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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은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답지 않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나 또한 굳어 버린 나머지 그가 그토록 기다리는 대답을 들려줄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다. 말문이 막혔고, 몸은 우뚝 멈췄으며…… 숨 쉬는 일조차 어색하고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어떡하지?
나 진짜 어떡하냐. 분명히 엄청 바보 같은 표정 짓고 있겠지.
카일은 멀어지지도, 그렇다고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묘한 열의로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로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짧은 적막 속에서 그가 속삭였다.
“싫어?”
툭.
무언가 내려앉는 것 같기도 하고, 과녁 정중앙이 꿰뚫려 버린 듯도 했다.
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내 심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러나 정작 대답을 위해 벌어진 입술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거절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더 닿고, 내 것과 다른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정쟁을 앞둔 지금, 까딱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감히 내 욕심대로 그를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카일을 좋아한다. 무언갈 좋아한다고 단언해 본 적이라곤 없는 인생에서 유일하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생겼다.
그래서일까, 놓고 싶지 않았다. 닥친 상황, 번잡한 사정, 그런 건 전부 밀어 두고 지금은 그냥 오직 카일만 생각하고 싶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원히 그래야만 한 대도 기꺼이 그럴 사람처럼.
“……왜 알면서 물으시지.”
그 눈빛도, 목소리도, 손길도, 표정도.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해 오면, 사람 심장이 남아나지 않게 애원해 오면, 대체 어떻게 거절하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일에게는 그 정도의 신호로도 충분했던 모양이다.
카일이 내 손을 당겼다. 그리고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자리를 옮겼다. 제 방으로 데려가는 그는 조금 성급해 보였고, 절실해 보였고, 또…… 조금 기뻐 보였다.
*
툭, 내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신호는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그의 뺨을 쥔 손에 힘을 조금 실어 얼굴을 가까이 당겼다. 카일은 어떤 저항도 없이 내게 이끌려 오며 눈을 내리깔았다. 일견 부드러운 미소마저 짓는 그는 얼핏 순종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입술이 맞닿았다.
처음엔 그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서툴렀다. 태어나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닿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말랑하고 조금 뜨거운 입술이 닿은 것만으로도 순간 뻣뻣하게 굳어 버려서, 눈을 감는 것조차 깜박 잊었다.
‘너무 가까워…….’
정말이지, 너무 가까웠다. 시야가 온통 카일로 가득 차서, 다른 것이 감히 끼어들 여지조차 없는 것 같았다.
초점도 맞지 않을 만큼 바짝 다가온 그가 이윽고 눈을 떴다.
입술을 맞댄 채 나를 바라보고, 이내 살짝 웃더니 손을 내려 내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다른 쪽 손으로 목덜미를 감싸곤 달래듯이 살살 누르기 시작했다.
얇은 살갗을 문지르던 손이 살짝 올라와 내 뒤통수를 받치고, 고개를 기울였다.
“눈 감거라.”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입술이 조금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맞물렸다.
자연스레 스며드는 호흡이, 그리고 닿아 오는 모든 감각이 이상하고 뜨거웠다. 자연스레 몸에 힘이 빠졌다. 다행히도 벽과 카일의 몸 사이에 완전히 눌린 상태라 넘어지거나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숨을…….’
숨을, 어떻게 쉬는지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은 내가 얕게 헐떡이며 카일의 어깨를 꽉 쥐었다. 핑 도는 느낌을 견디기 위해 그에게 거의 매달린 꼴이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못 견디고 먼저 입술을 떨어뜨린 건 나였다.
고개를 조금 돌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자 그가 턱을 쥐어 내 입가에 몇 번 입을 맞추더니,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며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하아아아…….”
“괜찮으냐?”
괜찮겠냐.
여전히 눈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와중에 힘이 빠진 내 몸을 단단히 받쳐 주는 팔의 감각이 좋아서 뿌리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는 샐쭉한 눈길로 그를 보다가 어깨에 이마를 댔다.
“저…….”
내 작은 목소리에도 카일은 귀를 기울였다. 그저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적당한 말을 찾기도 전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앞으로 20초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아니, 이런 건 미리 좀 알려 달라고!
[( ̄へ ̄)+]
왜. 뭔데. 왜.
혹시, 알려 줬는데 내가 키스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못 봤다던가…….
[( ̄へ ̄)++++]
그런 모양이다.
괜히 겸연쩍어진 내가 크흠, 헛기침하며 카일의 허리를 느슨하게 끌어안았다.
“저, 시간 다 됐거든요.”
카일은 정말로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예, 그렇게 됐네요.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숨을 고르느라 잠깐 입을 다물었던 내가 이어 말했다.
“제 옷 좀…….”
‘불러오기’를 해제할 때마다 이게 번거롭다. 옷만 버려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 물론, 지금은 방이라서 적당히 갈무리하면 되지만.
다행히도 카일은 내 말을 곧장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옷을 챙겨 줄 테니, 그쪽으로 와 달라는 뜻이다.
평소라면 편하게 햄스터 집으로 들어갈 텐데, 저렇게 기대하니 그럴 수도 없고.
에휴, 인생아.
나는 못 이긴 척 햄스터로 돌아와, 그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
그는 처음으로 진기한 것을 본 아이처럼 제 손바닥 위로 하얀빛이 모여들었다가, 이내 조그만 마수가 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지친 내가 그의 손바닥에 퍼져 버리자,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보니 말하는 것이 늦었구나.”
―찍. (뭘?)
“너를 좋아한다.”
그렇게 말하며 내 이마에 키스하는 그가 너무 기꺼워 보여서, 행복해 보여서, 나를 너무나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아서.
그래서, 무심코 햄스터가 된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렀다.
우리는 다방면으로 정쟁에 대비했다. 나는 시스템을 닦달해, 기어코 견과류 상점에 신제품을 들였다.
NEW! [긴급 탈출 호박씨 스틱 | 기적 수치 8% 소모 | 반경 10m 안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습니다.]
NEW! [얼음, 땡! 해바라기씨 초콜릿 | 기적 수치 5% 소모 | 시간을 1분간 멈출 수 있습니다.]
엄청난 효능에 비례하는 가격이었다.
무슨, 와…… 8퍼센트? 갈수록 물가가 오르잖아!
[<(_ _)>]
하긴, 이 세상에 개입할 힘을 주는 거니까 어쩔 수 없겠지. 살 떨려서 여러 번 쓰지는 못하겠지만, 순간 이동에 시간을 멈추는 거라면 활용도가 굉장히 높다.
다쳤을 때 쓸 만한 진통제나 연고도 있으니까, 이 정도면 괜찮겠네.
[현재 기적 수치 48.2%]
‘기적 수치도 상당히 많이 모았고.’
아무래도 내가 카일을 좋아하게 된 게, 그리고 카일이 나를 위해 움직인 게 그의 운명을 바꾸는 데 꽤 큰 영향을 끼친 듯했다.
그와 처음 키스했을 때, 그리고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그 이후로도 조금씩 기적 수치는 올라갔다. 덕분에 자잘한 퀘스트 같은 건 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였다.
기적 수치는 많을수록 좋지. 특히, 사냥하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이쪽으로 와 보거라.”
카일의 부름에 나는 시스템을 내버려 두고 카일에게 다가갔다.
그는 커다란 상자 안에 담긴 물건을 이것저것 꺼내더니, 갑옷 하나를 꺼내 내 몸에 가볍게 걸쳐 보았다.
“이건 좀 크겠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번쩍 들어서 몰랐는데, 어깨에 무게감이 전해지는 순간 상체가 앞으로 확 기울었다.
물론, 카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어깨와 허리를 붙잡아 주었다.
“이, 이게 무슨…….”
“브리간딘 갑옷이다. 최대한 가벼운 것으로 준비했는데, 네게는 좀 과하군.”
“그러니까, 제가 이걸 갑자기 왜 입습니까?”
“사냥 때 입고 가야지. 화살 정도는 막아 줄 수 있을 거다. 창은 어렵겠지만.”
“…….”
그의 말에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현실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우리가 참여하는 건 단순한 사냥이 아니다. 어쩌면 짐승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적의가 득시글거릴지도 모른다. 정쟁이니까.
고작 며칠 뒤면 창이나 화살 같은 것에 죽을 수도 있는 곳으로 간다는 거지.
“그리고, 이것도.”
그는 나에게 단검을 한 자루 쥐여 주기도 했다. 새파랗게 벼려진 칼날에 손이라도 잘못 댔다가는 버터처럼 잘려 나갈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무장을 해 두는 게 좋아. 뭘 만날지 모른다.”
“…….”
“마법사단 놈들이 강화한 마수가 나타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 한다. 알겠나?”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고집을 부리듯, 무거운 갑옷을 걸친 채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너를 살리러 가는 건데, 어떻게 널 두고 도망치겠어.
“네가 나 때문에 죽는 게 싫다.”
카일이 말했다. 차갑고 단단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이었다.
“마법사단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황자를 보호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슈, 너를 지키는 일이다. 그러니…….”
나는 물끄러미 카일을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쫙 늘렸다.
“누군 아니겠어요. 저도 그렇거든요?”
“슈, 잠깐 이것 좀 놓고…….”
“절 지키다가 전하가 다치기라도 하면, 저는 뭐 마음이 편합니까? 어떻게 두고 도망치라는 말을 해요. 같이 살아남자는 말을 해야지.”
“…….”
“운명 공동체잖아요.”
또다시 혼자가 되는 건 지긋지긋하다.
“저도 준비한 게 없지는 않으니까…….”
호기롭게 말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변명하는 듯한 말투가 되었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낸 내가 재빨리 덧붙였다.
“어쨌든! 같이 무사히 돌아가자고요, 북부로.”
그는 조금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한 말이 새삼스러웠던 건가?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다가, 이내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북부의 한기를 견디며 살아온 삶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한 체온이 내 이마를 스쳤다가 떨어졌다.
“그래.”
카일이 말했다.
“꼭 살아남아서.”
“네, 살아남아서.”
“같이 돌아가자.”
그때만큼은 내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며, 무엇을 위해 이 세계에 왔는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 약속만이, 그와 함께 그려 내는 미래만이 선명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