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65화 (65/129)

65

그렇게 어느덧 약속한 날이 됐다.

우리는 덜컹거리는 마차에 마주 보고 앉아 작은 차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특히, 나는 더욱 그랬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

“피곤하면 조금 자도 된다. 어차피 도착하려면 하루는 더 있어야 해.”

고민하느라 눈을 질끈 감고 있었더니 카일이 오해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그건 나중에 한꺼번에 자도 됩니다. 지금은 아깝잖아요.”

“음.”

“그보다…….”

나는 그가 마차 안에서도 놓지 못하는 서류들을 힐끔 보며 말했다.

“마법사들 말이에요.”

마법사, 라는 단어에 카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냉랭해졌다. 반사적으로 보이는 그 반응에 무법 지대와 블레이크 영지 사이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왜 블레이크 영지를 그렇게 공격하는 겁니까? 이 땅을 가지고 싶어서? 혹시, 문제가 생겨서 쫓겨난 사람들인가요?”

“아니.”

카일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나를 살피고는 크흠, 헛기침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에 섞이지 않는다. 그냥 두어도 문제를 일으키지만, 다행히도 사회에 복속되려는 욕구가 없어. 그들은 어떤 법이나 윤리로 가둘 수 없다. 오로지 호기심, 그들만의 규칙, 그리고 저들이 믿는 순리에 따라 움직이지.”

“그럼, 블레이크 영지를 정복하고 싶은 걸까요? 북부의 사회를 부정하고, 그 땅에 군림하고 싶은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로렌츠와 협공해서라도 북부를 압박할 필요가 없지 않나.

“글쎄, 난 아니라고 본다.”

카일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워낙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라 종잡을 수는 없지만, 굳이 정복하고 싶었다면 직접 쳐들어왔을 거다. 그런 식으로 영지에 불쾌한 장난을 칠 시간에 제대로 된 군대를 이끌고 왔겠지.”

“불쾌한 장난?”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틈틈이 보내는 ‘선물’ 덕에 내 땅의 사람들이 수십 명씩, 수백 명씩 처참하게 죽어 나갔지. 앙갚음하지 않았다고 해서, 너희를 용서했을 거라 믿었나?’

마법사에게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그때 카일이 말한 ‘선물’은 우리가 아는 그런 말랑한 의미가 아닐 것이다.

왜냐면, 그때 보여 줬던 그의 표정이 무시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모독적이고 역겨운 것을 대하는 듯한, 그런 얼굴.

그에게 악몽 같은 기억을 굳이 헤집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냥 중에 마법사들과 부딪칠 가능성이 크니 알아 둘 필요는 있었다.

나는 미안하고 난처한 미소를 잠시 지어 보이다가 물었다.

“그게, 그…… ‘선물’이라는 겁니까?”

“그래.”

카일이 이를 까득, 갈며 말했다.

“그건 마수였다. 그들의 마법으로 개량되고 강화된 것들로, 쉽게 죽지 않는 데다 때때로 심장을 찔러도 살아남곤 했지. ……그걸 심장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군. 내가 찔렀던 것들은 모두 얼어 있었으니까. 놈들은 그것들을 하나둘씩 영지로 보내, 저들의 마법이 얼마나 완성되었는지 실험하곤 했어. 이번 ‘사냥’도 그들에게는 그저 연구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나는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겨울의 심장.”

“그래. 놈들은 저들의 피조물을 그렇게 부른…… 슈, 그걸 어떻게 알지? 그것도 꿈에서 보았나?”

“아뇨, 그건 아닌데…….”

내가 읽지 않은 부분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시스템을 불렀다.

‘원작의 이름은 왜 <겨울의 심장>이야?’

카일의 말대로라면, 내가 빙의한 이 소설 이름이 굳이 ‘겨울의 심장’인 게 이상했다.

이건 세레나와 벨리알의 이야기고, 카일은 이야기가 절반도 진행되기 전에 죽었다. 마법사들은 북부와 대립하는 입장이었으니, 두 사람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단어인데…….

[이후 내용을 열람하시겠습니까?]

그래. 좀 봐야겠다. 카일이 죽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론 많은 운명이 바뀐 만큼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미지의 단체인 마법사단을 파악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겠지.

“꿈에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번 확인해 볼게요.”

나는 창 너머를 살짝 내다보았다.

저 멀리 숲의 입구가 보이는 듯했다. 오늘은 그 근처에서 야영하기로 했으니, 금방 도착할 것 같다.

“혹시, 제가 멍하니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최대한 빨리 볼 테니까.”

카일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피식 웃어 보였다.

“그렇게 말하니, 꼭 꿈을 꾸는 게 아니라 책을 읽는 것 같군.”

“…….”

“농담이다. 기다릴 테니, 천천히 하도록.”

뜨끔한 나는 팔짱을 낀 채 딱딱한 등받이에 머리를 댔다. 사실 눈을 감을 필요는 없지만, 그에게 꿈이라고 둘러댔으니까.

다행히도 시스템은 내가 보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눈을 감아도 떠올랐다. 마치,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직접 전달해 주는 것처럼.

[<겨울의 심장>을 속성으로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파란색 시스템 창이 창백한 빛을 내뿜으며 깜빡였다. 마치, 나를 인도하듯이.

곧이어 원작의 내용으로 추정되는 몇 줄의 문장이 올라오면서, 마치 꿈을 꾸는 듯 흐릿한 장면이 함께 떠오르기 시작했다.

*

[블레이크 대공작,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가 죽었다.]

이내 쓰러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소 흐리기는 했지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자연히 속이 울렁거렸다.

‘아니, 하필 보여 줘도 왜 이런 장면부터 보여 주는 거야?’

심지어 옷이 지금 입고 있는 것과 같았다. 새삼스럽게 그가 이번 사냥에서 죽을 수도,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행히도 그 장면은 금방 지나갔다.

깜빡.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는 황제가 되었다. 심약한 로렌츠는 동생의 권력을 이기지 못해 밀려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꼭두각시 황제가 되는 것이 싫어 물러나는 척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세레나는 그런 벨리알과 결혼했다.

약혼식 때 보았던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벨리알과 마주선 세레나는, 분명 웃고 있었으나 눈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마치, 상대의 급소를 찾는 듯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이내 또 한 번 장면이 바뀌었다.

친부모인 랑드 남작 부부에 대한 진실을 안 세레나의 마음은 증오로 끓고 있었다. 벨리알과 클라인 공작가를 파멸로 이끌고 싶어 했다. 벨리알을 사랑했지만, 벨리알의 친모였던 선대 세레나는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세레나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내 부모를 죽였어.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당신 자식들을 데려갈 거야.”]

세레나의 소원은 거의 이루어졌다.

로렌츠가 무법 지대 출신의 마법사단을 끌어들였을 때, 그들과 손을 잡아 클라인 공작가의 사람들을 해치운 것이다. 과정까지는 다 볼 수 없었지만, 어쨌든 로렌츠와 선대 세레나는 확실히 죽었다.

그러나, 벨리알은 죽지 않았다. 그는 가사 상태가 되었고, 그가 쓰러지는 순간 세레나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복수가 끝났으니만큼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세레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건 단지 본래의 ‘세레나’가 가진 감정에 동화되어 내린 결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레나는 죽어 가는 벨리알을 끌어안고 북부로 향했다. 그녀는 죽음을 번복하고 영생을 선사하는 ‘겨울의 심장’을 손에 넣기로 했다. 신의 영역을 능가하는 절대적인 힘. 모든 마법사의 열망 끝에 있는 것.]

[비록, 옳지 않은 일이라 해도.]

그녀는 마법사들과 결탁했다. 그들의 연구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마지막 순간 그들이 만든 마지막 겨울의 심장을 빼돌려 그것으로 벨리알을 살려 냈다.

겨울의 심장.

새파랗게 얼어붙어 반짝이는, 마법으로 만든 심장. 그 안에는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겨울의 심장은 영생을 선사하는 기적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그저, 누군가의 생명을 집어삼킨 푸른 괴물일 뿐.]

세레나는 양손으로 심장을 쥐고 가까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야가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었다.

푸른빛이 가까워진다. 일렁이는 그 빛무리가 나를 삼켜 버릴 것 같았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그건 누군가의 목숨이었다.

영생을 위해 집어삼킨 숱한 사람들의 목숨.

죄악과도 같은 빛이 눈을 찔러 왔다. 저절로 구역질이 치밀었다.

“…….”

그래서 세레나는 그 빛을 거머쥐었을까, 아니면 흘려보냈을까. 복수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랑을 위해서도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걸까.

겨울의 심장은 기적도 선물도 아니다.

그건 그냥…….

“……슈.”

비극일 뿐이야.

왜 이 이야기는 모두에게 비극인 걸까. 이 비극을 기적의 힘으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럴 힘이 있을까.

“슈!”

헉, 깊은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것처럼 급히 숨을 들이켰다. 나는 사레가 들어 콜록거렸다.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다급한 손길이었다.

“정신 차려!”

나는 헐떡이며 눈을 떴다. 시야가 뿌옇다.

덜컹.

마차가 흔들렸다. 나를 붙잡고 흔든 건 당연하게도 카일이었다. 그의 상체가 내게 바짝 붙었다.

그가 내 코밑에 손가락을 대 보더니 그대로 손을 내려 엄지로 입술을 눌렀다. 의식하지 못한 새에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숨 쉬어라.”

제멋대로 쿵쾅거리던 박동이 잦아들었다. 나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동요한 건 사실이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서고, 딱딱하게 굳어 버릴 정도로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눈을 보는 순간, 가슴 안쪽으로 차갑게 응어리졌던 불안감이 녹아 가는 것만 같았다.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

“네가 괴로워 보여서.”

카일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내 뺨과 이마를 문질렀다.

“식은땀을 이렇게 흘리는데,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겁먹을 것 없다. 어차피 그건 그들에게 찾아올 숱한 미래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바꾸러 이곳에 왔다.

“괜찮나?”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 나는 신이 아니니까. 그래도 가장 애처로웠던 사람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너를, 구할 수는 있겠지.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냥 꿈 좀 꾼 것뿐인데요, 뭐.”

그게 그저 나쁜 꿈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할 수만 있다면.

“괜찮아요.”

카일이 이마를 조심스레 맞댔다. 그의 부드러운 호흡이 내 코끝에 닿았다.

“정말이겠지.”

“속고만 사셨나.”

마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나는 그에게 짧게 입 맞추며 웃었다.

“걱정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널 좋아하니까.”

“팔불출.”

“하하.”

그가 눈을 내리깔며 웃더니, 쓸린 상처가 거의 다 아물어 가는 내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래서, 싫어?”

내가 입을 비죽 내밀며 대답했다.

“좋아요.”

“뭐라고?”

“좋아한다고요! 아, 진짜 못 들은 척은!”

우리는 마차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더없이 완벽한 결말의 행복한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66화. 햄스터가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4)

시간은 흘러, 어느덧 밤이 되었다.

우리는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야영을 준비했다. 모든 것이 풍족한 황성과는 달리 불편한 것투성이였지만, 아무도 투덜거리지 않았다.

센이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던져 넣을 동안, 벨리알은 기사들에게 받은 재료로 스튜를 끓였다. 카일과 블레이크 기사단의 기사들은 말에 여물을 먹이거나 침낭을 펴고, 불침번의 순서를 정했다.

나는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구면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사냥에 따라올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

‘분명히 블레이크 기사단은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블레이크의 기사로서가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 지원한 모양이다. 그들은 고단해 보였지만, 동시에 기꺼워 보였으니까. 카일이 영주로서 얼마나 신뢰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번에 새로 구매한 <마수학 도감>을 펼쳤다. 인벤토리에 넣어 둔 책을 갑자기 꺼냈더니 기사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이따금 보냈다.

이 도감으로 말하자면, 러브러브 코너의 신상품 되시겠다.

[( ̄︶ ̄)+++]

그래, 그래.

이번 건 정말 요긴했다. 뭐든 활용할 수 있어야 의미가 있는 거다. 그렇고말고.

엄밀히 말하자면 <마수학 도감> 자체가 신상품은 아니다. 단, 내용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지금 상황에 가장 필요한 동부 지역 마수와 고대의 괴물들의 정보 위주로 재편성된 것이다.

물론, 내용을 싹 바꾸는 데 소요된 하트는 무려 삼백 개. 예전이라면 기함했을지도 모르지만…….

“전하.”

“응.”

[현재 보유 현황 | ❤×699]

[현재 보유 현황 | ❤×703]

[현재 보유 현황 | ❤×707]

잘도 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기적 수치랑 바꿔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앞으로도 하트가 모자랄 일은 별로 없어 보이니까 괜찮겠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책을 펼쳐 보았다.

“어디 보자…….”

늪지대와 풀숲에 주로 사는 마수들은 기본적인 모양새가 짐승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았다. 염소, 개구리, 멧돼지, 곰은 물론이고 이따금 지네나 잉어 같은 것도 있었다.

“북부 마수들과 엄청 다르진 않네요. 늪이나 호수에 사는 마수가 좀 추가된 것뿐이지…….”

어느새 내게 가까이 다가와 서선 책을 함께 들여다보던 카일이 대답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마수들은 대개 영지 근처, 북부 초입에 사는 놈들일 테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여기도 동북부 숲이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다.”

“북부 초입이요?”

“그래. 평야 지대와 일부 삼림까지는 초입으로 치지. 그 이후 벌판, 설산, 그리고 바다부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나 보네요.”

카일이 서늘하게 웃으며 물었다.

“궁금한가?”

“……아뇨.”

세상엔 알면 다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물론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아니다.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덕분에 팽팽했던 긴장감이 조금 느슨해진 기분이 들었다.

할 일을 적당히 마친 듯 그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카일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마수학 도감>을 빠르게 읽어 갔다.

보다 보니 좀 독특한 마수들도 있었다. 책장을 몇 장 더 넘기던 나는 코볼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북부에도 코볼트가 있나요?”

“그래. 얼음 광산 쪽에 밀집해 있지. 그리 똑똑한 놈들은 아니지만, 타고난 성질이 집요하기 때문에 한 번 적의를 가지고 달라붙으면 상당히 성가시다. 그놈들이 빽빽하게 둘러싸면 새파란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 들더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참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코볼트는 덩치가 작으나 표독스러워 보였고, 푹 꺼진 눈자위 중앙에 박힌 푸른 눈동자만이 음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놈들은 숲에 사는 개체라 그런지, 전반적인 피부색은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수들과 비슷한 진녹색이었다. 그리고 검고 긴 손톱에는…….

“개중 동부 숲의 코볼트는 조심하는 게 좋다. 손톱에 마비 독이 있거든. 해독제는 준비해 두었지만, 퍼지는 속도가 빠른 편이라서.”

그때, 벨리알의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숲 깊은 곳에 서식하는 개체는 대개 비슷해.”

그의 말대로였다.

<마수학 도감>에도 동부 숲 코볼트의 손톱에는 독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글귀가 보였다. 다른 페이지에도 독성에 대한 주의 문구가 심심찮게 적혀 있었다.

“마수학도 배우셨어요?”

센이 물었다. 그녀는 내 옆에 서서 카일이 나눠 주는 스튜를 받고 있었다.

벨리알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언젠가 이 ‘사냥’에 참석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지.”

신기한 일이었다.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아 건조하게마저 느껴지는 음성이었는데, 그래서 더 씁쓸한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황위가 뭐길래 하나뿐인 목숨마저 내던지는 걸까.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언제나 내게 가장 급급했던 건 살아남는 일이었으니까. 자존심이, 잠깐의 기분이, 어떤 이상이 날 먹여 살려 주지는 못했으니까.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카일이 내 몫의 음식을 가져가 먼저 먹어 보았다. 독을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살짝 웃는 낯이 다정해서, 조금 부끄러워진 내가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누가 독을 타겠습니까?”

너스레를 떨듯 말하자, 그가 고개를 단호하게 내저었다.

“슈. 전쟁 중에 가장 먼저 죽는 이가 누구인지 아나?”

“……음, 글쎄요. 자기 수준도 모르고 나서는 사람?”

정답을 알려 준 건 벨리알이었다.

“긴장하지 않는 사람.”

“…….”

“특히 이런 특수한 형태의 정쟁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건 정정당당한 결투 따위가 아니야.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를 죽이기만 하면 끝나는 경기와 같다. 긴장하지 않으면 바로 급소를 찔려. 전장에서 의심은 의무나 마찬가지야.”

카일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전쟁 중 가장 운 좋은 죽음은 적장의 칼에 찔려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말이 있지.”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이 설명을 하는 이들은 바로 이 제국의 황자들이다. 황제가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대공작 정도의 작위를 받아, 한평생 부족한 것 없이 잘만 살아갈 것 같은.

그런데 정작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주변을 의심하고, 확인하고, 숱한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팍팍하고 삭막하게 사는 건 다 비슷하구나…….’

이후, 우리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각자의 몫으로 배당된 음식을 먹어 치웠다. 내일부터는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충분히 먹고 쉬어 둬야 했다.

아까의 대화로 인해 자극받은 나는 의욕적으로 스튜를 마시기 시작했다.

조심해야 할 건 상대의 칼뿐만이 아니다. 더위나 추위, 산짐승, 배고픔, 식중독과 탈진 따위에도 사람은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

카일은 내가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빤히 바라보다가 제 몫의 빵마저 내밀었다. 나는 사양하려던 생각을 금세 접고 받아서 입에 밀어 넣었다.

든든하게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도감을 다시 펼쳐선 ‘숲 지네’나 ‘외뿔 사슴’, ‘전나무 정령’ 따위의 설명을 읽어 내렸다.

그럴 때면 카일과 벨리알이 곁에서 경험담이나 지식을 알려 주었다. 또, 센은 내일 필요한 물건을 챙기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거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밤은 점차 깊어 갔다.

*

어느새 내 ‘불러오기’ 시간이 슬슬 끝나 갈 무렵이었다.

“두 명씩 짝지어서 불침번을 선다. 수상한 이가 접근하거든 보고하기 전에 죽여도 좋다.”

벨리알의 싸늘한 목소리에 기사들은 허리를 깊이 숙이더니 순서를 정해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따금 우리의 안전을 확인하려는 듯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여기서 바로 사라지기가 애매한데.’

어떻게 해야 하나.

인상을 쓰며 고민하던 차, 카일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밤이 되면 체온이 떨어질 수 있다. 마셔 둬.”

그렇게 말하며 잔 하나를 건넸는데, 내용물을 살펴보니 따뜻하게 데운 술이었다.

“두 명씩 붙어 자는 게 안전하다. 저쪽 침낭으로 오도록.”

……그러니까, 지금 붙어 자자는 건가?

나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카일을 올려다보다가, 그가 의미심장하게 눈짓하는 걸 보고 의도를 파악했다.

‘아, 설마.’

붙어서 자다 보면 그의 덩치에 가려져서, 내가 중간에 사라져도 티가 안 날 테니까?

언제 어디서 기적 수치를 소모할지 모르니까 비상용으로 산 쿠키는 아껴 두는 게 좋긴 하다. 다만, 새삼스레 붙어 자자니 부끄러워서 그렇지.

어쨌든, 카일의 제안은 이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들이켰다. 독한 술이 혀끝부터 목구멍을 홧홧하게 데우는 것 같았다.

다 마시지는 못했지만, 카일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내게서 잔을 가져가 나머지 술을 모조리 비우더니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어느새 나는 널찍한 침낭 안에서 그와 딱 붙어 있었다. 모포를 꼼꼼히 꿰매 만든 침낭은 몸을 숨기기 딱 좋아서, 지금 당장 햄스터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하지만 곧장 변하지 않고, 얼마간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던 이유는…….

‘……따뜻하다.’

따뜻했다. 카일은 보통 사람보다 체열이 높은 것 같았다. 조금 느린 듯하게 뛰는 심장 소리도 듣기 좋았다.

나는 머뭇거리는 손길로 그의 허리를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심장이 되게 천천히 뛰시네요.”

“싸우는 이에게 침착함은 기본 소양이니까.”

그 말에 나는 괜히 억울해지고 말았다. 내 심장은 너무 빨리 뛰어서 이 소리가 금방이라도 새어 나갈 것 같은데, 본인은 침착하단 말이지.

얄밉다는 듯 올려다보자, 어둠 속에서 카일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사실은.”

“…….”

“지금은 평소보다 심장이 빨리 뛰는 편이다.”

그 말에 무어라 투덜거리려던 내 입이 우뚝 멈추었다.

……빨리 뛰고 있다고?

나처럼?

그 말에 살짝 울컥했던 감정은 삽시에 녹아내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란 사실이 이토록 간지러운 줄 몰랐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품에 귀를 붙인 채 조금 느린 듯, 하지만 선명한 소리를 내며 뛰는 심장 소리를 전해 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일 일어날 일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묻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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