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55화 (5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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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꽃으로 장식된 새하얀 홀은 밝고 또 무척 넓었다.

황궁의 사용인들과 초대받은 귀족들의 수를 합하면 두 자릿수가 훌쩍 넘어가는데, 기다란 탁자에 진수성찬을 차려 두고도 중앙에서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입구부터 단상까지 이어진 카펫 위를 걸으며 재빨리 탁자부터 살폈다. 기름기가 반지르르한 닭 요리를 메인으로 뷔페처럼 갖가지 음식들이 늘어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인다. 사실 약혼식은 핑계고, 다들 황궁 요리사의 요리를 먹으러 왔대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이게 목적이 아니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벨리알과 센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드레스와 턱시도를 나란히 맞춰 입은 둘은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또 어떻고? 센의 눈동자를 닮은 연녹색 에메랄드 반지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의 것이었던 양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괜히 자식 시집 보내는 느낌이네.’

나는 기묘한 씁쓸함을 느끼며 파랗게 뜬 시스템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현재 기적 수치 42.2%]

로렌츠와 내가 관련된 덕분인지, 기적 수치가 미세하게 조금 더 올랐다. 내게 굳이 전달하지 않은 자잘한 퀘스트가 처리된 건지 하루하루 올라가는 게 남다르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50일 남았습니다.]

카일의 기대 수명 역시 훌쩍 늘어났다. 겨울이 다 지났는데도 반년 남짓이라니.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그렇다고 해도 썩 긴 편은 아니다. 아직 위험 요소가 다 제거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뭘 알아야 대비를 할 텐데…….”

카일과 벨리알의 대립이 공작 가문의 집안싸움으로 옮겨 간 것까지는 기뻐할 만한 일이다.

다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누군가의 기대 수명이 늘어났다면 다른 누군가의 기대 수명은 짧아졌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이 벨리알이 될지, 로렌츠가 될지, 그것도 아니면 센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특히나 등장인물에서 벗어난 센의 경우는, 지금 당장 이상 현상이 생긴다 해도 시스템에게 따져 물을 수조차 없다. 늪 염소나 와이번처럼…… 이야기 바깥의 존재가 되어 버린 거니까.

복잡한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자, 다른 귀족과 이야기하던 카일이 내 뒤에서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지?”

“다 전하께 도움 되는 생각들이죠, 뭐.”

그래. 내가 괜히 고민하겠냐? 다 카일, 너한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고민이다.

그렇게 다시 생각에 잠기려는 찰나, 뒤에서 뻗어져 나온 카일의 손이 내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진 와인 잔을 다시 바르게 돌려놓았다.

“어…….”

“옷이 두 벌이긴 하다만, 와인을 쏟아 갈아입는 건 귀찮을 듯하여.”

“감사합니다.”

그가 낮게 웃으며 내 손목을 놓았다. 나는 약간 서늘하게 남은 카일의 체온을 반대쪽 손바닥으로 덮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로렌츠 황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카일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의중을 묻듯 나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본 바를 믿어라.”

“상당히 불경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저.”

그러자 카일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여태까지 보여 준 것과는 제법 다른 온도감이었다.

“네 생각보다 덜한 자이길 바라야지.”

“그 정돕니까.”

카일은 대답 대신, 내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을 가져가 자신이 한 모금 마셔 보았다. 바로 삼키지는 않고 입 안에 머금은 채로 잠시 가늠하듯이 기다리다가 이내 삼켜 본 뒤, 내게 돌려주었다.

“평소의 로렌츠 전하를 생각한다면, 어제 보인 모습은 꽤 과격한 편이다. 직접 나섰다는 건…….”

“전면전을 앞두고 있다는 거겠죠, 벨리알 전하와.”

“그래. 그것도 시일 내로.”

황위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갖은 수를 써 가며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배다른 형제는 물론이고 함께 자란 동생마저 서슴없이 적대할 만큼 대단한 걸까.

“황위 때문에 형제끼리 해치는 일도 흔합니까?”

“생각보다 흔하지. 사냥이라는 잔인한 혈통을 빌려 목숨을 취하기도 하니까.”

개판이네.

나는 그 ‘사냥’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카일은 황위에 관심이 없고,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

그사이 혼인 서약 준비가 끝났다.

흰옷을 입은 주례가 엄숙한 표정으로 단상에 올랐고, 황실의 큰 경사에만 나온다던 포도주가 두 개의 잔에 나란히 따라졌다.

마인하르트 제국에서는 약혼식을 화려하게 하고, 정작 결혼식은 간소하게 한다고 한다.

결혼식처럼 성대하게 치러진 약혼식에서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서약한 뒤, 포도주를 마신다. 그것으로 이미 부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이후 결혼식은 대주교 앞에서 축복받는 것으로 끝난다고.

“벨리알 전하와 센 님께서는 선언문을 낭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단상 주변으로 모여든 이들은 열띤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나 역시 카일과 함께 센이 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는 센 랑드를 부인으로 받아들여 다음의 것을 약속한다. 첫째, 삶의 동반자를 신실하게 대하며 존중할 것이다.”

정략결혼이 많아서 그런가, 사랑하겠다는 말보다는 확실히 사무적으로 들렸다.

“둘째…….”

벨리알은 무언가 생각하더니 선언문을 덮었다. 그러더니 센을, 그리고 센 너머에 서 있는 로렌츠를 또렷하게 보며 말했다.

“그대를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

주변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귀족의 낯빛은 창백하게 질리기도 했다.

“……가장 고귀한 여인이라니?”

“다른 표현도 아니고 굳이 그 이야기를, 약혼식에서 하신다고…….”

“난 이럴 것 같았어.”

“선전 포고 아닌가?”

“선전 포고는 무슨. 제국의 상징을 잊었소? 사자는 강자를 상징하지. 이런 패기야말로 황제의 재목에 어울리는 모습 아니겠나?”

미묘하게 불편해 보이는 귀족들과 은근히 반가워하는 이들이 뒤섞여 작은 혼란이 퍼져 나갔다.

나는 시스템에게 조용히 해석을 부탁했다.

‘무슨 뜻이야?’

[세레나는 마인하르트, 고대어로 ‘고귀한 여인’을 뜻합니다.]

아.

‘그러니까, 지금 센을 세레나로 올리겠다는 포부를 밝힌 거구나.’

센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로 벨리알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두 사람은 이 상황을 미리 계획한 듯했다.

사람들의 동요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벨리알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셋째, 그대를 어떤 위협으로부터든 보호할 것을 맹세하겠다.”

센이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센 랑드는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를 남편으로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약속하겠습니다.”

벨리알이 내내 센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던 것과 별개로, 선언을 시작한 센은 선언문을 빤히 바라보며 맹세를 이어 갔다.

마치 혼약 자체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거나.

“이제 황실의 가장 숭고한 순간에만 함께하는 포도주를 두 분께서 드셔 주시면 됩니다.”

벨리알이 먼저 잔을 들어 올리곤 포도주를 천천히 마셨다. 카일이 그랬던 것처럼 간단히 냄새를 맡고 입에 잠시 머금어 독을 확인한 뒤, 천천히 삼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독 내성이 없는 센은 준비된 마법 막대를 잔에 비스듬히 꽂았다. 이후 잠시 기다렸다가 그것을 빼내 색의 변화를 확인했다.

“……이, 이게 무슨.”

“색이…….”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혼란이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그도 그럴 게 막대가 검게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명령이 있거나 황족과 관련된 큰일이 있을 때만 여는 포도주에 독이라니. 연회장에 들어온 이후로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던 센마저도 당황한 표정으로 막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래도록 기다렸는지.”

흰옷을 입은 주례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곧, 그가 재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숨겨 두었던 단도를 꺼냈다.

내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건, 내 옆에 서 있었던 카일의 반응 속도였다.

“센!”

주례가 단도를 앞으로 내찌르는 동시에 카일이 센의 팔을 잡아당겨 위치를 바꿨다. 모든 게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서, 나로서는 상황을 눈으로 좇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예리한 칼날이 카일의 팔을 깊게 베고 지나갔다. 후드득, 붉은 피가 바닥에 떨어지자 귀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근위병! 근위병을 불러!”

“기사들은 무얼 하는 거야!”

하지만, 이미 소란에는 불이 붙었다.

주례가 당황하긴커녕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것과 동시에 하인으로 위장했던 이들이 식기용 나이프나 포크, 아니면 허리춤에 숨겨 두었던 칼을 꺼내 귀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탁자에 올라와 있던 음식이며 술이 바닥에 깨져 날카로운 파열음이 연달아 울렸다.

“누군가 황자님을 죽이려고 해!”

“당장 벨리알 황자님과 남작 영애를 보호하라고!”

하지만 센을 막아선 건 하인들도, 벨리알도 아니었다. 싸늘한 무표정의 카일이 센의 앞으로 나서며 붉은 눈동자로 주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필요 없다. 내가 상대하지.”

[카일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단도가 빠져나간 자리에서 울컥,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그 피는 단도를 쥔 여린 손에, 그리고 손의 주인이 입은 새하얀 드레스에도 튀었다.]

[센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는 듯, 녹색 눈동자가 결연하게 가라앉았다.]

……잊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잊고 있을 수 있었을까.

카일의 예상 사망 시간이 늘었다는 사실 하나에 안주해서 원작대로라면 이 약혼식에서 센이 카일을 공격했으며, 그로 인해 카일이 치명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 울컥 치미는 기분이 들었다.

‘이걸 왜 이제 알려 주는 거야!’

하지만 동요하는 나와 달리, 카일은 침착했다.

“감히 블레이크의 주인 앞에서 그 땅의 사람을 해치려 하다니.”

무장하지 않은 그의 손에는 검 한 자루 들려 있지 않았지만, 그 누가 어떤 명검을 들고 온다고 한들 그보다는 나약해 보일 것 같았다.

카일 블레이크의 눈동자가 결연하게 가라앉았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이 선택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설령 센을 감싸다가 죽게 되더라도.

운명이 소용돌이치며 뒤섞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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