지한 눈길이었다. 안전한 곳에 서 있던 나는 그들이 어떤 전쟁 속에서 살아왔는지 다시금 실감하고 말았다.
“숲 쪽으로 좀 더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황자님.”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움직여라. 형님 성격에 매복을 숨겨 놓지 않았을 리가 없다.”
“예!”
산세가 험해질 때까지는 말을 타고 움직이기로 했다.
나는 뒤처지지 않도록 재빨리 말 위에 올라탔다. 이제는 안장 위에서 고삐를 잡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전속력으로 달리지만 않으면 꼴사납게 낙마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차라리 함께 타지.”
하지만, 카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갑옷과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던 그가 영 불안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낙마하면 곧장 부상으로 이어져.”
“변하면 되니까 괜찮아요.”
다 믿는 구석이 있다고. 아니, 사실은 그걸 떠나서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 상황에서 나까지 돌봐 달라는 말을 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전하! 머리 위, 일곱 시 방향에 새 떼가 있습니다. 낯선 개체인 것을 보니 마수인 듯합니다.”
“활을 들어라!”
나는 재빨리 활을 다시 꺼내 화살을 메겼다.
작게 보이는 새는 크게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맞힐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나는 손가락이 얼얼하도록 시위를 당겼다. 숨을 느리게 내쉬다가 잠시 참고, 눈조차 깜빡이지 않으며 허공의 한 점을 응시했다.
벨리알이 황제가 되길 바라서? 아니다. 그런 건 내게 어떤 가치도 없다. 북압 정책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기실 그 말을 온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센이 행복하길 바라서? 그런 이유가 없지는 않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슈.”
저 남자가 살아남았으면 해서.
아니, 행복했으면 해서.
내 곁에 있어 줬으면 해서.
그래서 나는 대답 대신 검은 한 점을 응시하고, 망설임 없이 활을 쏘았다.
카일, 너는 몰라. 내가 이 한 발을 위해 활시위를 수백 번, 수천 번 당겼다는 것을. 노력이든, 행운이든, 기적이든 좋다. 뭐든지 좋으니까…….
“저쪽! 한 마리가 날개를 빗맞고 대열에서 이탈했습니다!”
“잡아! 지원 사격한다! 하강하기 전에 잡는다!”
마수의 날개에 스치듯이 맞은 내 화살이 곤두박질칠 때, 나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두고 봐.
우리는 반드시 여기서 살아남을 거고, 북부로 돌아갈 테니까.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운명 공동체를 지켜보자.]
[보상 : 카일 블레이크의 생존, 두 사람의 동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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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