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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래, 듣고 있다. 마저 이야기하도록.”
나는 땀을 삐질 흘리며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꾸우욱 밀었다. 물론, 시도에 그쳤다. 카일이 바위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안 한 탓이다.
“전하.”
“그래.”
“대공 전하?”
“응.”
“……꼭 이런 자세로 대화해야 하는 겁니까?”
좀 비켜 보라고! 너무 가깝다고!
나는 이제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마구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카일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내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더니 나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제 카일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나를 제 무릎 위에 앉힌 상태였다.
그 자세로 족히 한 시간을 마주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허우대 멀쩡한 성인 남성을 안고 있었으면서 무겁다는 말은커녕 싫거나 귀찮은 내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항상 고개를 들고 올려다봐야 했던 카일을 내려다볼 수 있는 건 신선하고 좋았지만…….
……아니, 아니. 이게 아니라!
“놓고 말해도 충분하잖아요. 저, 어디 안 갑니다.”
“안다.”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
뭘 부끄러워하고 있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래서, 네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네. 어쩌면 먼 미래에서 왔을지도 모르죠. 제가 살던 곳은 여기보다 기술이 더 발달해 있거든요. 대신, 마법이나 마수 같은 게 없고요.”
마법이나 마수가 없다는 말에 카일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그는 그 두 가지 때문에 누구보다도 전쟁 같은 삶을 살아왔으니까.
어쨌든. 나는 센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곳이 내가 읽었던 소설, <겨울의 심장>이었다는 이야기는 빼고 적당히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렇군…….”
물론, 빈말로라도 친절한 설명은 아니었다.
두서없이 늘어놓는 이야기는 이따금 원인과 결과가 거꾸로 설명되기도 했고, 적당한 말을 고르느라 뜬금없이 침묵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일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을 텐데도 의심의 눈초리 같은 건 보내지도 않았다. 내 말을 먼저 끊는 일도 없었다.
그저 내 허리를 붙들어 안은 채 잠자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마치, 자신은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무슨 허무맹랑한 말이든 꼭꼭 씹어 삼킬 자신이 있다는 듯.
“그래서 정리하자면 네가 사고로 죽었고, 알 수 없는 존재의 호의를 받아 되살아났다는 건가. 다만, 그 과정에서 일이 꼬여서 사람이 아니라 마수가 되었고.”
“맞아요. 마법으로 오해받은 것도 정확히 따지자면 제 능력이 아니라, 절 도와준 그쪽의 힘이었던 거죠. 그래서인지 마법하고는 충돌하는 것 같더라고요.”
“신성력인가…….”
그런 것도 있냐. 세계관 한번 구체적이다.
어쨌든, 카일은 마수 상태였던 내게 마법이 듣지 않고 튕겨져 나왔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고 했지.”
“맞아요. 운명을 바꾸러 온 겁니다. 좀 거창한 표현이긴 한데…… 대충 맥락은 비슷해요.”
원작을 읽었다는 말은 좀 곤란했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 ‘예지몽’을 꾼다고 둘러대기로 했다. 어쨌든 내가 읽었던 부분이나 시스템이 알려 주는 것들은 그들의 본래 이야기, 즉, 내가 바꾸기 전의 미래와 다르지 않으니까.
“그리고 네가 바꾼다던 운명이…….”
“네. 아시다시피 전하를 살리는 겁니다. 좀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보았던 꿈에서는 전하께서 일찍 죽었거든요. 해서, 그 미래를 바꾸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네가 살기 위해 나를 살리기로 선택한 거군.”
“정확히 그렇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몸에 힘을 늘어뜨리고 그에게 기댔다.
“그러니까 말했잖습니까? 운명 공동체라고.”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일견 황당하게마저 느껴지는 지식을 제 머리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는 중일 거다.
그러다 그가 내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나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세상에 사람은 많고, 네 꿈에 나만 나온 것도 아닐 텐데.”
나는 카일의 어깨에 턱을 괴고 있었다. 그에게 아예 안긴 꼴이었지만, 표정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만큼은 다행이었다. 분명 엄청나게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을 테니까.
“그냥…….”
“…….”
“당신이, 외로워 보여서.”
잠깐 읽다 덮은 책 속에서 내게 유일하게 생생했던 건 바로 네 외로움이라서. 그 서글픈 죽음만큼은 이상하게도 기억에 오래 남아서.
“그렇게 죽는 건 좀 슬플 것 같으니까, 기왕 누굴 살릴 수 있으면 전하를 살리고 싶었거든요. 건방지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데, 어쨌든 저는 그랬어요.”
“그래.”
“근데, 난들 햄스터가 될 줄 알았나. 아무리 사고당하기 전에 햄스터랑 부딪쳤어도 그렇지.”
죽은 것도 서러운데 내 인권까지 빼앗겼다. 생각해 보면 최대 피해자는 나 아니냐.
[⊙▽⊙)7]
머리 긁지 마라. 이 야박한 ‘불러오기 시간’ 어쩔 거냐고.
[◐▽◐7]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또 계시 같은 게 내려온 건가?”
내가 이야기를 하다 말고 허공을 멍하니 노려보자, 그가 물었다.
“계시라고 할 만큼 대단한 건 아니고요. 이건 좀 위대하다고 말하기도 뭐한…… 하찮은 잡담 같은 거예요.”
[!(►__◄)!]
왜. 뭐. 왜.
눈을 왜 그렇게 떠?
“그래도 꼭 망하란 법은 없나 봅니다. 주인도 잘 만났고. 아무래도 인간으로 있을 때보다는 마수로 있을 때가 많은데, 그래도 전하는 저한테 잘해 주셨잖습니까.”
“사람으로 있는 시간이 한정적인가 보군.”
“아무래도 그렇죠. 지금은 한 네 시간 정도요. 처음에는 삼십 분이어서 얼마나 곤란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옷이 없어서 곤란했던 이야기를 하소연하듯이 이어 갔다.
그 추운 성에서 셔츠 하나 겨우 입고 맨발로 다녔다며 투덜거리는 내게 카일이 미안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래서 옷을 훔칠 수밖에 없었군. 그것도 모르고 변태라고 오해했다.”
“……변태는 무슨! 저도 체면이라는 게 있습니다. 알몸으로 다닐 수는 없잖아요! 아. 말이 나와서인데요, 기왕이면 제대로 된 옷 좀 더 주세요.”
“스웨터는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건가?”
“재료가 특별해서요. 뭐, 공짜는 아니지만.”
내가 침대 옆에 잘 개어 둔 스웨터를 턱짓했다. 잔인할 정도로 아기자기한 딸기 무늬가 싫다는 이유로 그의 옷을 빌려 입은 채였다.
카일은 자신이 직접 뜬 옷을 보더니, 억울하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그것도 제대로 뜬 거다.”
“스물일곱 살 사내놈에게 적절한 옷입니까? 저게?”
“나는 당연히 내 캐슈넛이 입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넌 모르겠지만, 그걸 걸치면 무척 사랑스럽…… 읍.”
입! 입! 이놈의 입! 나는 당황해서 양손으로 그의 입을 냅다 막아 버렸다.
아니, 어떻게 반려 마수의 안에 든 게 이만한 남자였다는 걸 알았는데도 사랑스럽다는 말을 할 수 있어? 그것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때 하려던 말.”
내게 입을 막힌 터라 카일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듯이 새어 나왔다. 손바닥에 닿는 입술의 감촉이 생각보다 부드럽고 따뜻해서, 나는 얼른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네가 내 반려라고 했지.”
“……아, 처음 사라졌을 때요.”
사실 하려던 말은 ‘반려 햄스터’였고, 그래서 황당해하는 틈에 도망치려고 했다는 설명에 그는 대책 없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즐거운가. 오늘 많이 웃네.’
배신감 같은 걸 느끼거나, 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줄 알았는데.
“황당하지 않습니까?”
카일은 내 몸이 뒤로 넘어갈까 걱정됐는지 양쪽 손목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동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사실일 수밖에 없는 정황이 드러나니까.”
그간의 일을 가볍게 복기하던 카일이 아, 하고 작게 탄식했다.
“그래서 밀웜을 안 먹었군.”
“그래요. 제발 그런 건 좀 넣지 마십쇼. 키스도 좀 적당히 하시고요.”
“……키스?”
“기억 안 납니까? 항상 어디 다녀오시거나 나갈 때마다 절 들어 올리고 적어도 다섯 번씩 뽀뽀를…….”
불평하던 나는 문득 내 손목을 잡은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입을 꾹 다물었다.
카일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딴청을 피우는 그의 귀 끝은 조금 붉어져 있었는데, 어딘가 좀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그가 내게 여태 뽀뽀한 게 몇 번인데. 현타 올 만도 하다.
“아니, 뭘 그렇게 민망해하고 그러십니까?”
네가 부끄러워하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이상해지잖아!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고자 내가 나섰다.
“따지고 보면 그건 전하도 피해자시네요. 귀엽고 똑똑한 마수인 줄로만 알고 계셨잖아요.”
“귀엽고 똑똑하다.”
그가 고개를 돌린 채로 말했다.
……뭐가? 내가? 지금, 이게?
“어쨌든, 다정해서 좋았으니까요.”
“…….”
“괜찮았다니까요?”
그러자, 방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카일의 팔이 올라와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헐렁한 셔츠 너머로도 느껴지는 손은 묘하게 뜨거웠다.
“피해자라고 생각 안 했다.”
“…….”
“좋았다고 했나? 방금.”
아니, 그게 그 뜻이 아닌데.
‘……이게 아닌데?’
기이한 정적이 흐르는 동안, 카일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어떤 허락을 갈구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강제하고 있지 않으니, 떨어지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직접 움직이지 않더라도 말로 충분히 할 수도 있었다. 부담스러우니까 이거 놓아달라고, 고개라도 돌려 달라고.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 시선에 꿰인 듯 그저 카일을 마주 볼 뿐이었다. 그가 만족한 듯 눈을 휘고, 내 어깨를 감싼 팔에 조금 더 힘을 주고, 내 이름을 작게 부르고.
고개를 천천히 가까이할 때까지.
그냥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홀린 듯, 취한 듯.
혹은, 다시금 사랑에 빠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