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햄스터가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4)
시간은 흘러, 어느덧 밤이 되었다.
우리는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야영을 준비했다. 모든 것이 풍족한 황성과는 달리 불편한 것투성이였지만, 아무도 투덜거리지 않았다.
센이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던져 넣을 동안, 벨리알은 기사들에게 받은 재료로 스튜를 끓였다. 카일과 블레이크 기사단의 기사들은 말에 여물을 먹이거나 침낭을 펴고, 불침번의 순서를 정했다.
나는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구면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사냥에 따라올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
‘분명히 블레이크 기사단은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블레이크의 기사로서가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 지원한 모양이다. 그들은 고단해 보였지만, 동시에 기꺼워 보였으니까. 카일이 영주로서 얼마나 신뢰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번에 새로 구매한 <마수학 도감>을 펼쳤다. 인벤토리에 넣어 둔 책을 갑자기 꺼냈더니 기사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이따금 보냈다.
이 도감으로 말하자면, 러브러브 코너의 신상품 되시겠다.
[( ̄︶ ̄)+++]
그래, 그래.
이번 건 정말 요긴했다. 뭐든 활용할 수 있어야 의미가 있는 거다. 그렇고말고.
엄밀히 말하자면 <마수학 도감> 자체가 신상품은 아니다. 단, 내용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지금 상황에 가장 필요한 동부 지역 마수와 고대의 괴물들의 정보 위주로 재편성된 것이다.
물론, 내용을 싹 바꾸는 데 소요된 하트는 무려 삼백 개. 예전이라면 기함했을지도 모르지만…….
“전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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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보유 현황 | ❤×707]
잘도 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기적 수치랑 바꿔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앞으로도 하트가 모자랄 일은 별로 없어 보이니까 괜찮겠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책을 펼쳐 보았다.
“어디 보자…….”
늪지대와 풀숲에 주로 사는 마수들은 기본적인 모양새가 짐승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았다. 염소, 개구리, 멧돼지, 곰은 물론이고 이따금 지네나 잉어 같은 것도 있었다.
“북부 마수들과 엄청 다르진 않네요. 늪이나 호수에 사는 마수가 좀 추가된 것뿐이지…….”
어느새 내게 가까이 다가와 서선 책을 함께 들여다보던 카일이 대답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마수들은 대개 영지 근처, 북부 초입에 사는 놈들일 테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여기도 동북부 숲이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다.”
“북부 초입이요?”
“그래. 평야 지대와 일부 삼림까지는 초입으로 치지. 그 이후 벌판, 설산, 그리고 바다부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나 보네요.”
카일이 서늘하게 웃으며 물었다.
“궁금한가?”
“……아뇨.”
세상엔 알면 다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물론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아니다.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덕분에 팽팽했던 긴장감이 조금 느슨해진 기분이 들었다.
할 일을 적당히 마친 듯 그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카일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마수학 도감>을 빠르게 읽어 갔다.
보다 보니 좀 독특한 마수들도 있었다. 책장을 몇 장 더 넘기던 나는 코볼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북부에도 코볼트가 있나요?”
“그래. 얼음 광산 쪽에 밀집해 있지. 그리 똑똑한 놈들은 아니지만, 타고난 성질이 집요하기 때문에 한 번 적의를 가지고 달라붙으면 상당히 성가시다. 그놈들이 빽빽하게 둘러싸면 새파란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 들더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참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코볼트는 덩치가 작으나 표독스러워 보였고, 푹 꺼진 눈자위 중앙에 박힌 푸른 눈동자만이 음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놈들은 숲에 사는 개체라 그런지, 전반적인 피부색은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수들과 비슷한 진녹색이었다. 그리고 검고 긴 손톱에는…….
“개중 동부 숲의 코볼트는 조심하는 게 좋다. 손톱에 마비 독이 있거든. 해독제는 준비해 두었지만, 퍼지는 속도가 빠른 편이라서.”
그때, 벨리알의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숲 깊은 곳에 서식하는 개체는 대개 비슷해.”
그의 말대로였다.
<마수학 도감>에도 동부 숲 코볼트의 손톱에는 독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글귀가 보였다. 다른 페이지에도 독성에 대한 주의 문구가 심심찮게 적혀 있었다.
“마수학도 배우셨어요?”
센이 물었다. 그녀는 내 옆에 서서 카일이 나눠 주는 스튜를 받고 있었다.
벨리알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언젠가 이 ‘사냥’에 참석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지.”
신기한 일이었다.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아 건조하게마저 느껴지는 음성이었는데, 그래서 더 씁쓸한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황위가 뭐길래 하나뿐인 목숨마저 내던지는 걸까.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언제나 내게 가장 급급했던 건 살아남는 일이었으니까. 자존심이, 잠깐의 기분이, 어떤 이상이 날 먹여 살려 주지는 못했으니까.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카일이 내 몫의 음식을 가져가 먼저 먹어 보았다. 독을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살짝 웃는 낯이 다정해서, 조금 부끄러워진 내가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누가 독을 타겠습니까?”
너스레를 떨듯 말하자, 그가 고개를 단호하게 내저었다.
“슈. 전쟁 중에 가장 먼저 죽는 이가 누구인지 아나?”
“……음, 글쎄요. 자기 수준도 모르고 나서는 사람?”
정답을 알려 준 건 벨리알이었다.
“긴장하지 않는 사람.”
“…….”
“특히 이런 특수한 형태의 정쟁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건 정정당당한 결투 따위가 아니야.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를 죽이기만 하면 끝나는 경기와 같다. 긴장하지 않으면 바로 급소를 찔려. 전장에서 의심은 의무나 마찬가지야.”
카일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전쟁 중 가장 운 좋은 죽음은 적장의 칼에 찔려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말이 있지.”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이 설명을 하는 이들은 바로 이 제국의 황자들이다. 황제가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대공작 정도의 작위를 받아, 한평생 부족한 것 없이 잘만 살아갈 것 같은.
그런데 정작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주변을 의심하고, 확인하고, 숱한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팍팍하고 삭막하게 사는 건 다 비슷하구나…….’
이후, 우리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각자의 몫으로 배당된 음식을 먹어 치웠다. 내일부터는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충분히 먹고 쉬어 둬야 했다.
아까의 대화로 인해 자극받은 나는 의욕적으로 스튜를 마시기 시작했다.
조심해야 할 건 상대의 칼뿐만이 아니다. 더위나 추위, 산짐승, 배고픔, 식중독과 탈진 따위에도 사람은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
카일은 내가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빤히 바라보다가 제 몫의 빵마저 내밀었다. 나는 사양하려던 생각을 금세 접고 받아서 입에 밀어 넣었다.
든든하게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도감을 다시 펼쳐선 ‘숲 지네’나 ‘외뿔 사슴’, ‘전나무 정령’ 따위의 설명을 읽어 내렸다.
그럴 때면 카일과 벨리알이 곁에서 경험담이나 지식을 알려 주었다. 또, 센은 내일 필요한 물건을 챙기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거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밤은 점차 깊어 갔다.
*
어느새 내 ‘불러오기’ 시간이 슬슬 끝나 갈 무렵이었다.
“두 명씩 짝지어서 불침번을 선다. 수상한 이가 접근하거든 보고하기 전에 죽여도 좋다.”
벨리알의 싸늘한 목소리에 기사들은 허리를 깊이 숙이더니 순서를 정해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따금 우리의 안전을 확인하려는 듯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여기서 바로 사라지기가 애매한데.’
어떻게 해야 하나.
인상을 쓰며 고민하던 차, 카일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밤이 되면 체온이 떨어질 수 있다. 마셔 둬.”
그렇게 말하며 잔 하나를 건넸는데, 내용물을 살펴보니 따뜻하게 데운 술이었다.
“두 명씩 붙어 자는 게 안전하다. 저쪽 침낭으로 오도록.”
……그러니까, 지금 붙어 자자는 건가?
나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카일을 올려다보다가, 그가 의미심장하게 눈짓하는 걸 보고 의도를 파악했다.
‘아, 설마.’
붙어서 자다 보면 그의 덩치에 가려져서, 내가 중간에 사라져도 티가 안 날 테니까?
언제 어디서 기적 수치를 소모할지 모르니까 비상용으로 산 쿠키는 아껴 두는 게 좋긴 하다. 다만, 새삼스레 붙어 자자니 부끄러워서 그렇지.
어쨌든, 카일의 제안은 이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들이켰다. 독한 술이 혀끝부터 목구멍을 홧홧하게 데우는 것 같았다.
다 마시지는 못했지만, 카일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내게서 잔을 가져가 나머지 술을 모조리 비우더니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어느새 나는 널찍한 침낭 안에서 그와 딱 붙어 있었다. 모포를 꼼꼼히 꿰매 만든 침낭은 몸을 숨기기 딱 좋아서, 지금 당장 햄스터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하지만 곧장 변하지 않고, 얼마간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던 이유는…….
‘……따뜻하다.’
따뜻했다. 카일은 보통 사람보다 체열이 높은 것 같았다. 조금 느린 듯하게 뛰는 심장 소리도 듣기 좋았다.
나는 머뭇거리는 손길로 그의 허리를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심장이 되게 천천히 뛰시네요.”
“싸우는 이에게 침착함은 기본 소양이니까.”
그 말에 나는 괜히 억울해지고 말았다. 내 심장은 너무 빨리 뛰어서 이 소리가 금방이라도 새어 나갈 것 같은데, 본인은 침착하단 말이지.
얄밉다는 듯 올려다보자, 어둠 속에서 카일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사실은.”
“…….”
“지금은 평소보다 심장이 빨리 뛰는 편이다.”
그 말에 무어라 투덜거리려던 내 입이 우뚝 멈추었다.
……빨리 뛰고 있다고?
나처럼?
그 말에 살짝 울컥했던 감정은 삽시에 녹아내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란 사실이 이토록 간지러운 줄 몰랐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품에 귀를 붙인 채 조금 느린 듯, 하지만 선명한 소리를 내며 뛰는 심장 소리를 전해 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일 일어날 일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묻고 잠을 청했다.
북부대공의 햄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