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56화 (56/129)

56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하인으로 위장한 병사의 수는 제법 많았다. 몇은 재빨리 달려가 연회장의 문과 창문을 지키고 섰고, 몇 명은 무기를 들고 달려들어 귀족들을 공격했다.

“근위대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누군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근위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더라도 일이 다 끝나고서야 오겠지. 이들은 철저히 훈련된 사람들이고, 이날만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을 테니까.

‘목표는 역시, 벨리알과 센이겠지…….’

나는 혼란을 피해 기둥 뒤로 숨으며 카일을 찾았다. 그는 방금 주례에게서 단검을 빼앗은 뒤, 머리를 쳐 기절시켰다.

죽일 각오로 덤벼드는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급소를 노려 죽이는 데 더 익숙한 카일로서는 그것을 피해 기절만 시켜야 하는 게 더 수고로울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카일이 마수뿐만 아니라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도 제법 익숙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살인이 아니라 제압하는 방식으로.

“가까이 와!”

카일이 내게 소리쳤다. 나는 의심하지 않고 그에게 달려갔다.

푹.

빛살처럼 날아온 단검이 나를 지나서 내 등을 노리던 이의 어깨에 정확히 꽂혔다. 밀리는 힘을 이기지 못한 남자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상대 중 훈련받은 암살자가 섞여 있다. 모여 있는 쪽이 더 안전해.”

카일이 내 팔을 끌었다. 짐이 될까 봐 일부러 거리를 두었던 내 생각과는 반대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그의 등 뒤에 섰다.

그곳에는 센이 다친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꾹 짚어 지혈하고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에 번진 혈흔이 짧은 시간 벌어진 난장판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와 벨리알이 서쪽 문을 뚫을 거다. 무관한 귀족들이 많으니, 저들도 결국 물러나겠지. 물론, 바깥에도 저들의 세력이 숨어 있을 테니 안심해서는 안 돼.”

“……전 뭘 해야 합니까?”

“센을 데리고 별궁으로 도망쳐. 가서 블레이크 기사단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보호를 요청해. 금방 따라가겠다.”

“괜찮은 제안이군.”

가까이 다가온 벨리알이 장식용 검에 묻은 피를 떨쳐 내며 차갑게 웃었다. 카일과는 달리 누굴 해쳐도 처벌을 덜 받을 테니, 꽤 과감하게 움직였던 모양이다.

“보이나?”

벨리알이 나와 카일에게 물었다.

카일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보입니다.”

시스템 창이 내 이해를 돕기 위해 상황을 전달했다.

[현재 공격의 대상이 된 이들은 모두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와 센 랑드에게 우호적인 귀족들입니다.]

“생각보다 이르게 본색을 드러내셨군그래. 형님도 어지간히 마음이 급하셨던 모양이야.”

이 일을 직접적으로 일으킨 건 로렌츠가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을 한 꺼풀만 벗겨도 로렌츠의 뜻이, 그리고 그가 얻을 이득이 훤히 보였다.

그래, 눈에 뻔히 보였다.

이건 로렌츠 세레나 마인하르트의 경고다.

벨리알의 손을 들면 언제든지 피를 뿌리게 될 거라는, 이런 식으로 황자들을 치워 버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불사할 거라는 경고.

저열하고 음습하다. 게다가 이제는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일을 벌인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솔직히 좀 질렸다.

물론, 누군가의 악의에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무리 카일과 벨리알이 지켜 준다고 해도, 이렇게 비좁은 공간에서 부딪치다 보면 다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가자. 부축해 줄게. 괜찮겠어?”

센은 잠시 고민하더니 너덜너덜해진 드레스 장식이나 귀걸이 따위를 바닥에 내버렸다. 그녀는 면사포마저 뚝 떼어 내던지곤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얼른 가자!”

“습격입니다. 바깥의 사병들을 조심하십시오.”

“근위대가 도착했습니다만…… 이미 습격 때문에 붙잡힌 사람들이 많답니다!”

벨리알이 황당하다는 듯 일갈했다.

“어떤 미친 작자들이 감히 황성에서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이냐. 반란 분자들을 모두 죽여서 그 죗값을 치르게 해라!”

벨리알은 방금 도착한 수행 기사에게서 검 한 자루를 받았다. 그러곤 잠시 고민하더니, 그 기사의 허리춤에 매여 있던 검을 신경질적으로 빼앗아 카일에게 내던졌다.

“같잖은 자비심은 이제 그만 베풀 때도 됐다. 지킬 것이 있으면 독해질 줄도 알아야지.”

자비심이란 말에 카일이 삐딱하게 웃었다. 질 나쁜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적당히 죽이면…….”

“뒤처리는 벨리알의 이름으로 해 주지. 더없이 완벽하게.”

그 말에 카일의 눈빛이 바뀌었다.

“썩 그러길 바란 건 아니지만……. 지금만큼은 물러 터진 얼간이보다는 피의 대공작이 낫겠군요.”

이후, 우리 네 사람은 동시에 서쪽 문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쪽문이지만, 이쪽에서 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가면 곧장 별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벨리알은 거침없는 동작으로 우리의 앞을 막아서는 이들을 쓰러뜨렸다. 정말로 죽은 이가 나오자, 귀가 따가울 정도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물론, 쳐다볼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나야 ‘불러오기’를 해제하면 그만이라지만…….’

센을 죽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안 되지.

벨리알은 이곳에 남아서 상황을 정리하고, 기절한 놈들을 끌고 가 추궁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카일은 우리 두 사람을 보호하기로 했다.

다만, 애석하게도 연회장 바깥의 상황은 안쪽보다 더 나빴다. 신원 불명의 사병들이 우리를 잡기 위해 포진해 있었던 탓이었다.

“쥐새끼들처럼 꾸역꾸역 몰려오는군.”

거친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닌 카일의 입에서 처음으로 욕설이 나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용이…….

너무 그러지 마라. 듣는 햄스터 서운하게.

물론, 마음이 이해되기는 했다. 황성 한복판에서 벌어진 난장판이라니. 이런 촌극은 거금을 들여도 보기 힘들 거다.

‘하인들은 물론이고 근위대까지 엮여 있는 거라면, 황성 어디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뜻이겠지.’

카일은 검을 든 십여 명의 사내들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되레 성큼 앞서 나가고는 양손으로 검을 쥐더니 그대로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정면으로 힘차게 내리찍었다.

쿵!

붉은 마력을 두른 검이 바닥으로 내리쳐지자 흡사 바위가 쪼개졌대도 믿을 만큼 어마어마한 소리가 났다. 그로도 모자라 쩌적 하고 마력이 직선으로 쏘아져 나가, 붉게 파인 길을 만들어 냈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니, 감히 내 앞을 막아섰겠지.”

카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어떻게 그토록 척박한 북부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북방의 패자가 될 수 있었는지 여실히 증명할 만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죽음이 왜 두려운 것인지 친히 알려 주겠다.”

나는 얼른 주변을 살폈다.

지원군이 더 오지 않는 것을 보니 이게 전부인 듯했다. 하긴, 아무리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해도 숨기는 시늉 정도는 해야 했으니, 들이는 인원에 한계는 있었을 것이다.

카일이 몰려드는 이들을 막아 내는 동안, 나는 센을 부축하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녀는 부상 때문에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이를 악물고 견뎌 냈다.

카일이 그런 우리를 엄호하며 따라오려고 했다.

그러나.

“순백의 마탑주께서는 기회를 기다리신다. 운명에 굴복한다면 목숨 정도는 부지할 수 있겠지.”

“호오…….”

쓰러진 채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한 사내의 말에 카일의 붉은 눈이 이채를 띠었다.

“너, 마법사로군.”

일전에 나도 비슷한 말을 그에게 들은 적 있다.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그리고 절벽에서 떨어졌는데도 살아 돌아왔을 때.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말투는 완전히 달랐다. 카일의 목소리에서 적나라한 분노와 살기가 묻어났다. 내게 건네는 말이 아닌데도 섬뜩할 정도였다.

“혹은, 그놈들의 수족이거나. 응?”

카일이 남자의 머리채를 쥐곤 우악스러운 손길로 잡아 올렸다.

“틈틈이 보내는 ‘선물’ 덕에 내 땅의 사람들이 수십 명씩, 수백 명씩 처참하게 죽어 나갔지. 앙갚음하지 않았다고 해서, 너희를 용서했을 거라 믿었나?”

“쿨럭…….”

“블레이크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오늘 그 사실을 증명하게 되어 무척 기쁘군.”

카일이 손아귀 힘을 풀지 않은 채, 내게 조용히 명령했다.

“슈.”

“……네, 전하.”

“최대한 빨리 정원을 가로질러 별궁으로 가도록.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찾아가겠다.”

“알겠습니다.”

“난 이놈과 잠시 대화를 나눠야 해서.”

앞으로 행할 모습을 별로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거겠지. 게다가 아직 다른 이들이 남아 있으니, 우리까지 여기 남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나는 고개를 힘차게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단순히 로렌츠의 흉계로 그치지 않을 모양이었다. 북부 무법 지대의 ‘서리의 마탑’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가자, 센. 치료 도와줄게.”

“응.”

나는 절뚝거리는 센을 최대한 부축하며 시스템에게 속삭였다.

‘견과류 상점! 견과류 상점 좀 열어 봐. 아니다, 지금 열어도 별로 소용없겠다. 가는 동안 쓸 만한 아이템 좀 추가해 줘. 치료 계열로!’

[o(><;)o] ‘얼른! 기적 수치 많이 써도 되니까!’ [o(><;)o =3=3] 센뿐만 아니라 카일, 그리고 벨리알까지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치료보다 확실한 게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내 목숨값이긴 하지만. 황성에 의사가 있기는 하나, 약혼식에서마저 이런 일이 일어난 만큼 앞으로는 언제 어떻게 사건이 터질지 모른다. 미리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 “……괜찮겠지?”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내뱉고 나서야 알아차린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건 지금 내가 굉장히 초조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걱정된다. 알고 있다. 카일 블레이크는 강하다. 그 이름에 쌓인 그의 노력과 재능은 어마어마했기에, 그는 이런 일로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은 됐다. 원하는 걸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 얼마나 지독해질 수 있는지 아니까. 그런 놈들의 악의에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해서. 운명 공동체인 네가 살았으면 해서. 행복했으면 해서. ‘내가…….’ ……너를, 좋아해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