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62화 (6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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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요.”

나는 두 사람의 심각한 분위기에 끼어들었다.

“정리해 보자면, 로렌츠 황자님이 무법 지대의 마법사들과 손을 잡았다는 거네요. 그중에서도 ‘서리의 마탑’ 소속이면, 카일 전하와 상당히 오래도록 대적한 놈들일 거고요.”

“그렇다.”

“그래서 로렌츠 황자님이 이 정쟁에서 이기기라도 하면, 마법사들에게 도움을 줘서 북부를 압박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분명히 그렇게 되겠지, 형님 성격에.”

벨리알이 대답하자, 카일이 신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번 사냥이 놈들을 생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간 직접적으로 움직인 적은 거의 없었거든.”

“뭐, 그럴 수도 있는데요.”

내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럼, 벨리알 황자님께서 황제가 되면 뭔가 다릅니까?”

운명이 바뀌었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좋아진 건 아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벨리알은 카일의 출신을 경멸했고, 툭하면 북부를 압박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북부 축제 때 꼬투리를 잡겠답시고 영지까지 직접 올라온 전적이 있다. 샹들리에를 내가 막았기에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벨리알이 과연 그 샹들리에의 출처 따위를 궁금해했을까? 그 성격에?

그런 그가 황제가 된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카일을 배려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다음 목표를 그로 설정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벨리알 전하께서는 북압 정책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으십니까?”

벨리알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을 의심하냐는 듯 날카로운 시선이었지만, 나는 주눅 들지도 물러나지도 않았다.

믿는 마음이 흔들린 게 아니다. 처음부터 안 믿는 거다. 나는 누구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게 얼마나 과분하면서도 위험한 감정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지적이로군. 좋다. 맹세하지.”

“…….”

“북압 정책을 펼치지 않겠다고, 내 이름에 걸고 맹세하마. 카일에게 좋은 감정이 있다고는 농담으로도 못 하겠지만, 사리 구분도 못 할 만큼 뻔뻔하지는 않아.”

카일은 조금 놀란 듯 나를 보았다. 분노 때문에 거기까지 명확히 떠올리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안 되지. 따질 건 따지고, 받을 건 다 받아야 하는 법이다.

“계약서를 씁시다.”

남는 건 계약서다. 암, 그렇고말고.

벨리알은 찜찜한 듯 제 이름에 걸고 맹세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딱 잘라서 대답했다. 네. 부족한데요.

이름과 명예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때때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건 상황에 따라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의지가 아니다. 불이익에 대한 공포. 그것만이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법이라고.

“내가 요구하는 건…….”

결국, 뚱한 얼굴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낸 벨리알이 글을 적기 시작했다.

「카인 제인 마인하르트의 ‘사냥’ 참전.」

「마수와 짐승을 죽이기 위한 정보를 제공할 것. 또한, 정치적 기밀을 외부에 일절 발설하지 않을 것.」

「목숨을 위협받지 않는 선에서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를 최대한 호위할 것.」

간결한 조건이었다. 몇 가지 되지는 않았으나, 하나하나가 굵직한 사안이다.

“이 정도겠군.”

“동의합니다.”

카일이 덤덤하게 말하며 깃펜을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조건을 한 줄 적어 내렸다.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의 즉위 이후, 북압 정책을 펼치지 않을 것. 북부 블레이크 영지를 존중하고, 카일 블레이크를 대공작으로서 예우할 것.」

「‘사냥’에서 생포한 마법사들의 처우를 블레이크 영지에 인도할 것.」

「‘서리의 마탑’과 ‘무법 지대의 마법사단’에 관련된 정보를 적극 공유할 것.」

수려한 서체를 빚어내던 카일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슈.”

응? 갑자기 나를 부른다고?

“네?”

“네가 바라는 건 없나?”

카일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그를 따라갈 거란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가 정쟁에 휘말려 죽을지 살지 알 수 없으니, 운명 공동체로서 당연히 함께할 생각이기는 했지만.

“제 운명 공동체라서. 기왕이면 동행인이 바라는 것을 조건에 포함하고 싶군요.”

부드러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단호함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내게 닿아 오는 시선은 다정했다.

바라는 건 뭐든지 말하라는 듯한 그 눈길에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카일이 나를 정말 중요한 존재로, 필요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무언가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누가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원하는 게 뭐냐고 살뜰히 물어본 게 얼마만의 일인지.

“바라는 거, 있어요.”

나는 숨을 짧게 들이켜고는 재빨리 말했다.

“저도 갈 겁니다.”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한테는 시스템도 있고, 여차하면 아이템을 쓰거나 ‘불러오기’를 해제해서 피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승마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활 쏘는 것도 그렇고.”

승마와 궁술에 익숙한 현대인이 얼마나 있겠냐. 말 타는 상상만 해도 아직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갈 겁니다.”

카일은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내 뜻을 꺾으려 들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따라갈 거라 생각하고 물어본 거면서.

“그리고?”

“카일 전하의 목숨이 위험해지면 바로 퇴각할 겁니다. 거기에 대해 어떤 책임도 묻지 마세요. 도움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대공 전하의 안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한정됩니다.”

벨리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더 있나?”

“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센을 지켜 주세요.”

“…….”

“형제 싸움에 피 보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센도 같이 갈 거 아닙니까? 약혼식 때도 대공 전하께서 나서지 않았다면, 센이 다칠 뻔했잖아요. 거기에 벨리알 전하의 책임이 없다곤 할 수 없죠.”

“……그랬지.”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지켜 주세요.”

사랑하라는 말은 못 한다. 그건 두 사람의 일이니까. 센과 벨리알이 복수를 위해 손을 잡았든, 그러다가 정말로 서로를 연민하게 되었든, 아니면 끝내 서로의 파멸만을 바라든.

<겨울의 심장>을 끝까지 읽지 않은 나는 두 사람의 마음을 모르고,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개입할 권한이 없다.

벨리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센을 바라보다가, 이내 나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시선이 그렇게 회의장을 한 바퀴 흘렀다.

이윽고 벨리알이 짧은 한숨을 내쉬듯 대답했다.

“약속하지.”

방금 내가 제안한 그 내용은 계약서에 적히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벨리알이 약속을 지키리라는 것을.

그건 인지나 확신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마치 슬픈 예감을 미리 느끼는 것처럼, 그냥 언젠가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어느새 ‘불러오기’의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다만 카일과 벨리알은 나눌 이야기가 남아 있는 듯해서, 나는 먼저 일어나기로 했다.

“내가 데려다줄게, 슈.”

센이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카일과 벨리알에게 눈인사를 하고 센과 함께 방을 나섰다.

혼자 다니는 것보다 이게 낫기도 하고……. 뭔가 할 말도 있어 보이고.

달칵―.

회의실의 문이 닫혔다. 나와 센의 구둣발 소리만이 복도를 따라 울렸다.

성 전체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탓인지 넓은 복도에는 지나다니는 사용인조차 없었다. 일전의 소란이 거짓말인 듯, 얇은 유리로 비춰 들어오는 한낮의 햇볕만이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할 말이 있어 따라나선 것 같던 센은 앞서 걷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장을 고르는 듯, 아니면 생각에 빠진 듯,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며 걸을 뿐이었다.

결국, 걸음을 늦춘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러자, 센이 나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

“벨리알 전하를 도와주지 말자고 했던 것도, 카일 전하의 안전을 조건으로 걸었던 것도. 둘 다 널 원망할 이유는 안 돼, 슈.”

나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나에게는 카일 전하의 안위가 더 중요해.”

“나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야.”

센은 웃고 있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목소리도 여느 때와 같았다.

하지만 그게 진짜 괜찮은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내게 괜찮냐고 물을 때면, 나도 꼭 저렇게 말하며 웃곤 했으니까.

“꼭 다 괜찮을 필요는 없는데.”

“…….”

“그냥, 그렇더라고. 예전엔 괜찮아야 한다고 자기 최면이라도 걸어서 견디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렇게 모른 척한 게 괜찮았던 게 아니라 다 곪았나 싶어서. 세상이 어떻게 다 견딜 수 있는 일로만 이루어지겠어.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잖아.”

견디기만 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상처를 돌아보고, 아프더라도 연고를 발라야 한다.

보기 싫다고 덮어 두기만 하면 영영 다 아물지도 못한 상처 위에 새로운 상처를 덧씌우면서 살게 될 것이다.

괜찮지 않은 건, 괜찮지 않다고 해야지. 결코 괜찮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상황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주 오래 그것을 모르고 살았다. 나 자신을 살리는 것에만 급급해서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을 진통제처럼 먹어 치우며 그저 밥을 먹고, 잠을 자기만 하면 사람이 살아지는 줄로만 알았다.

‘참 무식했었지…….’

그래서 나는 언제인가 썩은 속을 걷잡을 수도 없게 됐다.

장마 때마다 항상 호되게 앓았다. 때때로 긴 무력감에 빠졌고, 어디가 고장 난지도 모른 채 주어진 일만 반복했다.

행복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 곪기만 해서 아픈 것만 기억한 건지, 행복해야 할 일에도 마음 놓고 기뻐하지 못했다.

그래서 센,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보다 행복할 자격이 있고, 누구보다도 행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니까.

“…….”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센은 이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바라서 한 일이었어.”

“알아.”

“나는 내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세레나를 용서 못 해.”

“응.”

“복수를 위해서라면 사람을 이용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그래.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착하거나 순진하지 않거든. 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네가 알면…… 슈, 너는 다시는 내 얼굴 같은 건 안 보고 싶어질지도 몰라.”

걸음을 완전히 멈춘 센이 제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근데, 분명 그랬는데.”

목소리에서 울음기가 배어 나왔다. 나는 가만히 센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그녀가 다음 말을 이을 용기가 생길 때까지.

머지않아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센이 말했다.

“벨리알 전하가 걱정돼. 보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정말 염치없다는 걸 아는데, 그런데도 너랑 카일 전하에게 도와달라고 사정하고 싶었어.”

어떤 진심은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덜어지는 게 있다. 고개를 든 센은 울고 있지 않았지만, 무거운 짐을 하나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벨리알 전하가 소중해졌구나.”

“…….”

“그러고 보니, 이 말을 못 했네.”

약혼 축하해, 센.

센이 입술을 꾹 깨물며 환하게 웃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봄볕을 덮어쓴 그녀는, 정말로 오월의 신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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