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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57화 (5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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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을 거야.”

센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했다.

“욕심이 있는 만큼 견디겠지. 황제를 꿈꾼다는 건 그런 거랬어.”

……난 카일을 이야기한 건데, 벨리알을 걱정하고 있었구나.

침착한 척하지만 사실 그녀도 동요하고 있을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니 벨리알에게 연회장을 맡기고 나왔지만, 마음 같아서는 함께 있고 싶었겠지.

센의 눈빛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초조하게 말아 쥔 주먹이나 때때로 뒤쪽으로 향하는 시선 역시 마찬가지고.

하지만, 센은 그 사실을 별로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 역시 상대가 숨기고 싶어 하는 부분을 억지로 들추는 성격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몇 걸음을 더 걸었다.

“얼른 내 방으로 가자. 근처에 있을 블레이크 기사단과 합류하면 카일 전하께서 금방 이쪽으로 오실 거야. 얼마 안 남았네.”

“그래, 그게 좋겠다. 가면 네 옷을 좀 빌려도 될까? 드레스 입은 채로는 움직이는 게 영 불편해서.”

“응. 그리고…….”

바스락.

절뚝거리며 걷는 센의 어깨 너머에서 수풀이 움직이는 소리가 울렸다. 단순히 바람 때문에 울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신호하면 곧장 뛰어.”

“……슈?”

“나는 곧장 햄스터로 돌아가면 돼. 시간을 좀 끌 테니까, 너는 뒤도 돌아보지 마.”

이곳에 잠복하고 있었다면 내가 목표일 수도 있다. 그럼 오히려 다행이지. 나는 도망칠 수단이 있고, 그동안 센은 별궁으로 달아나면 되니까.

로렌츠는 벨리알은 물론이고 기회만 된다면 카일의 세력 역시 줄이려는 모양이다. 정통성을 갖췄지만 어떤 권위도 갖추지 못한 그는, 아무래도 상대를 깎아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반을 다지려는 것 같았다.

“다 들켰는데, 그만 나오시지!”

나는 센을 별궁 방향으로 세게 밀어내며 외쳤다.

신호를 알아챈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고, 나는 아까보다 더욱 크게 흔들리는 수풀을 바라보며 치미는 두려움을 애써 잠재웠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겨우 세 명이었다. 기회를 노리던 예비 인원이었을 뿐인지, 살기 자체는 대단하지 않았다. 아마 검을 다룰 줄 몰라 보인다고 얕본 걸까.

‘사실 두어 명만 있어도 충분하긴 하지.’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몸이 떨리거나 초조해지지는 않았다.

“난 왜 죽이려는 거야? 어차피 북부로 올라가면 다시 내려올 일도 거의 없을 텐데.”

그뿐이냐. 일만 잘 해결되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거라고. 누가 황제가 되든 알 바냐? 카일만 안 죽으면 그만인데.

“생포하라시더군.”

목적이 납치였냐. 한술 더 뜨네.

아마도 내가 카일의 약점이라고 생각해서 날 빌미로 그를 통제하려는 계획이었을 거다. 딱 로렌츠가 할 만한 생각이었다.

꽤 비겁한 방법이긴 해도, 어쨌든 성공하기만 하면 나름대로 유효한 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잡혀가면 카일은 분명히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너희 정도로는 날 절대로 잡을 수가 없을 텐데, 안됐다. 못 데려가면 황자님이 의심 좀 하시겠네?”

내가 깐죽거리자, 병사들이 인상을 찡그렸다.

“네놈이 우리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비리비리하게 생긴 놈이!”

비리비리하다니! 아무리 평소에 운동을 안 해서 근육이라곤 없는 몸이라 해도! 비리비리까진 아니잖아!

그러나 나는 발끈하기보다 씩 웃어 보였다.

“황자가 시킨 게 아니라고는 안 하시네?”

머리 쓰는 꼴을 보니 측근은 못 되겠고, 아마도 내가 도망치고 나면 알아서 제풀에 망할 위인들이다.

그나저나, 꽤 대대적으로 움직이려는 모양이다. 역시 앞으로 더 피곤해지겠지.

“뭘 꾸물대는 거냐.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 적당히 잡아서 끌고 가!”

나는 심란한 표정으로 내 연미복을 내려다보았다. 카일이 맞춰 준 건데, 두고 가자니 영 신경이 쓰인다. 나중에 다시 주우러 올 시간이 있을까.

물론,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검을 뽑아 든 이들이 위협적인 기세로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슈!”

멀리서 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내가 걱정되어서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따라온 모양이다.

‘재수 더럽게 없네…….’

하필이면 딱 지금 오냐. 여기서 더 수상하게 여겨질 만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카일이 나타난 걸 본 이들이 재빨리 내게 검을 겨누었기 때문이다. 까딱하면 큰일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건지, 그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따 봅시다, 전하.”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괜히 내가 여기서 어쭙잖게 시간을 끌다가 카일이 다치면 안 되니까. 그를 살리기로 결심한 만큼, 적어도 그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는 건 면하고 싶었다.

곧, 직선으로 찔러 오는 검이 내 머리카락에 닿는 순간.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흰빛 너머로 언뜻 보았던 카일은, 당혹스러우면서도 어딘가 간절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

또다시 사라졌다.

그것도, 눈앞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린 게 처음은 아니었다. 슈는 종종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곤 했다.

‘마차를 빌린 이가 없는 건 물론이고, 황성으로 가는 말을 빌린 사람도 없습니다.’

‘그 마을에는 슈라는 이름의 청년은 없었답니다.’

‘전하. 마수학자님이 황성에 도착하셨던 날 말입니다. 캐스터네츠 상단 쪽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들어 보셨습니까? 딸기 무늬 스웨터를 입은 변태가 와서 물건을 찾아갔답니다. 옷과 돈주머니를 맡겼다는데, 물건이 출발했다던 지부가…….’

‘마수학자님은 도대체 어디서 주무시는 겁니까? 밤에 방에 계신 적이 없습니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슈는 언제나 제 편이라고 했다.

카일은 그 말에 서린 진심을 믿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보다는 제 눈앞에 있는 그의 존재를 더 믿었다.

하지만 그의 수상쩍음이 가리키는 곳이 어디인지 알았을 때, 카일은 처음으로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설마.’

그렇게 피어난 의심은 갖가지 가정 속에 그를 끼워 넣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수였다가,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수였다가.

“…….”

카일은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볼썽사납게 널브러진 남자들을 발로 치워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슈가 수상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가 안전한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

나는 햄스터로 돌아오자마자 견과류 상점을 불렀다. 다행히도 시스템이 준비한 신제품이 도착해 있었다.

‘일 열심히 했네.’

꽤 쓸모 있어 보인다.

NEW! [호두 껍질 속 부드러운 연고 | 기적 수치 3% 소모 | 어떤 상처든 확실하게! 흉터 없이!]

NEW! [잣이 콕콕 진통제 곶감말이 | 기적 수치 1% 소모 | 20분간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습니다.]

센은 옷을 갈아입을 기력도 없었는지, 내 방 벽에 기대앉은 채 다친 다리에 물을 천천히 붓고 손수건으로 닦아 내고 있었다. 상당히 아픈 듯 인상을 찡그린 채였다.

‘……진통제를 먹는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겠지.’

흉터가 남을 수도 있으니까, 역시 연고가 좋겠다. 나는 내 몸집만 한 호두를 아니, 호두 껍질 속 부드러운 연고를 들고 뒤뚱거리며 센에게 걸어갔다.

“슈?”

―찍. (기다려.)

기적 수치를 3퍼센트나 썼는데 크기는 정말 호두 한 알 크기네. 약효 없으면 가만 안 둘 줄 알아라.

나는 호두 껍질을 반으로 비틀어 빼내고는 반투명한 연고에 팔을 푹 담갔다. 그러곤 센의 무릎 위로 올라가,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기 시작했다.

“이런 건 어디서 난 거야?”

―찌익. (영업 비밀이다.)

“그렇게 말해도 난 몰라, 슈.”

―찍. (그럼 가만히 있어.)

나는 아예 양손을 연고에 푹 담근 뒤, 칼에 베인 상처 위를 부지런히 콕콕 짚어 대기 시작했다.

센의 지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만류하고 제가 할까 하다가, 내가 부지런히 오가며 애쓰는 모습이 퍽 귀여워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잘 도망쳤네, 다행이다. 다친 곳은?”

―찌직. (없어.)

“카일 전하는 오시겠지?”

―찍. (아마 곧 올걸.)

아, 그러네. 카일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다시 집에 들어가 있어야겠다.

상처에 고루 연고를 바른 것을 확인한 나는, 호두 껍질을 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직 일이 다 끝난 게 아니기에 그녀에게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기적 수치를 3퍼센트나 소모해서 산 연고의 효과는 상당히 좋았다.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던 상처가 언제 그랬냐는 듯 겉이 아물기 시작했다.

아마 속까지 완전히 아물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약초 붙여 놓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다.

“상처가 아물고 있어…….”

센이 놀란 듯 중얼거리며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슈, 너 진짜 대단하다! 이것도 마법인 거야? 네가 햄스터가 된 것처럼?”

―찍. (놔라. 나 들어가야 돼.)

“넌 진짜 알면 알수록 신기해. 나, 지금 혹시 꿈꾸니? 아니지? 아무리 봐도 신기해.”

―찌이익. (감탄은 너 혼자 해. 나, 카일 들어오기 전에 들어가야 한다고!)

“혹시, 연고 더 없어? 이거 팔면 슈, 너는 정말 부자가 될 수…….”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찌이……. (망했네…….)

카일이 나와 센을 바라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에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는…… 정말이지 지옥에서 갓 올라온 귀신 같았다. 정말 장난 아니다. 내가 봐도 등골이 서늘할 정도니 말 다 했지.

카일이 센과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슈는 어디에 있지?”

“어…… 그게…….”

저 눈빛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눈빛이 아니다. 반쯤 확신을 담은 눈빛. 이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다 알고서 하는 물음.

‘아.’

올 게 왔구나.

준비하고 있던 일임에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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