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63화 (63/129)

63

한 번 ‘불러오기’ 하는 데 약 네 시간. 그리고 틈날 때마다 바쁘게 먹어 치웠던 도토리 쿠키.

덕분에 요즘은 인간으로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다. ……당연한 거지만, 어쨌든 그렇다. 게다가 팔자에도 없었던 칼부림까지 목도했으니, 기억이 뇌리에 선명한 것 역시 당연하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면.

―찍찍찍. (햄스터로 있는 게 어색하다고!)

나는 울분을 토하며 톱밥을 쥐어뜯었다.

동그랗고 부숭부숭한 머리를 바닥에 쿡 처박자, 카일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캐슈넛. 아니, 슈라고 불러야 하나.”

그는 잠시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한숨을 푹 내쉰 나는 톱밥이 잔뜩 묻은 몸으로 그의 손바닥 위에 올라탔다.

얌전한 내 반응에 그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마저 잊은 것인지 ‘캐슈넛’을 보듯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빛을 마구 보냈다.

그 증거로 지금도 하트가 띠링띠링 소리를 내며 올라가고 있었다.

―찍! 찍찍! (인마! 넌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면서 그렇게 쳐다보고 싶냐!)

[(*/ω\*)]

이젠 시스템에게 반박할 생각도 안 든다.

가만 보면 저 녀석, 드라마 애청자 같다니까. 나랑 카일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싶으면 꼭 저렇게 치고 들어오잖아.

묘한 분위기.

묘한 분위기를…….

―…….

머릿속으로 아까의 장면이 떠올랐다.

또렷하면서도 수려한 얼굴이 곧장 닿을 듯 가까이 있었던 그 순간이, 그래서 입술이 거의 맞닿을 뻔했던 그 찰나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이제 다른 의미로 머리를 쥐고 절규하기 시작했다.

아! 이상한 타이밍에 끊어서 오히려 떠올릴 때마다 더 어색해!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아!

‘사람을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눈길이었지. 동시에 무언가를 찾아내고 싶은 듯, 내게서 어떤 것을 기대하는 것 같은 시선이기도 했다.

아마 센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분명 입을 맞췄을 것이다. 그랬다면 첫 키스였겠지만…… 거부감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그를 좋아하니까.

마주치는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기 싫었고,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기 싫어서 몸이 우뚝 굳었다. 오히려 내심 기대한 듯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좀 부끄럽긴 해도, 어느새 깊어진 마음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래 봤자, 하루에 스무 시간은 햄스터잖아!’

햄스터인데 키스해도 되는 건가? 하루의 반은 애완 마수인데?

“캐슈넛.”

―…….

“슈.”

카일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건지.”

―찍. (에휴.)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홱홱 저었다.

말자, 말아.

어차피 지나간 거, 불발탄 뒤적여 봤자 어디다 쓰겠냐. 카일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데 혼자 생각하자니 좀 무안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한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 겨우 열흘이니까.

나는 팔과 머리에 묻은 톱밥을 탈탈 털어 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일이 세상 더 없을 흐뭇한 얼굴로 나를 안고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생각보다 어색하지는 않군. 너는 인간일 때나 지금이나 작은 편이고.”

―찍? 찍찍? (뭐야? 시비 거냐?)

“생김새도 비슷한 데다.”

―찌익. (고소해도 될 것 같은데?)

“퍽 사랑스러우니.”

카일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의 손가락을 샌드백 삼아 열심히 푸닥거리던 나는, 그 마지막 말에 우뚝 동작을 멈추었다.

낯간지럽다. 일평생 사랑스럽다는 말 근처에 가 본 적이 있었어야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좀 얌전히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슬그머니 카일의 손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네 말을 못 알아들어도, 너는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지.”

―찍. (그래. 당연하지.)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고맙고 미안하다. 벨리알의 계획에 동참해 준 것과 그것 때문에 너를 위험하게 만든 것.”

―찍찍. (누가 누구 걱정을 하냐.)

네 코가 석 자다, 네 코가 석 자야. 대공 전하, 전하의 안위나 걱정하세요. 기사단도 못 데려가는데.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너만큼은 이 목숨을 다해 지킬 테니.”

―찍찍찍찍. (아니, 아니. 그게 아니지. 목숨을 걸면 안 되지!)

“그래, 슈. 그렇게 감동받을 필요 없다.”

―찍찍! 찍! (아니! 야, 인마! 그게 아니라니까!)

[~( ̄▽ ̄)~*]

즐겁냐? 즐거워?

나는 더 열이 뻗치기 전에 카일의 팔을 타고 침대로 내려왔다. 그리고 베개를 떡하니 차지한 채 당당하게 몸을 말고 누웠다.

“그래. 자고 싶으냐.”

카일이 자상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곁에 누웠다.

베개도 없이, 제 팔을 베고 누운 그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나는 결국 꾸물꾸물 카일의 손에 붙었다. 그리고 힘껏 당기자 손이 조금씩 끌려온다. 뿌리칠 수도 있지만, 그럴 필요를 조금도 느끼지 못한 듯 내 움직임에 따라 준다.

그래. 심술부려 봤자 뭐 하냐. 카일은 어차피 알지도 못하는데. 베개나 베고 자라. 피곤할 텐데.

그러나 순순히 당겨 오던 카일의 손은 이내 내 몸을 집어다가 다시 베개 위에 데려다 놓았다.

“거기서 자거라.”

―찌익. (햄스터가 여기서 자서 뭐 하냐고.)

“보아하니 네가 여기서 자서 무얼 하느냔 말인 것 같은데.”

―찍……. (이런 건 또 귀신같네…….)

“네가 거기서 자면, 내가 좋다.”

―…….

“눈에 잘 띄지 않느냐.”

말문 막히게 하는 데 재주 있네.

나는 카일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몸을 둥글넓적하게 말며 눈을 감았다. 등 뒤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한 곡의 자장가처럼 부드럽게 감겨들어서, 그날은 유독 이르게 수마가 밀려왔다.

*

자, 그러니까…….

‘가진 거 다 내놔 봐.’

[(⊙o⊙)]

뭘 그렇게 놀란 표정으로 봐? 아이템 말이야, 아이템. 기적 수치를 많이 써도 되니까, 좋은 걸로 신제품 몇 개 달라고. 확실한 거.

뭐가 있지? 투명 인간이 된다든가, 순간 이동을 시켜 준다든가, 아니면 치명상을 확! 좋아지게 해 준다든가.

어차피 지금 기적 수치가 39.2퍼센트니까, 앞자리가 2로 떨어지지 않는 이상 좀 과감하게 써도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녀석 목숨을 살리는 일이니까.

[(ㅠ_ㅠ)=3=3=3]

안 된다는 말은 않는 걸 보니, 시간을 들여서라도 준비할 모양이다.

나는 활시위를 얼굴 근처까지 팽팽하게 당겼다. 힘이 잔뜩 들어간 손가락이 얼얼하다 못해 퉁퉁 부을 정도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툭.

화살이 과녁 근처까지 날아갔다가 힘없이 떨어졌다.

“……다시.”

나는 얼얼한 손을 움직여 새 화살을 꺼내고, 시위를 힘주어 당겼다.

툭.

화살이 과녁을 빗맞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확실히 전보다는 나아졌다.

다시.

다시, 그리고 또다시.

이젠 손이 아프다 못해 감각이 없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런 고통 같은 건 무력하게 죽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무얼 그렇게 열심히 할까.”

“헉!”

뒤에서 불쑥 들려온 소리에 놀라서 순간, 손을 놓았다. 그를 돌아보기 위해 뒤돈 상체가 휘청, 옆으로 기울어지며 시위가 뺨을 스쳤다.

불이 붙은 듯 화끈화끈한 통증이 전해졌다. 카일은 재빨리 내 손목과 활을 모아 잡아 애먼 곳으로 화살이 날아가지 않도록 막았다.

퉁, 제자리로 돌아간 시위가 잠시 떨렸다가 멎었다.

“활을 당길 때는 과녁에만 집중해라.”

카일의 손등이 내 뺨에 닿았다. 따끔한 감각에 내가 입술을 깨물며 반걸음 물러나자, 그의 얼굴에 미안하다는 기색이 어렸다.

“……그러게, 누가 기척도 없이 나타나랍니까?”

“미안하군. 충분히 소리를 낸 것 같았는데.”

“…….”

그는 혀를 차며 손수건으로 내 상처를 문질렀다. 살이 조금 까졌는지 피가 조금 묻어났다.

“연고를 가져와야겠군.”

“괜찮아요. 이런 건 그냥 한숨 자고 나면 나아요.”

내 말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카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흉이라도 지면.”

“그럼 흉 지는 거죠. 뭐가 문제람.”

“…….”

카일은 말없이 내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퉁퉁 부은 손을 살펴보더니, 제 손바닥으로 덮듯이 꾹 쥐었다. 마치, 그렇게 해서 내 고통을 가져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괜찮다. 내가 지켜준대도.”

“싫거든요.”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발목 잡기 싫어요. 어쨌든 제 선택으로 참여하기로 한 거고, 저도 전하를 지키고 싶거든요.”

“그렇다고 무리하라는 뜻은 아니야.”

카일이 고개를 숙였다. 나보다 족히 한 뼘은 크던 이와 시선이 일직선으로 맞아떨어졌다.

그가 수심 가득한 눈길로 내 손과 뺨의 상처를 살폈다.

“적당히 느슨할 필요도 있다는 뜻이다. 슈, 지금 넌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어.”

“…….”

“네가 내 운명을 전부 다 책임져야 한다고 믿나? 꿈에서 보았던 것을 바꾸기 위해?”

“……아뇨.”

나는 양손을 뻗어 그의 뺨을 쥐었다. 따뜻하고 매끈한 얼굴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훔쳐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란 걸 압니다.”

그래, 너는 그냥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겠지.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더 이상 내게 단순히 소설 속 인물로 그치지 않았다.

“구부러지지 않는 건 부러지기 마련이지.”

그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하께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한데요.”

타협하지 못해서 막다른 길까지 달려간 적이 있는 사람이 나한테 이런 조언을 할 처지냐.

하지만, 그의 말이 옳다는 건 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음이 조금은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을 떨어뜨리려는데, 그의 손이 다가와 멀어지는 내 손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슈.”

낮은 목소리가 귓속을 긁듯이 파고들었다. 별안간 그의 존재를 인지한 모든 곳에 불길이 인 듯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앞으로 몇 분 남았지?”

분명 위협적이지 않은데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떨리는 시선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15분…….”

그러자, 그가 내게 속삭였다.

“그 시간을 내게 줘.”

그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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